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떠오르고 있는지 바깥이 점점 밝아온다. 좀 더 편안하게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좁은 버스 안을 벗어날 수가 없다. 중간 중간에 마중 나온 가족들을 만나는 광경이 참 정겨워서 사람사는 동네인 것같아 부럽다. 정말 가족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이 한 밤 중에 집안의 남녀노소 모두가 마중을 나온다.
네브세히르인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꽤 큰 정류장에서는 젊은 청년 한 사람을 둘러싸고 십 여 명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포옹하고 키스하며 헤어짐을 아쉬워한다. 아무리 따뜻하다지만 영하의 날씨인데도 조금도 흐트러짐 없다. 가족 한 명과의 헤어짐이 진심으로 아쉬운지 긴 이별의 포옹 뒤에도 버스가 떠날 때까지 오랜 동안 서서 가족들 모두가 손을 흔들고 서 있다. 무일이라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려버릴 것같다. 나중에 손님이 온다면 하다 못해 버스정류장이나 전철역이라도 마중과 배웅을 나가야겠다.
처가집에서 떠나올 때마다 상수네 가족이 아파트 입구에서 내내 손을 흔들어 주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 우리도 사랑받는 정겨운 가족이었구나.
안탈리야 오토갈은 크고 번잡하다. 오토갈에 도착하기 전에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차장이 우리에게 오더니 가족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최고라고 한다. 그러고나서도 계속해서 미소를 지으며 무엇인가를 말하는데 알아듣지 못하는 무일은 그저 웃으며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문득 무슨 지명을 말하는 것같아서 안탈리야를 간다고 했더니 몇 가지 단어를 반복한다. 그 알아 들을 수 없었던 단어들 속에서 큰 그물에 멸치가 걸리듯 한 단어가 잡혀 들어왔다. 칼레이치. 그래 바로 그거군,
다음 목적지. 얼른 칼레이치를 두어 번 반복했다. 그러면서 트램이나 버스를 타고 간다고 했다. 그랬더니 또 다른 무슨 말인가를 한다. 이번에는 제법 잘 만들어진 그물이다. 세르비스라는 말이 들어왔다. 아하, 오토갈에서 칼레이치까지 세르비스가 있다는 말이군. 정말 고마웠다. 이 순박하고 말 안통하는 청년은 밤새도록 물과 음료수를 날라주고, 처음이라 제대로 작동 못하는 개인 모니터에서 터키 전통음악을 틀어주었다. 손님들의 짐을 빼주느라 정신이 없어서 마지막 작별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세르비스는 건너편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일단 아이들은 밤새 화장실에 가지 않았어도 멀쩡한데 나이 든 우리는 다시 화장실에 가야 했다. 뭐가 정상인지는 약간 의문이 들었다. 메트로 표시가 붙은 25인승 버스에는 벌써 짐이 잔뜩 실려 있었고, 우리 가족 네 명이 자리를 채우자 빈자리가 없었다. 출발할 줄 알았더니 잠시 후 다시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온다. 세상에 그곳에 로즈밸리에서 헤어진 카를로스가 서 있었다.
마침 앞자리에 홀로 앉아있던 천재가 카를로스와 반갑게 재회한다. 그리고 세르비스가 시내를 돌아 칼레이치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토요일의 이른 아침이었는데, 마침 부지런히 문을 연 카페가 하나 있었다. 그곳에 가방들과 그리미, 우주신을 남겨 두고, 세명은 호텔을 찾으러 나섰다.
어제 밤 카페에서 그리미와 의논하여 네 군데의 예비 호텔군을 작성해 두었다. 막상 주소를 적어서 나오기는 했지만 과연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한가로이 신문을 보며 커피를 마시는 분에게 주소를 보여주며 물었지만 칼레이치 구역만을 가르쳐 줄 뿐이었다. 워낙 많은 호텔들이 영업을 하고 있으니 아무리 현지인이라도 잘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조금씩 방향을 잡고 주소를 이해해 가는 것이 진전이라면 진전이다. 한 두 번의 길 찾기 인터뷰가 더 진행되고 나서 벽에 붙어있는 호텔 간판 위에 첫 번째 후보군의 호텔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선정했던 후보군 2개와 또 다른 호텔 한 개를 비교해서 제일 깨끗하고 제일 저렴하며, 제일 의사소통이 잘 되었던 칼레이치 호텔에 방 두 개를 50유로에 잡았다. 큰 숙제를 아주 잘 마친 기분이다.
