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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 과학철학의 형성_자연과학과 철학 The rise of scientific philosophy_한스 라이헨바하_중원문화_김희빈역_초판 3쇄_2012 ] 맨처음 사건은 원인을 가질수 없다_240603 el lunes, tres de junio_Понедельник, три Июнь

이런저런 판본을 누비다가 결국, 중원문화에서 12년에 번역한 것을 읽기로 정했다.

 

임마누엘 칸트(1724~1804)의 임마누엘은, '신이 그와 함께 있다'라는 히브리어라고 한다. 히브리어까지 배울 생각은 없다. 칸트는, 대륙 합리주의와 영국 경험주의를 통합한 생학을, 뉴턴역학에 기반해서 정리했다. 이렇게 정리했지만, 칸트의 작업과 작업의 결과가 무엇인지, 그가 무슨말을 했는지, 모른다. 이제부터, 라이헨바흐를 통해서 알아가 보자.

 

* 생학 philosophy 哲學 : 생각하는 학문, 생각을 생각하는 학문, 지혜를 생각하는 학문, 세계를 정리하는 학문.

 

머리말

 

정말 놀라운 자신감이다. 이런 자신감을 가지고 있고 싶은데, 그러하지 못하다. 다른 사람이 이런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데 대해서, 놀랍고도 부럽다. 얼른 따라가서 내것으로 만들어 가슴벅찬 기쁨을 누려보자. 아주 쉽게 정리했으니,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해할수 있을 것이라고, 한스 라이헨바흐는 말했다.

 

“생학자philosopher란, 사실에 관한 지식이건 논리관계에 관한 지식이건 지식을 확립하는 방법을 사용할수 없으며, 따라서 검증해 볼수 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라고 믿고있다. 요컨대 생학은 학문이 아니라고 믿고 있는게 현실이다. 나는 이책에서 이와는 반대되는 주장 즉 생학이 학문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려고 한다.

 

(중략) 제1부에서는 전통생학의 여러가지 결점을 검토하면서, 사변철학이 자라나온 심리의 뿌리를 파헤치겠다. (중략) 제2부에서는 20세기에 전개된 학문으로서의 생학을 펼쳐보이겠다. (중략) 생학자는 답을 제시하려는 욕망에서 너무 자주 진리를 희생시켰고, 그림처럼 말하려는 유혹에 사로잡혀 명료성을 희생시켰다. 그래서 세마학자scientist가 오류라는 암초를 피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정확성이 생학자의 언어에는 결여되어있었다.

 

(중략) 나는 이책에서 생학이 가진 오류의 뿌리를 파헤치고, 생학이 오류의 도가니에서 빠져나와 진리의 세계에 올라와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려 한다.”(6~8쪽)

 

제1부 사변생학의 뿌리

 

제1장 문제

 

"문장마다 의미를 지니도록 언어를 사용하는데 익숙해있는 세마학자 scientist” (16쪽)

좋다. 

내가 쓰려고 하는 글 
= 의미전달이 분명한 글
= 문장마다 지식과 정보가 있는 글

김상욱이 이런 취지의 강연을 했다. 
: 수학의 증명과정은 = 로 연결된다. 
  즉, 끊임없는 동어반복을 한다. 
  곧, 변하지 않는 것들을 포착하여 = 로 연결해서 말한다.

  그러다보면 새로운 지식에 도달하게 된다.

 

라이헨바흐는 생학자들의 알아듣기 불가능한 발언들을, 이상하고 불합리하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참으로 시원하다.

몰라도 모른다고 말하지 못하는 생학도들에 비하면 좋은 상황이지만,

알려고 노력하는데도 알수없는,

막막하고 억울하게 무지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생학을 취미로 하는 시민으로서 정말 힘든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고 라이헨바흐는 계속 주장한다.

게다가 생학자들이 이런 말도 안되는 발언과 주장을 해대는 것에는 이유가 있단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이성은, 모든 사물의 존재가 그로부터 비롯되는 실체다 (헤겔 / 중략) 대개의 독자는 이런식의 문장에서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할것이므로 책을 불속에 던져버리고 싶을 것이다. (중략) 생학도는 대개 불명료한 주장을 보고도 분개하지 않는다. (중략) 이성은 사람의 행동, 좀더 온건하게 말하면 사람행동의 여러측면에 드러나는 추상능력이다. (중략 / 왜 생학자는) 그처럼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말해야 했던 것일까?" (15~17쪽)

 

 

제2장 일반성 추구와 사이비 설명

 

일반화를 통해 얻은 세마지식과 비유(시와 그림)에 의한 설명은 다르다.

비유는, 이해를 돕기 위한 방법이지,

진리에 대한 서술이 아니다.

 

진리의 서술이 어려울때, 비유를 통해서 이해를 돕는다.

지구의 자전축 기울기가 어떻게 북반구의 사계절을 만드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일반화이면서 세마이다.

아침에 다시 해가 뜨는 것은, 사람이 매일매일 하루의 일과를 시작해야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해의 운동을 삶에 비유한 것일뿐이고, 해의 운동에 대하여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햇님에게는 아침과 저녁이 없고, 오직 베타붕괴와 중력이 있을뿐이다.

 

일반성이 높은 설명을 하려면, 더많은 상상이 아니라, 더많은 관찰자료와 더많은 비판이 필요하다.

근거없는 상상으로 무리하게 일반성을 획득하려고 하면, 사이비설명이 되고, 심하게는 사변생학이 된다.

 

도구를 사용하면서부터 알려는 욕구가 생겨났다. (중략) 지식의 본질은 일반화 generalization이다. (중략) 일반화와 관련있는 요소와 관련없는 요소를 가르는 일에서부터 지식이 시작된다.

 

(중략 / 기하학, 천문학, 지렛대의) 법칙들은 모두 일반명제다. 이런 법칙들은 특정한 종류의 사물모두에 대해서 주장하는 조건진술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중략) 일반화는 바로 설명의 본질이며 속성이다. 어떤 관찰사실을 설명하는 일은, 그 사실을 어떤 일반법칙에 통합하는 것이다.

 

(중략 / 끌어당김은, 중력을 표현하는 단어이면서, 사람에게 끌린다는 마음을 묘사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끌어당김은, 중력에서는 운동을, 마음에서는 느낌을 표현하는 말이므로,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자연의 사건을 사람의 사건과 비슷하다고 보는 비유가 어떤 설명도 제공할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중략) 때로 설명은 관찰하지 않은 사실이나 관찰할수 없는 사실을 가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중략) 해양화석이 산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그 지역이 한때 바다밑에 있었다고 가정함으로써 설명된다. (중략) 일반법칙은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는 추리를 하는데 사용될수 있으며, 설명은 직접경험의 세계에다 추리한 대상들이나 추리한 사건들을 보충하는데 필요한 도구가 된다.

 

(중략) 이전보다 더큰 일반성을 지닌 지식을 추구하고 싶어했다. (중략) 수많은 관찰사실만으로는 알려는 욕구를 충족시킬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지식추구는 관찰을 넘어서 일반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한 답을 발견하는데 필요한 방법을 알지 못하는 때조차 어떻게든 답을 제시하려드는 것은 실은 불행한 일이다. (중략) 일반성이 높은 지식을 열망하면 할수록 관찰자료의 양은 더욱더 많아져야 하고, 사고는 더욱더 비판적이 되어야 한다.

