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호기심천국/발칸 크로아티아 여행

[겨울 보스니아 여행] 보스니아 천사와의 대화_160109

어제는 너무 배가 불러서 기껏 준비한 포도주를 손도 대지 않았다. 밥과 누룽지, 된장국, 신선한 야채와 오이로 아침을 먹는다. 오늘 일정은 오전에 자그레브성과 실연 박물관을 다녀 오려 했는데, 아드리아해쪽의 날씨가 비가 오고 우중충하다. 오전 일정을 취소하고 아침 일찍 차를 찾아 보스니아 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렌트 계약을 하기 전에 185가 넘는 아들의 신체를 고려해서 승차감을 먼저 확인해 보기로 했다. 타기 힘들면 좀 더 큰 차로 바꾸기로 하고. 호텔 주차장에 마련되어 있는 폭스바겐 폴로. 작은 차인데도 짐가방 두 개가 들어가고 뒷좌석은 우주신이 충분히 누울만한 공간이 나온다. 굳이 큰 차를 빌릴 필요가 없었다. 4000쿠나(72만원)의 디파짓을 결제하고 차를 넘겨 받았다.


후진이 안된다. 분명히 왼쪽으로 젖혀서 앞으로 밀라고 되어 있는데, 계속해서 1단 기어만 들어간다. 5분여를 씨름했다. 그리미는 옆에서 좌불안석이다. 돈 아끼려고 수동했더니 출발도 못하니 말이다. 현대차는 오른쪽으로 밀어서 뒤로 제끼면 후진, 대우차는 스틱에 붙어있는 클립을 잡아올리면서 1단을 넣으면 후진. 넌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냐. 스틱을 붙들고 씨름하는 중에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다. 힘차게 스틱을 내리 누른 상태에서 1단을 넣으면 후진이다. 만세. 차량 인도해주는 직원에게 물어보면 간단한 일을 어렵게 해결했다.




셋이 타면 꽉 끼는 이 비좁은 엘리베이터도 이제 추억이다. 

열쇠를 꽂지 않으면 작동되지 않는 신비한 구조. 

여행을 다녀보면 치안이 안정된 모습인데,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네비게이션의 제어판에는 한국어 서비스가 있지만 음성 안내는 한국어 서비스가 없다. 영어로 안내하는 네비는 처음인데 잘 알아 들을 수 있을까. 다행이도 영어가 매우 간단하다. Three hundred meters turn left. Continue on route. Round-about take the third exit. 설정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안내도 자주 나오지 않는다. 지도는 더욱 간단하다. 선 몇 개 죽죽 그어져 있다. 그런 허접해 보이는 네비가 편안하게 안내를 잘 해준다. 유럽 특히 동유럽에서 가민 네비가 도로 안내를 제대로 못한다는 후기들이 많았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작은 골목이나 높은 건물이 많은 곳에서 나타나는 단순 오작동일뿐이고(이 오작동은 운전자의 운전상식에 따르는 센스가 있다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 왠만한 도로에서는 정확하다. 물론 공짜로 받은 네비라 애정이 남달리 크다보니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편견의 동물이니까.


자그레브 시내를 잘 빠져 나왔다. 차도와 트램길이 섞여있는 길은 매우 혼란스러웠으나 호텔에서 고속도로로 빠져 나오는 길에는 다행이도 트램길이 많지 않았다. 정지선을 철저하게 지키는 운전자들도 경계의 대상이다. 나의 실수가 위대한 한민족을 불량스런 민족으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파란불이 깜박거리면 바로 정지선에 섰다. 이런 시스템은 훌륭하다. 파란불이 깜박거리고, 주황불이 들어왔다가, 빨간불이 들어오니 왠만하면 신호위반을 하지 않을 수 있다. 정지선도 잘 지키게 된다. 어려운 점은 우리나라에서 드문 일방통행이 제법 많아서 표지판을 확인하느라 눈동자가 쉴 틈이 없다. 시내를 벗어나면 여유롭다. 길이 거의 하나다.


크로아티아의 고속도로는 시원하게 잘 뻗어 있다. 차량도 많지 않고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만 화물차들이 달리고 있어서 안전하기까지 하다. 120km 정도 달린 톨비가 50쿠나 9천원 정도니까 그리 싸지는 않다. 휴게소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사방이 눈으로 덮여 있다. 화장실에 들러서(사용료 2쿠나) 사진을 찍으며 잠시 쉬다가 보스니아 국경으로 향했다.