카페에서 쉬고 있는 그리미에게 돌아가서 까를로스와 다시 만난 기쁨의 축하 차이를 나눠 마셨다. 그리고 찻값을 내 주려고 50리라를 냈다. 분명히 22리라인데 30리라를 거슬러 준다. 거스름돈이 없어서 나머지는 자신의 선물이라고 한다. 뭐라구요? 주인이 손님에게 선물을. 게다가 준비도 채 마치지 않은 가게 문을 열어 주면서 짐을 보관하게 하고 따뜻한 곳에서 쉴 수 있게 해 주었으면서도. 허 참. 선물을 주려다가 선물을 받고 나왔다. 참 고마운 일이다. 한 번 더 와야겠다.
1시 전에는 체크인을 할 수 없다고 해서 가방을 맡기고 시내 구경을 나왔다. 햇볕은 따뜻하고 시내는 아름다웠다. 지난 3일 동안 아름다운 돌무더기가 가득한 자연 속에서 살았었다면 이제부터는 2천년 전의 그리스 유적과 지중해와 오렌지 나무와 레몬 트리, 온갖 사람들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도 따뜻해서 좋다고 한다.
호텔에서 소개시켜 준 아주 저렴하고 맛있는 음식점(제이넵 키친? 간판은 맞는데 읽지를 못하겠다. 벌써 난독증인가)을 찾아갔다. 정식 요리는 12시부터이고 지금은 스프와 빵만 가능하다고 한다. 무슨 스프냐고 물었더니 하나는 치킨 스프고 또 하나는 도저히 알아 듣지를 못하겠다. 그러자 작은 그릇에 직접 퍼서 가져오더니 맛을 보란다. 둘 다 아주 뜨겁고, 맛이 있었다. 야간 버스에서 시달린 몸에 조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아이들도 맛있게 먹는다. 빵도 역시 맛이 있었다. 꽤 많은 양의 스프를 먹고 나자 이번에는 차이가 한 잔씩 나온다. 스프에 포함된 음료란다. 다 먹고 나서 기분 좋게 일어났더니 일인당 4리라. 참 착한 가격에 훌륭한 맛이다. 저녁에 이곳에서 식사를 하면서 맥주를 마실 수 있냐고 했더니 가능하다고 한다. 좋다.
시내 구경은 피곤했다. 야간 버스에 시달린 몸은 제발 눕혀 달라고 아우성인데, 구경을 다닐 수밖에 없는 여행자의 신세라 그랬을 것이다. 시내는 사실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새롭고 신선한 모습은 아니었고 아주 예쁜 모습도 아니었다. 현대와 과거가 잘 섞여있는 올드타운이다. 그럭저럭 발길을 옮기다가 지중해와 만났다.
아, 이것은 참 새로운 감동이었다. 바다가 좋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르름 때문에 두렵기는 하지만 역시 바다는 아름답다. 그런데 이곳 안탈리야의 지중해는 폭포를 가진 절벽과 푸른 산과 게다가 새하얀 눈을 이고 앉은 산봉우리까지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인포메이션 데스크에서 가져 온 안내 지도에는 스키와 바다 수영을 모두 즐길 수 있는 곳이 안탈리야라더니 헛말이 아니었다.
기다리던 시간이 점점 다가오기에 비틀비틀 장을 봐서 숙소로 돌아왔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면서 해물 누룽지탕을 끓였다. 씻으러 간 우주신이 돌아오지 않아서 맛있는 누룽지탕이 누룽지 된죽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카파도키아의 넓은 방에 있다가 좁은 더블룸에서 어떻게 식사를 할 것인지 고민을 하니 갑자기 짜증이 밀려 온다. 아, 이놈의 짜증은 왜 자꾸 올라오는 것일까. 좋았던 여행 분위기를 망쳐 버렸다. 다행이 그리미와 아이들의 도움으로 짜증나는 상황을 잘 정리하고, 누룽지 해물 된죽은 끝까지 잘 먹었다. 짜증 처리 과정에서 제기된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하러 나섰다.
먼저 페르게와 아스펜도스 투어를 알아보러 갔다. 두 도시 말고도 시데와 폭포까지 가는 투어를 인당 55유로인데 45유로로 할인해 주겠다고 한다. 총 180유로. 생각 보다 저렴해서 먼저 계산을 하려다가 마지막 순간에 참았다. 천재가 다른 곳도 한 번 알아보자는 것이다. 좋다. 또 다른 여행사에서는 52유로를 제시한다. 역시 그 아주머니 사장이 저렴했군. 택시 투어도 물어 보았다. 4가족 150유로로 가능하다고 한다. 단, 점심과 입장료는 우리가 따로 계산해야 한다. 역시 첫 집이 최고야. 그래 그쪽으로 정하자.