 

(중략) 시대의 지식이 불충분해서 학문의 설명이 이루어지지 못할때는, 이 학문의 설명을 대신해서, 상상이 일종의 설명을 제공한다. 그런데 상상이 제공하는 이런 설명은, 일반성을 얻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구를 천박한 비유를 가지고 만족시켰다. 진실을 외면하는 비유, 특히 무엇이건 사람의 경험과 유사하다고 보려는 비유를, 일반화와 혼동해서 설명이라고 받아들였다. 일반성을 추구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사이비설명(pseudoexplanation)으로 가라앉혔던 것이다. 이런 토양에서 생학이 싹텄다.”(18~21쪽)

 

비유는 사실의 기술이 아니라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는 것이다. 이성이 실체인가 아닌가? 이성은, 뇌의 전기작용이다. 뇌라는 실체가 없으면, 이성은 사라져버린다. 이성이 몸을 움직이고, 논리를 만들어내고, 손과 도구를 이용하게 하더라도 여전히 뇌의 정신작용이지 실체는 아니다. 이성이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일수 있는가?

 

“막연한 언어가 문제거리가 되는 것은, 그것이 그릇된 생각을 갖게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는, 이성을 실체에 비유하는 것이다." (26쪽)

 

정말 강렬하다. 무리한 추정을 통찰이라며 얼버무리는 것이 생학발전의 걸림돌이란다.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 하고, 통찰은 검증되지 않은 주장이라고 해야하는데, 그렇게 분리하기에는 생학자들이 말을 너무 많이 한 것이 아닐까? 과연 한스는 제대로 읽어냈을까? 아직까지는 자신감이 넘친다.

 

"생학의 통찰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너무나 자주 저자도 결코 생각하지 못한 (중략) 말장난이다. (중략 / 말장난에 불과한 것을)  변호하기 위한 해석은, 생학자의 오류를 극복하는 방법이 못된다. 위대한 사람의 오류에 왜곡된 의미를 부여(하는 / 중략) 그런 해석은 생학의 발전을 촉진하지 못한다. 생학사를 연구주제로 삼았던 생학자들이 생학의 발전을 그처럼 빈번히 지연시키지 않았더라면, 생학은 훨씬 더빨리 발전했을것이다." (29쪽)

 

엄밀한 경험을 축적하여 내린 결론과

합의된 공리를 바탕으로 내린 결론중에서

어떤 것이 더 위험할까?

 

당연히 경험으로 내린 결론이다.

예외가 발견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리에 근거한 기하학의 결론들은 위험하지 않다.

공리라는 튼튼한 기반위에서 진술되기 때문이다.

 

“(가열된 모든 금속은 팽창한다) '금속'이라든가 '가열된'이라든가 하는 말의 의미는, '팽창하는 것'이라는 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진술의 상관관계는 관찰을 통해서만 실증될수 있다. 우리는 모든 과거의 경험에서 가열된 금속은 팽창함을 발견해왔다. (중략 / 기하학자는) 각들을 재지는 않는다. 그는 '공리'라는 어떤 일반진리에 호소한다. (중략) 공리는 도형으로 설명된다. (중략) 그러므로 이 기하학의 진리는 이성의 산물이다. 이점 때문에 무수히 많은 실례를 일반화하여 발견하는 경험진리보다 기하학의 진리가 더 훌륭한 것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32~3쪽)

 

우리가 이데아를 알수 있다는 것은, 관찰을 통해 대상의 속성을 제대로 안다는 뜻이다. 아무리 실제와 이데아를 구분해서 말한다고 해도, 이데아는 실제에 대한 관찰이다. 관찰을 엄밀하게 해서 필연의 속성을 찾아내면, 그것이 곧 이데아이고, 경험으로 축적한 사실과 이성이 찾아낸 무오류의 진리를 구분하는 것은, 사실 무의미해진다. 같은 결론을 내릴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상의 사물이 지닌 속성을 통찰함으로써 실제의 사물에 관한 지식을 얻는다. 이데아에 대한 통찰은 실제 대상에 대한 관찰과 마찬가지로 지식을 얻는 한 방법이다. 그러나 이데아에 대한 통찰은, 실제 대상이 지닌 필연 속성을 파악한다는 점에서 관찰보다 더우수하다. 감각에 의한 관찰로는 무오류의 진리를 파악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성의 통찰은, 무오류의 진리를 알아낼 수있다.”(34쪽)

 

플라톤의 대화편드을 열심히 읽었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들과 대화하는 방법, 증명해나가는 방법말고는 특별한 정보가 없다. 한스의 이런 주장이 정말 강렬하다.

 

"플라톤이 창조한 것은 시다. 그리고 그의 '대화편'은 세계문학의 걸작이다. (중략)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을 지나치게 중대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떻게 그것을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의 제자들을 자극하여 토론하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생학은, 시인으로 전향한 생학자의 작품이다." (39쪽)

 

제3장 확실성의 탐구와 지식의 개념

 

생학의 첫번째 오류는, 알지 못하는 것을 설명하려는 비유서술(그림사고, 지식을 바탕으로 지은 시)로, 논리영역 밖에 있는 정신의 요구에 기인한, '논리밖의 동기(학문너머의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생학자는, 학문으로 대답을 제시할 수있는 수단을 갖지 못한 시기인데도, 물음에 답하려 시도하기 때문에, 학문에 속하지 않은 언어로 말하게된다.”(40쪽)

 

상상한 것을, 추정한 것을, 특별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시처럼 은유를 통해 이야기하면, 그것이 마치 학문인 것처럼 생각된다.

 

아니다.

 

상상은 여전히 상상일뿐이다. 재현가능하고, 오해없이 이해되어야 한다.

 

“생학자는 알려는 욕구를 억제하지 못하는 것같다. 우리는 생학정신이 시인의 상상과 융합되어 있음을 생학사 어디에서나 발견한다. 생학자가 묻는 물음에 대해 시인이 대답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학책을 읽을 때, 제시된 답보다는 오히려 제기된 물음에 더 주의를 집중해서 읽어야한다. 근본물음을 발견한 일, 그 자체만으로도 지성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기여를 한셈이기 때문이다.” (40쪽)

 

생학의 두번째 오류는, 꿈(환상)과 실제세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성으로 진리를 창조할수 있다고 믿으면,

이성이 아닌 사람의 정신작용,

즉 여러가지 감정이나 본능, 환상으로도 진리를 창조할수 있다고 믿게 되어,

결국에는 신비주의로 빠질수 있다.

 

이성은 경험에 의해 끊임없이 검증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확실한 것을 추구한 플라톤은, 하늘을 관찰한다고 해서 진리를 발견할수 없다고 했다. 예외없는 영원한 법칙을 찾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찰은 포기하고, 이성을 수단으로 삼아 생각을 많이 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모든 주장의 근거들도, 그당시의 사람들이 받아들일수 있었던 자연법칙이나 사회법칙들이었다. 이성이 근거가 아니라 '법칙들의 기억'이 근거가 되었다.

