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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사는 이야기

친구는 정치관도 같아야 할까?_121110, 토

업무방해로 고발당한 친구가 무죄선고를 받았다.

해직기자가 되어버린 친구는 언제나처럼 밝은 모습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그 녀석은 무죄평결을 받기 위해 무료변론으로 애써 준

후배 변호사와 막걸리를 마시다가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정말 축하한다.  그리고, 정말로 마음 아프다.

친구의 지난 세월은 어떤 것으로도 보상받기 어려울 것이다.

단지, 그의 미래는 밝으니 앞을 보며 행복하기를 빈다.


친구의 미래가 밝다고는 했지만,

친구의 실제 미래는 이번 대선의 결과와 크게 연동되어 있다.

여당의 승리로 돌아간다면,

그가 재판에서 이겼다고 하더라도 그의 앞날은 더욱 참담해질 뿐일 것이다.

그래서 무일은 이번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져야 하고

친구는 복직도 되고 부당한 해직 시절에 대한 사과와 보상도 받아야 한다고 본다.


소식을 접한 동기들의 축하가 줄을 잇는다.

진심이 담겨 있는 그들의 축하 인사는 감동을 준다.


그런데, 친구의 무죄선고를 축하하는 친구들만이라도

다시는 친구와 같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이번 대선에서 한 목소리를 내자고 제안하지를 못했다.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여당 후보를 배격하자고 선동하는 것이 되고,

정치적 입장이 다른 동기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입장이 달라도 친구는 친구다.

아주 친한 친구가 아니더라도 친구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실천도 함께 하지 못하면서

친구의 무죄판결을 축하할 자격이 있을까?





정치관은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무고한 친구를 범죄자로 몰아 해직시켜 버리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사람들의 정치관도 인정해 줘야 하는 것일까?


비록 도둑질, 사기, 강간을 저지른 범죄자지만

경제 발전을 이룩하는데 적절한 능력을 갖춘 정치가가 있다고 하자.

특히, 이 정치가는 북한의 빨갱이로부터 우리나라를 수호할 의지가 강한 사람이다.

이 정치가와 정치관을 같이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고 하자.


과연 그 친구를 상식을 갖춘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무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많은 친구들이 참 잘 어울려서 지낸다.

무일도 그렇게 살고 싶은데,

다름이나 차이를 인정하고 싶은데,

범죄조차 인정해야 하는 정치관을 포용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면 정말 암담해진다.

그들의 정치관에는 무일이 모르는 다른 어떤 원칙이 있는 것일까?


아, 정말 답답하도다.

가장 각별한 친구들조차 설득 못하는 무능력한 소인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