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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아프리카의 눈물_황금 물고기_191010 취뜨예르그 Четверг

'현대 프랑스 문단의 살아있는 신화'라는 클레지오의 장편소설 '황금 물고기'를 읽는다. 아프리카의 어느 곳에서 내전 중 납치되어 팔려간 어린 소녀의 이야기다. 6, 70년대 한국의 어린 소녀들이 새끼 식모로 팔려갔던 그런 상황의 유럽판이다.


엄마와 고향으로부터 강제로 격리된 그녀는 첫번째 마님으로부터 노동력 착취는 당하지만 교육과 의식주를 비롯한 기본 보호를 받는다. 납치와 사고의 충격으로 생긴 공포심까지도 마님의 등에 기대어 위로받음으로써 몇 년 간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유럽의 마님들이 어린 소녀들을 사는 목적은 무엇일까. 어린 노동력의 확보, 아이 키우는 행복, 빈곤한 아이들의 구제 등이다. 뒤의 두 개는 악행을 선행으로 보이기 위한 껴맞추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린 소녀들은 어린 노예로 간신히 삶을 유지했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본능에 의해서. 가슴 아픈 역사인데, 누구도 사죄하거나 반성하지 않는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살을 먹는다는 것 말이다. 프랑스인들이 우리 마을에 왔을 때, 그자들은 젊은 남자들을 데려다 밭에서 일을 시켰고, 젊은 여자들은 식탁 시중을 들게 하거나 요리를 만들게 하거나, 아니면 자기들 여자는 프랑스에 두고 왔으니 그 대신 데리고 자곤 했지. 그리고 흑인 아이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여차하면 자기들이 잡아먹을 거라고 떠벌이곤 했단다." (154쪽) 


어린 노예들은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성폭행의 대상이 된다. 끊임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추고 있는 아름다움을 클레지오는 황금이라고 표현했다. 황금을 소유한 존귀한 존재가 아니라 황금 물고기가 되어 사냥의 표적이 된다. 살아남아야 하는데 영화 '가버나움'의 그 아이는 그러지 못했다. 빛나는 황금 때문에 보호의 대상이 되었다가도 어느 순간 사냥의 대상이 되고 만다. 


사냥터의 한 가운데서 살아남기 위한 무엇을 추구한다. 어린 나이에도 사람의 표정과 의도를 금방 이해하고 무엇을 지켜야 하고 버려야 할 지를 안다. 스스로 서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노예의 안락을 거부해야 한다. 그것 또한 어려운 문제다. 사냥감이 되고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상황에서도 선택할 수 있을 때는 고향과 엄마가 있는 나라는 존재를 선택해야 한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도 이렇게 격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의 눈에 보석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는 말이 '상처받은 육체와 영혼'에게 과연 위로가 될까라는 생각을 한다. 양심이 찔리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죄가 조금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이 아닐까.


"아무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 해도 신의 눈에는 보석처럼 보인다는 사실이지. (중략) 라일라야, 너는 아직 어리니까 조금씩 세상을 알아나가기 시작할 거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는 도처에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될테고, 멀리까지 그것들을 찾아나서게 될 거야." (154~5쪽)


지은 죄를 회피하려는 가해자들의 심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인간이 한 사람의 존재로 서기 위해서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삶을 포기하지 않고 약물이나 마님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홀로 서려고 해야 한다. 세상은 때로는 나를 돕지만 영원히 도울 수는 없다.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가해자의 논리가 아무리 밉다고 해도 그것은 현실이다. 희생자도 황금을 소유한 인간인 이상 물고기처럼 언제나 쫓겨 다닐 수는 없다. 빛나는 모습으로 홀로 설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물고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슴 아프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게 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 뒤에 슬그머니 따라붙어서 내 가족이라고 상상하거나, 아니면 한 남자를 뒤따르며 내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연인이라고 나 자신에게 속삭이거나 하는 일들 말이다. (중략)  위험한 사람들은 그들의 희생자들이었다. 그들은 동조자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사람들이 우리와 그들의 행복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결코 우리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218쪽)


절망의 상황에서도 자신을 선택한 그녀에게는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그녀의 황금 본성이 드러내지기 전까지, 마침내 드러난 황금 본성으로 스스로를 지켜갈 수 있는 상황에서도 세상은 끊임없이 춥고 두려운 눈 내리는 대지다. 모든 생명이 스러진 곳에서 홀로 서야 한다.


"넓은 들판은 흰 빛이다. (중략)

 모든 생명이 스러졌다. (중략)


 오! 작은 새들에게는 끔찍한 밤이다!

 싸늘한 바람이 몸서리를 치면서 가로수 길을 내달린다.

 작은 새들, 요람 속의 나무그늘 드리워진 안식처를 잃고서

 언 발을 동동거리며 잠 못 이룬다.


 빙판에 덮인 헐벗은 커다란 나무들 사이에서 작은 새들,

 보호해주는 이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떨고 있다."


(니스의 쓰레기장에서 주워 낸 시집을 읽다 / 226쪽)


그녀는 납치되었던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어머니를 만나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고향과 엄마는 정말로 그녀의 자유로운 삶을 지켜주는 힘의 원천일까. 고향과 엄마는 나를 황금처럼 고귀한 존재로 보호하고 양육한다. 상처 주지 않으며 언제나 사랑을 베풀어 준다. 세상의 폭력이 고향과 엄마로부터 그녀를 격리시켰다. 폭력 속에서도 나를 세우려고 했던 그녀는 어른이 되어 자유를 얻는다. 고향과 엄마를 잊지않는 한 그녀는 스스로 자유와 사랑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믿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녀도 나도, 우리의 아이들도.


"이제 나는 자유로우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름을 떨친 나의 조상 빌랄처럼, 노예였다가 예언자 마호메트가 속박에서 풀어주고 세상을 내보낸 그 사람처럼, 드디어 나는 또 하나의 빌랄 족이 되어 부족의 시대에서 벗어나 사랑의 시대로 들어선다.


떠나기 전에 나는 바닷속의 돌처럼 매끄럽고 단단한 노파의 손을 만졌다. 단 한 번만, 살짝, 잊지 않기 위하여." (294~5쪽)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빛나는 삶을 이어나갈 소중한 생명들에게.


"오, 물고기여, 작은 황금 물고기여, 조심하라! 세상에는 너를 노리는 올가미와 그물이 수없이 많으니."


- 황금 물고기 / 르 끌레지오 장편소설 /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1998년 2월 1판 2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