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에 일어났다. 11시에 잤으니까 8시간 푹 잤다. 그런데도 눈은 잘 떠지지 않는다. 너무 고된 여행이었나 보다. 하루 정도는 숙소에서 푹 쉬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이동 이동 이동. 앞으로의 여행은 이러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그리미의 요청이 있었다. 마음은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호텔 방에 앉아 잠시라도 빈둥거리면 할 일 없는 인간이 되어 버리는 듯해서 그러지를 못한다. 어쨌든 이제 나이도 들고 했으니 좀 더 진중해 지려고 노력해 보자.
식사를 하러 가자. 어제 까르푸에서 토마토 3개를 샀다. 아침 뷔페에 야채가 없어서 우리가 준비해서 내려가기로 했다. 3일째 같은 아침이지만 오늘은 그래서 특별하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많이 먹지를 못하겠다. 달걀 후라이 3개, 크로아상 3개, 커피 한 잔, 차이 한 잔, 쥬스 반 잔, 물 반 잔, 토마토 한 개, 시리얼 한 컵 뿐이다. 이것도 다 먹지 못하고, 마지막 크로아상은 결국 샌드위치로 만들어서 가지고 나가야 했다. 역시 세월을 이길 장사는 없다. 아이들은 웃는다. 결코 적은 양을 먹는 것 같지 않다고 하면서.
오늘도 메트로는 파업이다. 화끈하게 하고 있다. 무려 20유로를 주고 산 교통카드를 쓸모 있게 쓰지는 못한 것 같아서 아쉽다. 신타그마 광장으로 가서 x95를 타고 공항으로 가야한다. 그리이스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눈이 왜 이렇게 곱지 않을까? 부드러운 느낌이 없다. 동양인들이 그리스에 뭐 잘못한 일이 있나? 터키였으면 인기 좋았을텐데 말이다.
첫 날 만난 버스 안의 젊은 짚시 엄마는 아기를 안고 있었는데, 눈길이 마주치자 손을 내밀며 돈을 달라고 한다. 돈은 안 주고 사탕을 두 개 꺼내서 주었더니 짜증난 표정으로 받아 들었다가 하나를 까서 자기 입에 넣는다.
'아기 주라고 준 것인데,,,'
한참을 사탕을 맛있게 빨아 먹더니 내리면서 또 손을 벌린다. 사탕 두 개를 더 주었더니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아기를 안고 휘익 내려 버린다. 오늘도 짚시 엄마를 또 만났는데, 사탕을 가져오지 않아서 그냥 무시했다.
x95는 전용 정류장이 따로 있다. 자리에 앉았더니 표를 보자고 한다. 여행자용 3일권 표를 보여 주었더니 확인을 해 보아겠다고 하면서 가지고 간다. 메트로 파업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인지, 기사가 몰랐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추가로 교통비를 지불하는 일 없이 공항으로 이동한다.
90분이 걸린다는 공항을 50분만에 도착했다. 대낮이라서 차가 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바람이 많이 부는지 비행기가 뜨고 내릴 때 엄청나게 흔들린다. 두려움에 손에 땀이 나는데다가 그리미도 무서워서 있는 힘껏 내 손을 쥐어짜고 있으니 아프기까지 하다. 안전하고 빠르며 편리한 교통수단인 줄 알면서도 항상 두렵다.
호텔에서 픽업을 나와 있었다. 21살의 젊은 청년이 씩씩하게 길 안내를 한다. 남들이 차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우리는 걸어다닐 작정을 했는데, 제법 차로 많이 올라간다. 피라마을의 중심을 지나서 칼데라가 내려다 보이는 피로스테파니(Firostefani) 언덕에 작은 아파트형 호텔이다.
지금까지 묵은 숙소 중에서 가장 비싸지만 시설 수준은 칼레이치 호텔 보다도 약간 떨어지는 느낌. 어쨌든 섬의 숙소니 우리가 이해해야 어쩌겠는가? 주방시설이 갖춰져 있고, 쓰는 사람이 적으니 와이파이도 빵빵하게 돌아간다. 경치 좋은 테라스는 그러나 바람이 너무 불어서 춥다. 그래도 어제는 비가 왔다는데 우리가 온 오늘은 해가 쨍쨍하여 실내에 있으면 덥다. 바람만 들이치지 않으면 창문을 온통 열어 놓아도 전혀 춥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차를 빌려야겠다. 지리도 익힐 겸 점심 준비를 위해 길을 나섰는데, 높은 언덕을 오르기 위해 길은 지그재그로 나 있었다. 직선거리로 내려가려니 길도 없는 초원을 마구 걸어야 한다. 혹시 뱀이라도 밟을까 걱정스러웠다. 동네 고기집에서 닭고기를 사고, 피라마을의 중심부에 있는 까르푸로 내려갔더니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오랜 여행으로 발바닥은 조금만 걸어도 금방 피로를 느낀다. 이런 상태로 이 섬을 다 걸어 다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 점심 해 먹고 24시간 빌리자. 생선살 튀김과 새우, 홍합살, 생선 찌개를 곁들여 그득하게 점심 식사를 끝냈다. 일어서지 않는 발걸음이지만 차를 빌리러 나가야 했다. 이제 곧 해가 지는데 장관을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름 없는 작은 렌트카 회사로 들어갔다. 현대 아토스 수동이 하루에 20유로다. 국제면허증을 만들지 않았으니국산 운전면허증을 제시하였다. 오케이. 기름값은 대략 15유로가 들 것이라고 한다. 왔다갔다 하는 버스값 보다도 적다. 좋다. 운전만 조심해서 하자. 길도 꼬불꼬불하니 어차피 속도도 내지 못할 것이고 앞뒤만 잘 살피면서 천천히 하자. 20일 만에 수동으로 된 작은 차를 잡으니 바짝 긴장이 된다. 하루 밖에 쓰질 않으니 좋은 차를 빌려도 될테지만 만약의 경우, 사고가 난다면 좋은 차일수록 부담이 될 것같아 제일 작은 차를 빌리기로 했다. 목숨걸고 타는 거지, 뭐.