 

"생학자로 하여금 지식에서 관찰의 중요성을 무시하게 만드는 것은, 확실성에 대한 추구이다." (46쪽)

 

"우리가 꿈을 꿈으로 아는것은, 다만 나중에 깬후에 있는 일이다. (중략) 철학자는 항상 감각지각을 신뢰할수 없음을 고민하여 왔다. (물속에 일부를 넣으면  굽어보이는 작대기와 사막의 신기루처럼 / 중략)

 

현대의 경험세마는 empirical science 수학방법과 관찰방법의 성공한 결합이다. (중략) 플라톤이 수학방법과 경험의 결합에 의하여 얼마만큼 많은 일이 달성될수 있는가를 몰랐음은 물론 사실이다. (중략 / 플라톤은) 자연지식이란 관찰을 요구하지 않고 이성에만 의하여 도달된다는 확신을 표현하고 있다. (중략) 확률에 의존한 논의가 생학자에게는 가짜이기 때문에 그는 오직 허용할수 있는 진리의 근원으로서 수학으로 향한다.

 

(중략) 이성을 물리세계 지식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생학을 합리주의(플라톤의 이상주의 포함)라고 했다. (중략) 이 인식론에서는 이성이, 그것에 의하여 물리세계의 일반법칙을 발견하는 힘을 스스로 가진다고 믿는다. 진리의 근원을 찾을때, 경험관찰이 한번 포기되면, 그것은 얼마 가지않아 신비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성이 진리를 창조할수 있다면, 사람의 정신 중 다른 것이 만들어낸 것도 지식과 마찬가지로 신뢰할수 있는 것이라 여겨질는지도 모른다. (중략) 논리를 갖춘 통찰이 물리세계의 여러 성질을 드러낼수 있다는 생각도 피타고라스주의자에 그 기원이 있다."(42~7쪽)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으면서도 빙빙 도는 기분이었는데, 한스는 그냥 불가능한 신의 존재증명을 하는 신학논의라 잘라말한다. 세마학자scinentist는, 신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없고, 그런 목적을 가진 논리는 틀리기 쉽다고,  딱 잘라 말한다.

 

회의하는 내가 존재하고,

내 생각이 완벽한 무엇을 생각하므로

완벽한 신은 존재해야하고,

신이 존재하므로

신이 만든 세상이 존재해야한다는 이야기다.

 

쉽게 말하면,

나와 신과 세계는 그냥 존재해야한다는 것이다.

 

증명은 없다.

자신의 능력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지만, 실패했는데,

자기의 책이 공격당하지 않는 좋은 보호막이 될것으로 생각해서 그냥 적어둔 것으로 무일은 추정한다.

 

"(확실한 것을 추구한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나는,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의심할수 있다 ; 내가 의심하고 있을 때에는, 나는 생각하고 있다 ; 내가 생각하고 있을때, 나는 존재해야 한다. (중략) 자아가 있기 때문에, 신은 있어야 한다 ; 그렇지않으면 자아는, 무한한 존재의 관념을 가질수는 없을 것이다 ; 우리를 에워싼 사물들 역시 존재해야 한다 ; 그렇지 않으면 신이 사기꾼일 것이기 때문에 ; 이 신학논의는 데카르트같은 유명한 수학자가 제출할 때는 정말 이상하게 여겨진다. (중략) 논리의 탐구결과가 예상 목적에 의하여 결정된다면, 우리가 어떤 다른 이유로 확립하고 싶어하는 결과의 증명도구로서 논리가 사용된다면, 그러한 논리는 틀리기 쉽다." (48~9쪽)

 

확실한 것을 바탕으로 더 높은 지식을 추구하려는 갈망이나 기대가, 경험을 무시하는 오류를 낳는다.

 

"논리를 바탕으로 한 증명이, 그 증명이 지니는 확실성은, 지식의 이상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모든 지식이 논리학만큼 신뢰할만한 방법들에 의해 확립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하게 된다.

 

논리증명은 연역deduction이라고 불린다. 결론은 논증의 전제라 불리는 다른 진술들에서 연역함으로써 얻어진다. (중략) 연역의 가치는 그것이 공허하다는 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중략) 주어진 진술에서 다른 진술로 진리를 변환시키는 것이 연역이 지닌 논리기능이다. (중략) 연역은 다른 종합진리가 이미 알려져 있지 않는한 종합진리를 확립할수 없다." (53~4쪽)

 

종합진술은 감각 경험으로 얻어진 지식이다. 예외가 나타날수 있다.

 

"분석진술은 자기설명이며 공허하다 (중략) 반면에 사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진술들은 종합진술이다. 다시 말해서 종합진술은 우리의 지식에 무언가를 덧붙인다. 그러나 경험에서 얻어진 종합진술은, 모두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이어서 확실한 지식을 제공해줄수 없다." (54~5쪽)

 

칸트의 존재론 증명과 분석진술, 그리고 종합진술에 대하여.

 

1) 신은 무한히 완전한 존재자이다.

2) 무한히 완전한 존재자는 필수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 존재라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

3)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신이 존재한다는 진술은, 감각 경험의 지식이 아니라, 선험종합진술이라고 한다. 그런데, 1)과 2)는 분석진술이다. 어디에도 경험과 감각은 없다. 신의 개념을 만들고, 신의 존재를 규정했다.

 

칸트(1724~1804)는 선험종합지식이 있는가를 물었다. 선험이란, 경험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닌, 이성(또는 이성의 통찰력)에 의해서 얻어진 증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옳은 것을 말한다. 한스는 이것을 경험지식에 대한 교묘한 해석이라고 평가한다. 세마는 관찰과 경험, 귀납 추리, 이성에 의한 일반화에 기반한다. 이와는 달리 칸트는, 세마는 인과론이라는 선험종합진리에 의해 발전한다고 말한다.

 

"칸트는 기하학의 공리들을 선험종합진리라고 생각했다 (중략) 기하학의 정리들이 실제에 적용된다는 확신이 서면, 공리들이 옳다는 것이고, 따라서 공리들을 선험종합진리라고 믿게 된다. (중략) 연기의 무게를 결정하는데에는 질량은 불변이라는 가정이 들어있다. 따라서 칸트는 질량보존의 법칙은 선험종합진리라는게 밝혀(진 것 / 중략) 또다른 선험종합진리는 인과원리다. 우리는 관찰된 사건의 원인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있지만, 그 사건이 원인없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중략) 즉 세마는 선험종합지식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57~9쪽)

 

종교가 차지하던 자리에 세마학자가 앉기 시작했다. 그럴수는 없겠지만, 종교와 세마가 서로 보완하는 관계로 나란히 서있다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세마에 대한 믿음이 너무 커져서, 오류가 없는 명백한 상태가, 사람들이 종교를 버리고 세마에 매달리는 결과를 낳고 있다. 정말인가?

 

"마치 예언자보다 더 열광하는 신도처럼 세마를 신봉하는 생학자는, 세마의 성과들이 토대로 하는, 관찰과 일반화가 보증해주는것 이상으로, 세마의 성과들을 신뢰할 위험이 있다. (중략) 세마science는 원래 종교가 맡았던 사회의 역할 즉 안전을 보장해주는 일까지 떠맡아버렸다. 신에 대한 믿음은, 대부분 세마에 대한 믿음으로 대체되었다. (중략) 확실성을 보증받으려는 신학의 사고방식이 세마를 무오류의 것으로 간주하는 생학에서 다시 나타났다." (60쪽)

 

칸트는, 유클리드가 기하학 문제들을 풀어갈때, 처음으로 한 일이, 선-점-면-직각-평행 등을 정의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의에 기초해서 찾아낸 기하법칙들이 선험지식이라고 주장한 근거가 무엇일까? 기하학법칙을 이용해서 실제 구조물을, 너무도 거대하고 믿기지 않은 구조물을 만들수 있기 때문이었을까? 너무나 확실하고 자명한 것이기 때문에 선험종합지식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인과론도 콩심은데 콩이 나다보니 알게된 경험법칙이고, 질량보존의 법칙이나 기하학의 공리들은 증명하거나, 전제하고 관찰해서 얻은 법칙들이다. 선험종합지식은 설명할수 없다.