국경은 삼엄하지 않았다. 세 대의 차량이 있길래 내려서 사진 촬영을 했더니 거대한 몸집의 경찰이 와서는 비밀 지역이라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미안하다면서 촬영한 사진을 지워달란다. 그렇구나. 크로아티아(크로에쉬아로 들린다)를 벗어나 보스니아로 들어간다. 어디로 가느냐고 며칠이나 가냐고 묻는다. 차량에 포함된 그린카드(이게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이것을 챙겨야 한다기에 차를 빌릴 때 확인을 했고, 당연히 렌터카 회사에서 잘 챙겨 넣어 주었다)까지 다 점검한 후에 도장을 찍어 준다. 


그런데 바로 앞에 경찰이 한 명 더 서 있다. 다시 여권을 요구하고, 뒷좌석의 짐을 살피고, 트렁크에 실린 큰 가방을 살핀다. 그러더니 'money'를 요구한다. 뭐지. 별 생각없이 환전을 못했기 때문에 정말로 돈이 없어서 'no money' 하면서 지갑을 꺼내 보여 주었더니 그냥 가라고 한다. 그리미의 말로는 건너편 차선에서 크로아티아로 넘어가는 수백 대의 차량들이 우리들을 보며 재미있는 광경을 보는듯이 웃고 있었다고 한다. 몰랐다. 어쨌든 뜯길 뻔한 위기를 우연히 넘긴 모양이다. (2018년 여름에 동서가 크로아티아 렌트카 여행을 했는데, 국경에서 이런 상황은 없었다고 한다.)


국경을 넘어 서자 나타난 보스니아의 풍경은 일단 눈이 덜 치워져 있어서 도로가 복잡하고 지저분해 보였다. 노면 상태는 무난해서 운전하는데 부담이 없었다. 마을들이 산골 도로를 따라 끊임없이 발달되어 있어서 달리는 동안 심심하지 않았다. 뉴질랜드와 호주, 심지어 프랑스에서조차 시골길은 너무 황량하고 심심했으나 이곳 보스니아는, 눈덮인 산골에도 장화 신은 농부가 산책을 나와 있고, 작은 마을에도 젊은이들이 쌍쌍이 손을 잡고 데이트를 하러 읍내로 나가는 모습이 항상 목격된다. 간간이 포탄에 맞아 부서진 집들이 안타까운 모습이었지만 대부분의 길 위에서 마을에서 언제나 이국적인 모습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열심히 수다를 떨며 살아가고 있다.


지난 주에 엄청난 눈이 쏟아졌었는지 도로에는 치워진 눈의 높이가 30cm를 넘는다. 그래서 방문객이 적었었는지 외로운 개들이 사람의 손길을 기다린다.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면 포근한 외투 품으로 머리를 들이민다. 경쟁적으로. 몇 번이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차에 올라 길을 떠나려 하자 불편한 다리의 큰 개까지도 절룩이며 도로를 따라 달린다. 얼마나 사람을 좋아하면 처음보는 우리와의 이별도 저렇게 아쉬워할까. 모두들 따뜻하고 배부르게 사랑받으며 살았으면 좋겠다. 묶여져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행복하다.









점심을 반야 루카(Banja Luka)에서 먹기로 했다. 가난한 나라의 작은 도시로 생각했으나 착각이었다. 모두들 귀한 동양인이 왔다고 반갑게 쳐다 봐 주었다. 마침 주말이라 주차비도 무료라고 한다. 홀리데이 마켓이 열린 곳 인근에 차를 세우고, 바로 앞의 은행에서 200KM(1KM=750원 / 15만원 정도)를 찾았다. 바로 시장으로 들어갔더니 스시 케밥(작은 것 2.5KM)과 지로스(큰 것 5KM)를 굽는 냄새가 구수하다. 어제 크로아티아에서 먹었던 그 빵과 그 패티. 지로스(그리스 스타일 케밥)에는 야채가 많이 들어서 우리 입맛에 잘 맞았다. 스시 케밥은 진짜 숯불에 기름 충분히 두르고 잘 다져진 냉장 쇠고기 패티를 타지 않게 익혀서 역시 기름에 구운 빵 사이에 넣어 주는데, 따뜻하게 먹으면 고소하고 한끼 식사로 충분하다. 야채는 생양파 썬 것만 나와서 아쉽다. 맛이 좋은 보스니아 맥주 두 병을 나눠 마셨다. 우리는 식사를 끝내고 사라예보로 가야 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식사만 하고 가기는 아쉬워서 작은 시장을 둘러 보았다. 우리의 검은 머리가 눈에 띄는지 눈인사를 건네는 보스니아 사람들도 많았다. 수공예품도 많고, 꿀이나 잼을 담아서도 팔고 있다. 그중 눈에 띄는 것. 마카롱. 하나에 1KM. 천원이 안된다. 과자 가게에서 7KM 정도의 과자를 샀다. 적당한 단맛이 좋았다. 계속 먹어야 할 모양이다. 그나저나 그렇게 많이 촬영한 사진이 샌디스크의 메모리 불량으로 다 날아가 버리고 겨우 남은 것이 휴대폰에 남긴 마카롱 사진이라니.