두 번째 과제는 현재의 숙소가 가진 문제점을 다른 숙소로 바꿔서 해결하는 문제. 일단 뜨거운 물이 나오기는 하는데 시원하게 나오지 않고 함께 식사할 장소도 비좁다는 문제다. 오전에 시내를 돌면서 무일이 보아둔 집이 있어서 찾아갔더니 문을 닫았다고 한다.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그럴싸한 집이었다. 다른 한 집을 보았는데, 좀 낡고 냄새가 났다. 거의 포기하는 심정으로 지나는데, 인터넷에서 검색하며 보았던 익숙한 이름의 펜션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가 볼까?
사바흐 펜션에서는 두 가지 옵션을 주었다. 최상의 아파트와 최악의 4인실. 아파트를 선택했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다. 어렵다고 했다. 얼마면 되겠냐는 되물었다. 하루밤에 60유로를 불렀다. 안된다고 한다. 한참을 고민하더니 식사 빼고 60유로로 하거나 식사 포함 65유로로 가자고 한다. 즉석 가족회의에서 그리미는 주방이 있으니 아침밥도 해결할 수 있으므로 60유로로 가자고 한다. 그래도 여행을 와서 호텔에 묵는데 아침은 편하게 먹자고 무일이 주장했다. 가위바위보로 결정하기로 했다. 무일이 이겨서 아침 포함 65유로로 내일부터 2박을 하는 것으로 정했다.
그리고, 언제 오겠냐고 해서 투어를 마치고 오겠다고 했더니 사장이 묻는다. 예약을 하지 않았으면 자신이 소개하겠다고. 한 번 가격이나 제시해 보라고 했더니 150유로를 부른다. 헉, 아줌마 보다 30유로가 저렴하다. 기쁨을 바로 드러내면서 즉시 결제를 했다. 허 참, 이런 일이. 투어와 식사의 질은 다르겠지만 그 정도는 우리의 지성으로 보완할 수 있다.
아침에 차를 마시며 카를로스와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조금 힘겹기는 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사귄 친구이고, 우주신이 전공하고 싶어하는 항공우주공학을 전공한 젊은이다. 바로 옆이 그의 숙소다. 7유로에 아침을 제공하는 도미토리. 혼자 다니면 참 돈도 안든다. 좀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아침에 스프를 사먹은 집으로 갈 것인지 이 근사한 식당의 야외에서 먹을 것인지를 물었더니 시내로 가서 저렴한 것을 먹어도 좋다고 한다. 무일도 당근 좋지. 사장님 부자가 반갑게 맞이한다. 또 왔다고. 정말로 왔다고.
좁은 실내지만 널찍하게 자리를 마련해 주고 앉으라고 하더니 주문도 받지 않는다. 빵과 스프가 바로 날라져서 차려진다. 주문 안 받느냐고 했더니 이곳은 메뉴가 없다고 한다. 허 참. 그래도 이 곳의 음식 솜씨와 가격을 믿으니 우리는 그냥 즐기자고 했다. 이런 경우, 한국에서는 ‘아무거나’ 주세요에 해당한다고 하니 다들 재미있어 한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음료수. 천재를 비롯한 성인들은 에페스 맥주를, 우주신은 사이더를 주문했다. 참 훌륭한 식사였다.
오고가는 대화는 유익했다. 통역을 맡은 천재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지만 나중에 물었더니 아주 재미있었다고 한다. 유체동역학과 소음진동, 국제인터넷 강의, 영어공부, 한국과 스페인의 음식 등등 즐거운 대화가 맛있는 음식과 잘 어우러졌다. 대화에 열중하다 보니 음식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내일의 여행을 위해 그만 일어서기로 했다. 7시다. 아버지 사장님이 기념사진을 찍어 주셨다. 가격을 물어 보니 불과 65리라(4만원). 일인당 만원도 안되는 가격으로 빵, 스프, 샐러드, 닭튀김과 밥까지 훌륭한 코스 요리를 먹을 수 있었다.
참으로 긴 하루였으나 지중해의 따뜻한 햇살과 포근한 기온이 우리 가족을 반겨주어 즐거웠던 하루였다. 내일은 좀 많이 돌아다녀야 한다. 세계사의 현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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