 

"칸트는 선험종합지식이 있다는 것을 설명할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략) 칸트에 따르면 경험지식을 체계화시키려면 기하학의 공리들, 인과원리, 질량보존의 법칙과 같은 원리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런 원리들은 본래 사람의 정신에 내재되어있고, 우리는 세마를 구성할때, 그 원리들을 규칙원리로써 사용한다. 따라서 칸트는 그런 원리들이 필연으로 타당한 것이라고 결론내린다." (61~2쪽)

 

시간과 공간이 변한다는 생각은, 아인슈타인 이전에 없었던 것이다. 시공간의 크기의 다름은, 간단한 증명과정을 거쳐 확인할수 있다. 그런데, 칸트가 살던 시대에는 시공간이 변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러므로 절대변하지 않는 요소가 있고, 그것을 선험종합지식이라고 생각했다.

 

잘 모르겠다. 절대변하지 않는 것들도, 관찰과 분석으로 얻어진다. 가만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난로가에 앉아서, 회의하는 나의 존재를 믿는다고해서, 얻어지는 지식들이 아니다. 확실한 것과 인과론, 선험종합지식 등 모든 것이 새로운 지식개념이 등장하면서,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불태어졌다고, 한스는 주장한다.

 

"(칸트는) 뉴턴 물리학을 신봉함으로써 확실성에 대한 갈망을 채우려했던 시도(이다. / 중략) 사실 칸트의 철학체계는 절대공간, 절대시간, 자연에 관한 절대 결정론을 가정하고 있는 물리학을 토대로 삼아 세워진 상부구조의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해야 한다.

 

(중략) 경험은 언제나 선험원리들의 틀안에서 가능해야 한다는 공준은, 칸트체계가 상정하고 있는 보증받지 못한 가정이다. 즉 칸트의 체계가 의존하고 있는 증명될수 없는 전제이다. (중략) 오늘날의 물리학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들, 인과원리, 질량보존의 법칙을 더이상 선험종합지식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중략) 우리는 이런 경험을 통해 어떤 체계든 몰락할 것이라고 예견할수 있을만큼 현명해졌다. (중략) 확실성 추구는, 영원한 진리를 요구할 모든 권리를 박탈해 버리는 지식개념이 나타나자, 과거의 생학체계속에서 불타 없어지지 않을수 없었다." (61~6쪽)

 

제4장 도덕률 추구와 윤리-인식 병행론

 

덕은 네가지의 마음이라고 맹자는 말했다. 가련하게 여기는 마음(측은지심), 부끄러워하는 마음(수오지심),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마음(시비지심), 양보하고 겸손하려는 마음(사양지심). 이 마음들은 지식과는 달리, 사람이 태어날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닐까? 가지고 태어나는 이 마음들을, 실천하도록 교육하는 것일까? 만일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면, 이 마음들 자체를 가르치는 것일까? 일부는 가지고 태어나고, 일부는 교육으로 얻는 것일까?

 

소크라테스의 이런 시작은 이해하겠는데, 풀어가는 방식과 결론은 정말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소크라테스는 덕도 지식과 같이 가르칠수 있다고 말한다.

 

생학은 왜 도덕윤리와 연결되는 것일까? 생학의 과제가 왜 도덕일까? 생학은 생각하는 것이고, 생각을 생각하는 것이며, 지혜를 말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올바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다. 지혜롭다는 것은, 자연과 사람에게 유용한 것이고, 자연과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도덕윤리다. 세계를 올바르게 바라본다는 것은, 지금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일이다. 선한 일은 하고, 악한 일은 거부한다. 그러므로 역시 윤리다.

 

그러므로 생학은, 도덕윤리와 연결되어 있다.

 

"소크라테스 : 그렇다면 덕이 학문이나 지식의 일종이라면 , 그것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겠지?

 메 논 : 물론입니다.
 소크라테스 :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가설 탐구를 끝낸 셈이 됐네. 만일 덕이 학문이나 지식의 일종이라면 가르칠수 있는 것이고, 만일 덕이 학문이나 지식의 일종이 아니라면 가르칠 수없는 것이니까 말일세.

 

(중략) 윤리의 통찰은, 기하학의 통찰과 병행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기하학 지식과 같은 것이 있다면, 윤리의 지식 역시 있어야 한다. (중략) 이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신조는 덕이 지식이라는 것을 기본주장으로 삼고있다고 볼수 있다. (중략 / 윤리-인식병행론) 만일 어떤 사람이 부도덕한 행위를 한다면, 그 사람은 기하학에서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 무지한 것과 똑같은 의미로 무지하다." (67~9쪽)

 

특정 종교는 특정의 윤리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이성은, 모두가 동의하는, 어느 종교를 믿든 동의하는 지식에 근거를 두고, 윤리(앎)을 실천하도록 명령한다. 특정 신의 명령보다 이성이 만들어낸 도덕명령은 더욱 강력하다.

 

"윤리-인식병행론을 주장하는 동기는, 윤리를 종교보다 더 훌륭한 근거에 입각해서 확립하려는 욕구라고 볼수 있을 것같다. (중략) 논리형식을 지닌 수학을 구성한 사람은 새로운 형태의 명령 즉 이성의 명령을 발견했다. (중략) 이성의 명령은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나 안믿는 사람 모두에게 동의할 것을 요구한다. (중략) 그렇다면 윤리규칙을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의무로 확립시키는 최상의 방법은, 윤리-인식병행론 다시 말하면 덕이 지식이라는 기본주장에서 주어진다" (70~1쪽)

 

종교와 윤리-인식병행론의 공통점은, 진리를 배워서 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하나이신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과같이, 생학(윤리)를 알지못하는 무지에 의해 부도덕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그러므로 교육을 통해 앎에 이르게 되면, 하느님을 믿게 되고, 도덕에 바탕을 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데, 안다고해서 제대로 실천하며 건실한 삶을 살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종교인들이 매일같이 회개하는 이유는, 알면서도 죄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학자들은, 잘 모르고도 말을 많이하면 엉터리고, 조용하면 무지하거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말할수도 없고 실천할수도 없으니, 확실한 진리를 추구하는 학자들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연구에 매진하며 산다. 이런 상황에서 스피노자가 위대한 것은, 생각하고-알고-말한데로 실천했다는데 있다. 

 

뉴턴과 스피노자는, 데카르트(~1650)와 갈릴레오가 죽고(~1642) 태어나서 활동했으므로 그들의 세마를 받아들여 지식-사고체계를 만들었고, 스피노자는 아마도 뉴턴과 비슷한 세마수준에서 사고했을 것이다.