계획한 사라예보까지는 도저히 갈 자신이 없어졌다. 주변에 눈이 잔뜩 쌓여있지만 기온이 5도에서 10도로 높아서(폴로가 외부 기온을 계속 알려준다) 눈이 계속 녹아내리고 있고, 그 눈과 함께 물길에 쓸려나온 작은 자갈들이 도로 위를 채우고 있어서 혹시나 미끄러지지 않을까 약간 불안했다. 차들이 많지 않아 위협적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산길이 구불구불하고 가파르기는 했지만 옛날 미시령길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아서 편안한 운전이었다. 이곳 운전자들은 익숙해서인지 시속 80km로 마음껏 달린다. 그래도 야간 운전은 아무래도 위험할 것이고, 숙소도 잘 구할 자신이 없다. 


더 가게 되면 그리미의 불안증이 심해져서 신경이 날카로워질 것이 분명하다. 저녁 해가 살아있는 오후 4시를 전후로 하여 트라브닉(Travnik)에서 자기로 했다. 모텔 아바(Ava)가 저렴하고 깨끗하다고 해서 산넘고 산넘어 물까지 건너 찾아갔지만 방이 없단다. 데이터가 안되니 부킹닷컴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담배가게 아가씨에게 보스니아 유심카드(4KM)를 사서 열어 보았지만 3G는 잡히지 않는다. 영어가 통하지 않으니 물어볼 수가 없다.


이곳이 그래도 번화한 곳이니 숙소를 구해야 한다. 숙소다운 숙소가 없어 보이지만 모든 숙소를 훑어 내려 가면서 방을 구해야 한다. 드디어 구했다. 무너진 소파와 낡은 쪽마루, 백만명은 덮었을 듯한 캐시미어 이불, 그나마 다림질 흔적이 남아있는 하얗다고 표현할 수 있는 시트, 조용하지만 강력한 전기 라디에이터. 짐머 오닉스 !!!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숙소 앞은 언덕 위로 빼곡하게 집들이 들어서 있고, 이곳에서는 드물게 영어가 잘 통하는 집이다. 레스토랑을 겸하고 있어서 식사도 룸서비스로 받을 수 있단다. 물론 우주신을 웨이터로 내려보내야 한다. 나중에 보니 사라예보 쪽으로 5km 내외만 더 갔어도 깨끗하고 저렴한 모텔들이 많았다. 가격은 정확히 확인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어둠이 내리자 그런 정보를 얻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담배 냄새가 찌든 방이지만 따뜻해서 짐을 풀었다.




방금 전 구입한 유심칩(4KM)을 사용하기 위해 들른 담배가게. 이곳의 담배가게 아가씨는 하늘에서 내려 온 천사들이 운영한다. 하늘색 눈동자와 긴 속눈썹을 아름답게 깜박이며 나를 바라보는데, 그녀가 천국의 말을 속삭인다.


그래서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유심은 샀으나 장착에는 실패했다.


작은 모스크가 있는 넓직한 길을 따라 좀 더 내려가니 이번에는 어렸을 때부터 천사였던 멋진 금발의 중년부인이 운영하는 담배가게. 매우 침착하다. 검은 머리 동양인 세 사람이 알아 듣지 못하는 영어와 한국말을 뒤섞어서 유심침을 사용하게 해 달라고 하는데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점검한다. 먼저, 유심칩은 제대로 끼웠니. 일일이 꺼내서 확인을 시켜줘야 했다. 그리고 다이얼링을 해 본다. 충전 금액이 0으로 나온다는 말을 하는 것같다. 나이 든 천사여서 조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충전이 필요하다고 한다. 10KM(쿠마)를 냈더니 충전을 해 주고 나서 다 되었다고 한다. 훌륭한 대응이다. 이로써 보스니아 여행을 위한 준비는 끝났다.


전기구이 통닭을 살 수 있기 기대했지만 그런 노점은 없다. 오닉스 레스토랑에서 스시케밥 두 개를 주문했다. 4KM. 쿠쿠로 재가열한 호랑이콩 찹쌀밥과 돌라츠 시장에서 산 싱싱한 상추까지 곁들였더니 맛이 그만이다. 자그레브에서 산 와인과 쥬스를 마시며 허름한 여인숙 호텔에서 만찬을 즐긴다. 물론 레스토랑에서 먹을 수 있었지만 스시케밥만 먹기에는 힘이 든다. 밥과 채소가 있어야 든든하다. 후식으로 귤까지 먹고 양치만 하고 그대로 쓰러져 잤다. 침대는 가운데가 가라앉아 매우 불편했지만 새벽 두 시까지 정신없이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