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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농사 이야기

가을 농사라면 평생이라도 짓겠다_140916, 화

조생종이라 벼수확이 빠르다. 조생종을 선택한 이유는 햇볕에 벼를 자연건조하기 위해서다. 10월 중순이 지나면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자주 내리고, 일조시간도 짧아져서 자연건조가 매우 힘들어 진다. 모를 빨리 심었더니 다른 해에 비해 한 달 이상 수확시기가 빨라졌다. 찰벼와 흑미는 예전보다 빨리 심었어도 아직 한 달은 더 있어야 수확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메벼를 말리고 도정까지 끝낸 다음에 추수하면 될 것이다. 아침을 급히 먹고 8시가 되어서 천천히 논으로 나갔다. 벼베기 준비를 위해서다. 햇살은 따가웠지만 산들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서 일하기에 참 좋다.

 

지난 6월 10일의 우박 피해로 논 가장자리의 벼들은 생육이 좋지 못하다. 평년의 벼 포기에 비해 절반 정도로 느껴진다. 튼실한 벼들도 있으니 절반 이상의 수확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3주 전에 끝낸 피사리 덕분에 키다리 벼가 간간이 눈에 띌 뿐 병충해의 흔적은 없다. 제대로 여물지 못한 벼포기도 있었지만 대체로 만족할 만하다. 1년 만에 낫으로 싹둑 싹둑 벼포기를 베어내고 있으려니 어느 덧 한 해가 다 지나간 듯 하다. 고마리의 하얀 꽃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여름이 지나 잎과 줄기는 왕성하지 못하고 가녀린 하얀 꽃들만 살랑살랑 고개를 흔드는데 일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 꽃놀이를 나온 것처럼 한가하다.

 

세귀퉁이의 콤바인 자리를 베어내고 절에 가서 물 한잔을 얻어 마셨다. 급히 나오느라 물을 제대로 먹지 않아서 목이 말랐다. 요즘은 찬물을 먹으면 배가 아파지는데, 얻어먹는 처지에 찬물 더운물 가릴 수가 없어 그냥 먹었더니 점심 식사 때 살살 배가 아프다.

 

흑미논에 피들이 제법 무성하다. 찰벼 논과 메벼 논은 지난 8월에 피사리를 해 주어 거의 피들이 보이지 않았는데, 흑미논만 무성하다. 벼 벨 준비를 마쳐놓고 흑미논으로 들어가서 올해 마지막이 될 피사리를 한다. 눈에는 논 전체에 가득했던 피들이 막상 들어가서 일을 해 보니 손을 댈 때마다 줄어들어 11시가 넘어가자 거의 눈에 띄지를 않는다. 가을 농사의 즐거움은 이처럼 일이 끝난다는 것이다. 봄과 여름의 농사일은 일이 끝나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해가 지고 일을 할 수 없어서 끝내는 것인데, 가을 농사는 일을 끝내고 허리를 펼 수가 있어서 날씨처럼 기분이 상쾌하다.

 

온몸에 묻은 진흙을 씻어내고, 사용한 낫도 씻어서 갈아 두었다. 오전 3시간 반의 노동은 이렇게 일의 뒷마무리까지 깔끔하게 할 수 있어서 좋다. 4시간을 넘어서면 일하고 나서 뒷마무리를 하기가 어렵다. 몸이 지쳐서 늘어져 버리니 한시라도 빨리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모든 것이 귀찮기 때문이다. 역시 농사는 가을에 지어야 한다. 대신할 누군가가 있어서 봄에서 여름 농사를 짓게 하고, 무일은 그저 가을농사만 짓는다면 평생을 지어도 즐거울 것이다.

 

정농을 쌍봉초등학교에 내려 드리고 음성으로 아이들을 만나러 간다. 뭘 하고 놀까.

 

저녁을 먹고 자전거를 타고 향악당으로 갔다. 지난 목요일에 고글 없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하루살이가 눈에 들어와 며칠 동안 고생했다. 오늘은 작은 잡티가 눈에 들어갔는지 장구 치는 내내 괴로워서 집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잡티가 빠지지 않았는데도 돌아오는 자전거 위에서는 잡티를 전혀 느끼지 못하다가 집에 도착해서야 다시 느껴졌다. 도로 위에서는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눈의 잡티 정도는 잊을 수 있었는데, 몸이 편안해지니 잡티가 가장 큰 문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사람이란 참 묘한 존재다. 야간 주행용 고글을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