 

"윤리-인식병행론을 극단의 형태로 표현한 생학체계는, 스피노자(1632~1677)의 윤리학이다. (중략) 스피노자는 열정이란 영혼의 부적당한 관념에서 나온 것이라는 이론을 전개한다. 이 이론은 부도덕이 무지라는 소크라테스의 이론에 해당된다. (중략) 열정이란 슬픔을 유발시키는 것이므로 악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열정의 힘을 극복할때 와아하게 happy 된다. (중략) 우리를 예속에서 해방시켜 주는 힘은 이성에 있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금욕주의이며, 선이란 단지 지식에 의해 얻어지는 지식쾌락에 불과하다.

 

(중략 / 한스 라이헨바흐는) 스피노자의 명성이 그가 생학에 공헌했기 때문에 얻은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인격이 훌륭했기 때문에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그는 안경렌즈를 갈아 생계를 유지했고, 대학교수직을 사절했다. (중략) 그는 온갖 비판에 대하여 무관심했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친절했고, 그리고 결코 어떤 증오심도 표시하지 않았다." (71~2쪽)

 

스피노자는 논리에 따라 증명가능한 윤리법칙들과 그 법칙들에서 유도되는 윤리들을 제시하고 있다. 철저하게 기하학의 논리전개를 따른다. 전제를 뛰어넘는 과도한 결론에 도달하기는 하지만.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자제와 지성연구를 최고선으로 여기는 냉철한 인격을 가진 사람의 신조를 표현해놓은 것이다. (중략) 그의 결론은 전제의 내용을 훨씬 넘어서 있다. (중략) 윤리학을 소크라테스처럼 지성화하여, 감정을 경멸하는 윤리학을 건설하려 했다. (중략) 스토아학파 시대부터 생학자philosopher란 열정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공공연하게 인정받은 것이었고 (중략) 나는 왜 철학자가 그처럼 감정에 무딘 사람상을 찬양하고 그런 생활을 해야하는지 이해할수 없다. (중략) 삶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정열이다. 이 원칙은 생학자에게도 적용된다. (생학이나 논리학에 대한 열정이든 다른 분야에 대한 열정이든)" (72~3쪽)

 

공리에서 출발해서 어떤 정리들을 말하게 되면, 그것은 공리와 정리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공리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정리는 참 또는 진리라고 말할수 없다. 여기에서 증명되어야 할 것은 공리의 참 또는 진리여부다. 만약에 공리를 참이나 진리라고 약속한 것이라면, 그것은 증명할수 없어서 약속하고 합의한 것이 된다.

 

그런데, 윤리학의 공리들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윤리는 지식이므로 가르쳐질수 있다. 윤리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윤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제와 지성연구가 최고선이다. 열정은 슬픔을 유발하는 악이다. 열정이란 영혼의 부적당한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것들을 말하는가?

 

"기하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윤리학의 공리들은 연역논증의 출발점에 불과한 것으로, 이 공리들로부터 일련의 추론을 통해 계속 그다음 결론을 이끌어낸다. 윤리학은 지식이다.

 

(중략) 연역은 궁극의 진리를 발견하는 수단이 아니라 단지 여러 진리를 연결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중략) 윤리학의 공리들은 이 윤리학의 공리들로부터 연역되는 윤리학의 정리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논리에 따라 증명이 가능한 것은 '만약 이 공리들을 인정한다면, 이 정리들 역시 인정해야 한다'와 같은 만일 ~라면, 그러면 ~이다라는 형식을 지닌 두 진술사이의 관계뿐이다. 따라서 이런 분석은 윤리학의 정당성 문제가 윤리학의 공리들의 정당성 문제로 환원될수 있음을 보여준다. (중략) 연역이라는 방법은 신뢰문제를 공리에서 정리로 전환할 뿐이지 신뢰문제에 해답을 줄수는 없다." (73~6쪽)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스피노자를 거쳐 다시 칸트로 간다. 윤리학의 공리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를 분석하자는 것이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제1준칙은, 공동체의 윤리와 합당하게 너의 행동윤리를 결정하라는 말이다. 공동체의 윤리는 집단이, 사회가 선택한 윤리이기 때문에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한스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칸트의 논리는 정확했지만, 논리의 언어가 아니라 시를 쓰듯 도덕철학을 완성했다고 본다. 

 

"윤리의 성격에 관한 문제를 윤리학의 공리들이 지닌 성격에 관한 문제로 본 임마누엘 칸트의 공적을 또다시 인정해야 한다. 칸트는 연역이란 분석의 성격을 지닌 것이어서 윤리규칙들의 정당성을 수학에서처럼 오로지 연역에만 의존해서 확보할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칸트는 윤리학의 공리들이 어떤 성격을 지닌 것인지에 대한 답을 확보한 후에야 비로소 윤리의 성격이 밝혀질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략 / 실천이성비판) 너의 행동준칙이 일반 입법의 원리가 될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라 (중략) 칸트 윤리학의 실패는 종합진술을 순전히 이성에 의해 획득할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중략) 도덕에 관한 칸트의 저작들은, 윤리규칙들과 윤리개념들에 대해 시를 쓰듯, 감탄과 경탄 (중략) 의무여! 그대 위대하고 숭고한 이름이여 (중략) 그대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거나 반감을 살 어떤것을 가지고 우리를 위협하지도 않는구나." (77~8쪽)

 

논리를 중시하면서도 의무를 신성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그의 계급의식을 반영하여, 노동과 군대에 대한 복종을 초래한다. 시간과 공간의 절대주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르는 필연과 당위, 이런 뉴턴 역학이 칸트 철학의 기반이 되었다. 목적과 동기가 즉 원인이 결과보다 중요하다는 도덕론을 펼치게 된다. 그렇지만 칸트의 도덕률은, 깊이있는 이론이 아니라 그의 계급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스는 단언한다.

 

"그의 선험인식은 그가 살던 시대의 물리학과 일치하고, 그의 선험도덕은 그가 속해있었던 사회계급의 윤리와 일치한다. (중략) 칸트는 목적이 수단보다 우월하다고 보고 (중략) 도덕률에 대한 추구는 지식에 대한 논리분석을 방해하는 논리밖동기에서 나온 것이다." (80~1쪽)

 

실제와 당위(도덕율)을 구별하는 것이 윤리학자의 윤리인식병행론이다. 윤리학에서는 당위가 실제와 일치하기 매우 어렵지만, 기하학에서는 당위(법칙)이 실제와 거의 일치한다. 그래서 당위가 아니라 실제가 어떻게 있는가, 즉 실제를 언어 또는 수학이라는 추상의 방법으로 알려준다. 기하학에서는 당위(법칙)과 실제가 부딪히면, 당위(법칙)을 버린다. 윤리학에서는 당위(도덕률)과 실제가 부딪히면, 아마도 실제를 버릴 것이다.

 

"윤리학자는 실제 삼각형과 이상 삼각형을 구별하고 (중략) 윤리학의 정리가 '어떻게 행하고 있는가'와 구별되는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에 관한 진술이라고 해석되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수학의 정리 역시 '어떻게 있는가'와 구별되는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에 관한 진술이라고 해석된다. (중략) 이상의 기하학 도형이 실제 속에서 발견될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기하학의 법칙들은 최소한 실제 대상들 사이에 성립하는 근사치의 관계를 제공한다. (중략 / 그러나) 수학은 실제가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게 아니라, 실제가 어떻게 있는가를 알려준다." (81쪽)

 

기술윤리학이라는, 모범사람을 가정하고, 실제 사람들의 행동을 근사치로 서술하는 윤리학은 가능해 보인다.