언덕이 많은 데다가 성인 4명이 꽉 차 있으니 아토스는 힘겨운 모양이다. 시동을 몇 번 꺼뜨려가면서 20여분만에 이아 마을에 도착했다. 선셋 포인트가 어디냐고 지나가는 한국인 여행자에게 물었더니 바로 아래에 주차장이 있고, 차를 세우고 풍차 쪽으로 가면 근사한 전경이 펼쳐진다고 한다. 너무 가까이에 있는 샛길 같은 옆길은 눈에 걸렸지만 무시하고 바닷가 쪽으로 좀 더 내려갔다. 이 차 괜찮겠지? 브레이크 안 걸리면 그대로 바다로 빠져 버릴 것같은 분위기의 가파른 길이다.
너무 많이 내려갔다. 항구까지 내려갔는데도 차량만 몇 대 서 있을 뿐 관광객은 거의 없다. 인도 사람 대여섯 명도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듯한 분위기다.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작은 선착장까지 다가갔다. 아주 큰 파도는 아니지만 보도 쪽으로 파도가 가볍게 들이친다. 그러다가 제법 큰 파도가 일어나기도 한다. 잘못 건너다 큰 파도를 만나면 휩쓸려 떠내려 갈 수도 있겠다.
해가 지려고 하자 제법 거친 파도가 몰려왔고, 저 언덕 꼭대기까지 갔다오면 우리가 지나온 길은 파도가 다 삼켜버릴 것같다. 게다가 자물쇠 걸린 호텔과 레스토랑의 작은 문들이 더 무서운 마음을 일으킨다. '이곳은 출입금지 구역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겁쟁이.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끝까지 올라가 보자.
그리미는 중간에서 발길을 돌린다. 우주신이 따른다.
"먼저 가 있어, 우리는 저 위에까지만 갔다가 올께. "
성벽 비슷한 곳에서 사냥개 두 마리가 고개를 내밀고 우리를 향해 짖고 있다.
그리미가 발길을 돌린 가장 큰 이유다.
결과적으로는 괜히 꼭대기까지 뛰어올라갔다 왔다고 할 수 있다.
무려 300계단이 다 되는데.
아, 정말, 헛고생을 했다.
무서운 가운데서도 부지런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혹시라도 멋진 일몰을 놓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한여름이면 걷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이 계단에 달랑 천재와 무일 둘 뿐이다. 땀을 뻘뻘흘리며 올라가서 근사한 풍경을 구경하고 다시 내려와서 파도치는 선착장을 빠삐용의 계산 방식을 응용해서 간신히 집어 삼킬듯한 파도를 피해 차로 돌아올 수 있었다.
흥분을 가라 앉히고, 성채의 장면을 보지 못한 그리미와 우주신을 위해 돌아오는 길에 ‘눈에 걸렸던 옆길’로 차를 몰았다. 세상에 풍차와 성으로 가는 능선길이 바로 나온다. 너무 억울하다.
좋다. 두려움을 이기고 즐거운 모험을 했으니까.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웹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산토리니 여행기를 보았다.
우리가 고생하며 외롭게 올라가던 저 계단은
올드포드에서 성채로 오르는 588계단이라고 한다.
관광 성수기에는 수십 마리의 당나귀가 항구에서 성채까지
관광객을 태우고 올라가느라 발을 떼기 조차 힘들고
당나귀 똥냄새가 엄청나게 난다는 곳이다.
여행을 막 하기는 하지만,
사진 몇 장 들고 찾아간 곳이 바로 산토리니다.
그래도 충분히 즐겁기는 했다.
사냥개들도 해가 져서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무사히 성채에 도착해 감격에 겨워 우리는 서로를 포옹하고 키스했다.
드디어 산토리니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
저녁은 닭볶음에 포도주 만찬. 참 걸다. 현지 재료를 이용한 한국식 식사. 이것이 현지화가 아닐까?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넉 잔이 되어 반병만 먹기로 한 포도주를 다 마셔 버렸다. 눈꺼풀이 다 내려 앉을 때까지 양하영의 가슴앓이와 조덕배의 꿈에를 들으며 웹서핑을 하다가 잤다.
산토리니,
거친 바다 한 가운데,
언제 몰아칠지 모르는 폭풍우와 싸우며
까마득한 낭떠러지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한다.
한 겨울에
아름다운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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