 

"우리는 기하학자가 이상삼각형을 다루는 것처럼 모범사람을 다룸으로써 최소한 이론으로는 기술윤리학을 구성해 볼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이상윤리의 법칙들이 어느 정도는 근사치로 실현될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대부분의 사람은 사실 도둑질이나 살인을 하지 않는다. 윤리의 이상은 근사치로 실현된다. 왜냐하면 윤리의 이상이 근사치로 실현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사회집단을 이루며 살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기술윤리학은 모범사람의 행동을 기술함으로써 사람의 윤리 행동에 관한 근사치의 지식을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다." (82쪽)

 

케플러는 행성의 운동법칙을 발견하는데 3년이 넘는 매우 오랜 시간을 들인다. 그 이유가 바로 별의 운동은 완벽한 원을 그릴것이라는 오랜 편견 때문이었다고 한다. 한스 라이헨바흐는 그리스 천문학이 이런 자세를 갖게 된것이, 윤리인식병행론에 근거하여 천문학에 도덕률이 개입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케플러는 튀코 브라헤의 엄밀한 관찰기록이 원운동과 맞아떨어지지 않자, 관찰기록이 틀렸다고 던져버리지 않고, 원운동이라는 고귀함을 버리고 타원운동이라는 잡동사니를 선택함으로써 행성운동의 법칙을 발견할수 있었고, 스스로를 어리석었다고 한탄했다.

 

도덕율 또는 이데아론을 우선하게 되면, 물리세계의 실재와는 다른 논리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그 대표 사례가 바로 천문학 연구의 오류다. 물리세계의 실제는 거칠고 복잡하며, 규칙으로 보일만한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데아의 세계는 단순하고 완벽하여 규범이나 규칙이 눈에 띈다. 그래서 이데아의 세계가 현실보다 가치가 높다는, 가치판단의 전환이 나타난다.

 

"그러나 윤리학자가 원하는 것은 이런 근사치의 것이 아니다. (중략) 윤리학자는 이성 또는 이데아에 대한 통찰이 도덕률들을 밝혀낼수 있다고 주장하고, 그럼으로써 수학의 기능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규범이라고 해석할 것이다. 따라서 윤리학자는 정신을 입법자라고 생각하게 된다. 좀더 온건하게 말하면, 정신은 훨씬 더 고차원의 존재영역을 주시함으로써 규범의 법칙을 지각하는 통찰도구라고 윤리학자는 생각한다. 우리는 여기서 존재의 영역이 하나만 있는게 아니라는 심리의 기원을 알수 있겠는데, 이런 생각의 주창자는 플라톤이다.

 

(중략) 별들의 궤도는 완전한 원을 그린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만일 그것이 원이 아니라면 소위 위신이 안선다는 것이다. (중략) 플라톤의 이데아설은 물리의 실재로부터 이상의 실재로 나아간 가치판단의 전환을 표현하고 있다." (82~3쪽)

 

플라톤의 이분법이 칸트까지 영향을 주었다. 칸트는 종교와 도덕에 논리를 부여하기 위해 물리세계의 실재를 뛰어넘는 이상의 세계 - 이데아의 세계인 물자체의 세계를 끌어왔다.

 

이성은 현상을 넘어서서 확장된 사고를 하는데, 왜 이율배반이 생긴다는 것일까? 이성은,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종합해서 지식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그런 다음에 이성은, 현상을 넘어서는 세상으로 나아간다. 불행히도 그 세상은 물리법칙을 따르지 않는 세계다. 그러므로 이율배반이다.

 

완전한 법칙이 지배하는 이데아의 세계 = 물자체의 세계 = 물리법칙이 따르지 않는 세계.  

 

칸트와 그를 따르는 생학자들은, 현상과 물자체라는 그럴듯한 이분법에 따라서 현상의 물리법칙을 따르지 않는 형이상학의 세계를 창조했다. 그리고 물자체의 세계는 그들만의 세계가 되었다.

 

"(플라톤보다 덜 유치한 논증) 칸트는 현상과 물자체를 구별한다. 우리의 지식은 모두 현상에 대한 것이다. (중략)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칸트는 관찰과 학문에 의해 해명되는 세계와 다를뿐만아니라, 그보다 더 우월한 선험 세계에 도달했다. (중략) 칸트는 도덕의 원리들과 종교의 원리들이 적용되는 영역을 건설하고 싶어했다. 

 

(중략) 이성이 현상의 세계를 넘어서 확장되면, 이성은 불가피하게 이율배반이라 불리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것과 이런 이성의 좌절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가시 세계의 배후에서 실재를 지탱해주는 원리들로서 신-자유-영혼불멸을 믿는데 있다는 것이다.

 

(중략) 세마를 적대시하는 생학자들은 (중략) 이상 존재의 세계를 확립한 양, 또 오직 생학자만이 그런 존재의 세계에 관한 지식을 손에 넣을수 있는양 꾸며댔다." (84~5쪽)

 

끔찍한 평가다. 헤겔을, 이론 기반은 갖추지 못했고, 생학이 답해야 할 중요한 물음들은 알지 못하고, 실수들만 반복한 사람이란다. 최근 10년 사이에 헤겔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그가 이야기한 '시대정신'이라는 단어만 회자된다. 그의 책은 난해하기만하니 읽을 필요가 없다는 충고가 난무한다. 게다가 이제는 이런 실수 투성이의 그림같은 언어만 난무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이 평가는 20세기 중반의 이야기다.

 

"헤겔은 수학의 학문들을 찬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플라톤이나 칸트와는 다르다. 더욱이 헤겔은 플라톤이나 칸트가 제기한 물음들이 갖는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에도 플라톤이나 칸트와는 다르다. 하지만 헤겔은 플라톤이나 칸트가 범했던 온갖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고" (86쪽)

 

헤겔(1770~1830)의 변증법을, 변증의 도식이라고 말하며 법칙의 수준까지 올라가지도 못하는, 사건들이 벌어진 사후에 짜맞추기식으로 정리하는 도식이고, 미래를 예측할수 없는 방법론으로, 진리여부를 증명하는 수단으로도 사용할수 없다고 한다. 놀랍다. 정반합의 과정은 작용-반작용과 같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로 생각했는데, 그냥 짜맞추기식 설명이라니. 적어도 하나는 인정한다. 어떤 사실의 진위여부를 이를 통해 증명할수 없다는 것을.

 

"자신의 생학체계를 세우는 신입생에게나 어울릴 이런 원시 도식화는 헤겔의 또다른 역사도식보다 훨씬 덜 알려진 것이다.  (중략) 변증 도식은 역사발전이 이루어진 연후에야 그 역사발전을 짜맞춰 집어넣을수 있는 편리한 틀에 지나지 않는다. 변증 도식은 역사에 대한 예측을 할수 있을만큼 정확한 도식도 아니고 일반 도식도 아니다. 또 변증 도식은 어떤 세마이론의 진리여부를 증명하기 위한 논거로 사용될수도 없다." (88쪽)

 

헤겔의 역사발전론을 논리나 세마가 아니라, 논리에서 벗어난 이성주의라고 평한다. 역사가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를 예측하기 위해서, 역사는 이렇게 발전한다고 결정해두고 그틀에 맞춰서 해석하고 분석한다는 것이다. 뭇사람의 역사가 야만에서 문명으로 점점 진보해오고 있다. 민주주의가 확대하는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다. 그리고 진보의 방향을 따라가다보면, '뭇사람이 평등한 세상'이 올것이라는 것은, 가능한 생각이 아닐까?

 

"헤겔은 도덕의 목적을 역사에 반영시키기 위해서 도덕률을 추구했다. 이를테면, 선은 결국 실재가 될것이고, 우리는 역사의 과정에 참여하고 있으므로 선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보다 쉬운 말로 하면,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인가에 관한 진술이,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가에 관한 진술에서 도출된다는 것을 뜻한다.

 

(중략) 생학자는 이런 생각을 '역사의 목적에 따른 해석'이라고 부른다. (중략) 이런 생학은 이성주의가 논리의 통제를 벗어나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 (90쪽)

 

역사는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다시 묻지 않을수 없다. 경제체제에 의해 사상-문화-정치의 변동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이데올로기 운동을 경제조건의 결과라고 설명하고, 계급투쟁을 역사발전의 수단이라고 선전했던 사람은 이성주의자일수가 없다. 막스의 역사관이 취하고 있는 입장은 경험주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중략 / 그런데 인과론에 너무 집착하고 말았다.) 막스의 신조에 따르면, 항성의 궤도가 물리법칙에 의해 결정되어있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역사발전 역시 경제법칙에 의해 엄격하게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조건은 역사발전에 기여하는 여러 요인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중략) 경험주의자는 역사의 사건에서 우연이라는 요소를 완전히 제거할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이 우연이란 요소가 역사의 주요한 추세마저도 정확하게 예측할수 없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90~1쪽)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상상의 세계를 통해 덕이라는 세상의 윤리를 확립하려고 했다. 칸트는 흔들림없는 공리를 바탕으로 도덕과 종교의 생학을 완성하려했다. 헤겔은 변증의 도식을 이용해 역사발전이라는 목적을 이루려했다. 막스는 역사를 경제로 해석하는 것에서 나아가 경제결정론을 만들려 했다. 모두 이성주의의 산물이다. 기하학-경험주의-역사 등 무엇을 염두에 두었든 상관없이, 사변철학자들은 그들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 논리와 세마를 결합시키려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칸트의 체계는 이성주의가 걸은 역사노선의 최고점에 도달한 반면에, 헤겔의 체계는 19세기의 특징을 이루는 사변철학의 쇠퇴기에 속한다. (중략) 이성주의 생학자의 사고방식은, 세마의 성과와 방법을 세마바깥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논리바깥의 동기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중략) 세마와 사변생학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 한차원 높은 종합을 얻으려는 희망에서 이 두가지 것을 융합시키려 하지 말라." (92쪽)

 

재미있게 읽었지만 아직도 윤리-인식병행론, 즉 윤리와 인식은 가르쳐질수 있다는 생각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언젠가는 알수 있을 것이다.

 

제5장 경험주의의 성공과 실패

 

이성주의와 경험주의라는 양대 산맥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1) 이성주의는, 정신의 특별한 능력이 세마지식을 뛰어넘는 지식을 제공한다고 믿는다.
2) 경험주의는, 관찰이 지식을 얻는 일차수단이면서 사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심판관이라고 믿는다.

"(이성-직관-이데아에 대한 통찰-물자체의 인식) 정신의 특별한 능력이,  세마science를 뛰어넘는 지식을 제공한다고 믿는다. 관찰자가 획득할수 없는 종류의 지식, 즉 세마를 건설한 감각 관찰의 방법과 일반화라는 방법에 의해서는 얻을수 없는 지식. 이런 종류의 철학은 이성주의rationalism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중략) 수학이 아니라 경험과학을 지식의 이상형태라고 생각한다. 다시말해서 그들은 감각 관찰이 지식을 얻는 일차수단이면서, 지식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궁극의 심판관이라고 주장한다. 또 그들은, 사람의 정신이 논리 관계에 관한 공허한 진리이외의 다른 어떤 진리를 경험과는 무관하게 직접 파악할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자기기만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유형의 철학은 경험주의empiricism라 불린다." (94~5쪽)

관찰에 의해 얻어진 지식을 연구 분석하고, 지식들 사이의 함축관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특별한 정신능력이 없어도 관찰하고 분석하고 이해하려 한다면 얻을수 있는 것이 지식이다.

* 생학 philosophy 哲學 : 생각하는 학문, 생각을 생각하는 학문, 세계를 설명하려는 학문, 지혜를 생각하는 학문

“경험주의 생학자는, 관찰에 의해 얻어진 지식을 연구하고 분석할 따름이고, 그리하여 그런 지식이 지닌 의미나 그런 지식들 상호간의 함축관계를 이해하려한다. 경험주의자는이렇게 구성된 지식론이 생학지식이라 불리든 그렇지않든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경험주의자는 그런 지식론이 세마학자scientist가 사용하는 방법과 동일한 방법에 의해 구성된다고 생각하며, 또 그런 지식론을 특별한 생학능력의 산물이라고 해석하는 것을 거부한다.” (95쪽)

피타고라스 - 소크라테스(bc 5세기) -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이성주의자 또는 수학을 사랑한 생학자philosopher들의 계보와 함께,

 

데모크리토스(bc 5세기) - 카르네아데스 -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경험주의의 계보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두자. 엠피리쿠스는 경험주의의 empricism의 아버지가 되는 모양이다. 그의 이름을 따서 철학의 명칭이 정해진 것인가?

“(소크라테스 시절의 데모크리토스 이후, 확실성을 갖고있는 수학만이 유일하게 인정할수 있는 지식형태라고 생각하는 지적환경에서,  진리가 아닌, 잘 정립된 의견과 확률이론을 옹호함으로써, 경험주의자의 입장이 설수있는 토대를 마련한) 카르네아데스 이후 대략 300년이 지난 다음,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 A.D.150년경)는 회의주의의  신조들을 개관하는 책을 썼다.

우리는 이책을 통해 엠피리쿠스의 선배 철학자들인 초기 경험주의자들에 관한 것을 알 수 있고, 또 엠피리쿠스가 감각지각으로 얻은 지식에 의거해 '목적에 맞는 행동'이 가능함을 믿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수 있다. 또한 엠피리쿠스는 경험의학과를 이끄는 대표자였는데, 이 학파는 의학이라는 학문에서 사변의 부가물을 제거하여 정화하려 했다." (97쪽)

* empiric : one who relies on practical experience (etymology) Middle English emperiqe "physician in ancient Greece and Rome who held that treatment should be based on observation rather than theory," borrowed from Latin empīricus, empēricus, borrowed from Greek empeirikós.

[ 출처 ] merriam-webster Empiric Definition & Meaning - Merriam-Webster

수학처럼 이성에 의한 지식을 생각해낸 생학자philosopher들은 종교와 손을 잡고, 결국에는 설명할수 없는 것까지 설명해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만다. 원조는 그것을 피하려고 노력했을지라도 후대의 추종자들이 이성주의 생학자들이 생각을 적극 이용하게 되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경험주의자와 이성주의자 사이에서 제법 그럴듯한 토론이 벌어지기는 했던 모양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그런 의미에서라도 다시 훑어봐야할 모양이다. 경험주의자는 이성주의자를 상식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이성주의자는 경험주의자를 윤리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좀 웃기다.

“종교 신조들은 감각지각에 의존하지 않기때문에 지식을 획득할때 초감각 수단을 필요로한다. 이런 유형의 지식을 발견한 체하는 생학자philosopher는 자연스럽게 신학자와 손을 잡는다. (중략) 플라톤은 신비한 생각에 사로잡혀있는 집단이 신봉하는 철학자가 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콜라주의가 신봉하는 철학자가되었다.

(중략) 이성주의자는 경험주의자를 열등한 도덕윤리를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경험주의자는 이성주의자를 상식도 모르는 자라고 생각했다." (98쪽)

 

1543년 그레고리우스력을 완성한 코페르니쿠스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 on the revolution of the heavenly orb)'를 발표하였고,

 

1600년 지동설을 주장하고 삼위일체설을 부정한 브루노는, 7년동안 고문을 받다가 혀가 쇠꼬챙이에 꽂힌채 화형을 당했다.

 

1609년 케플러가 행성운동의 제1법칙인 타원운동의 법칙을 포함하는 '신천문학'을 발표하였다. 제2법칙은 행성의 공전궤도는, 속도와 관계없이 같은 시간에 같은 면적을 이동한다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달나라 여행을 한다는 아들의 소설 '꿈' 때문에 마녀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케플러의 노력에 의해 추방되는 것으로 그쳤다.

 

1632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두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  Dialogo de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Dialogue Concerning Two Chief World System' 에서 지동설을 펼치다가 종교재판에서 가택연금형을 당하고 죽을때까지  10년 - 3천 650일을 갇혀있어야 했다.

 

이런 배경에서 경험주의 생학은 이론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경험주의의 대표 생학자들은 서로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로크는 베이컨을 이어받기만 했고, 흄도 베이컨과 흄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이들 사이의 토론은 있을수가 없다. 흄은 국부론과 증기기관과 미국 독립의 해에 죽었다. 

 

"경험주의를 이성주의와 대등한 입장에서 경쟁할수 있을만큼 긍정하면서도, 경험주의가 충분한 근거를 갖춘 생학이론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때는, 1600년경으로 근대세마가 발흥하면서다. 근대에 들어와서야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1561~1626),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과같은 위대한 경험주의자의 생학체계가 제시되었다." (98쪽)

 

2024년 7월 5일은,

24년의 햇님에 대한 지구 공전의 원일점이다.
거리는 약 1억 5,200만 km

지구 공전의 근일점의 거리는
약 1억 4,700만 km

두 지점의 차이는 500만km다.

엄청난 차이일까?
얼마나 춥고 더울까?

 

로크의 정신백지론, 흄의 인상과 관념을 기억할수 있을까? 모만대상인 심리사건은 감정이다. 그런데, 모만감각이 무엇인가?

 

“로크는 정신이 백지상태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이 백지위에 쓰여지는 것은 경험이다. 이전에 감각한 적이 없는것은 정신 속에도 없다. 하지만 감각지각에는 두종류가 있다. 바깥대상에 대한 지각과 모만대상에 대한 지각이 그것이다. 모만대상은 생각하는것, 믿는것, 고통의 느낌, 또는 색깔감각과 같은 심리사건에 의해 주어진다. 우리는 모만대상들을 모만감각을 통해 알게된다.

 

흄은 정신의 내용을 인상과 관념으로나눈다. 인상은 모만감각을 포함한 감각에 의해 주어진다. 관념은 옛날의 인상을 떠올리는 것이다. 관념은 인상들의 결합물이라는 점에서만 관찰된 현상과 다르다. 예컨대 관찰된 황금에 대한 인상과 관찰된 산에 대한 인상은 결합되어 관찰되진 않지만, 상상할수는 있는 황금산이란 결합물을 형성할수있다. 따라서 경험주의는 이성주의와는 달리, 정신이 인상과 관념의 질서를 확립하는 일종의 종속역할을 한다고 함으로써 정신의 역할을 격하시킨다. 이 질서지어진 체계가 다름아닌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식을 구성하는 일에서 정신이 담당하는 역할은 베이컨, 로크, 흄이 사용했다고 할수 있는 몇개의 실례를 들면 쉽게 이해될수 있을 것이다. 정신은 하루동안 일어난 여러 경험 중에서 눈으로 보았던 불의 밝음을 상기해 내고, 그것을 전에 불 에 가까이 갈때 지각한 뜨거운 느낌과 연관시켜, 불은 뜨겁다라는 물리법칙에 도달한다. 비슷하게 정신은 다른날 다른 시각에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관찰한 여러심상을 비교함으로써 별의 운동법칙을 발견한다. 다시말해서 정신은, 어떤 별의 여러 위치를 상상의 선으로 연결함으로써, 그자체로서는 관찰의 대상이 아닌, 그별의 궤도를 구성한다. 내가 이런 지 식개념에서 정신이 종속역할을 한다고 할때 말하려 하는 것은 정신을 진리의 심판자라고 생각할수 없다는 것이다.” (98~9쪽)

 

* 모만 : 몸안 -> 모만 inside of the body 內部 ; 모만감각, 모만대상

 

이성의 올바른 사용법이자 자연스러운 기능이다. 물리세상을 잘 관찰하여 추리를 통해 체계를 만드는 것. 케플러가 행성운동법칙을 발견하고 확인한 것은, 브라헤의 관측자료를 참조하고 종합한 결과이다. 뉴턴의 법칙도 핼리가 혜성의 도래주기를 예측하고 맞춤으로써 확인되었다.

 

이성은 체계를 만들고, 감각을 이용한 관찰은 그 체계의 진위여부를 판정한다. 놀라운 것은 체계를 만들어 일반지식을 만들어낸 이성의 힘으로 미래를 예측할수 있다. 이것이 베이컨의 경험주의 생학이다.

 

“별의 운동이 실제로 원을 그리는지 어떤지는 지각에 의해 판정된다. (중략/그러나) 이성은 지식의 체계를 잡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도구이다. 이성없이는 감각사실보다 높은 수준의 추상사실을 알수없다. 감각은 행성들이 햇님의 주위를 타원을 그리며 돈다든가 물질이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런 추상진리에로 인도하는 것은 추리와 결합된 감각관찰이다.

 

(중략) 베이컨은 새로운 경험주의에 대해서는, 재료를 모아 소화하고, 그것에다 자신의 몸에 있는것을 첨가시켜 더 고차원의 산물을 창조하는 벌과 같다고 주장했다. (중략) 우리는 이성이, 질서라는 추상관계를, 관찰한 지식에 첨가한다고 말했다. (중략) 만일 추상관계가 일반 진리라면,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관찰뿐만아니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관찰에도 역시 적용될 것이다. 다시말해서 추상관계는 미래의 경험을 예측하는 일에도 사용된다. 이성이 관찰한 지식에 첨가하는 것은 바로 이런것이다. 관찰은 과거와 현재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반면에 이성은 미래를 예측한다" (99~101쪽)

 

이성의 한계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우리 몸이 생각에 의해서 움직여지므로, 이성이 독립된 실체로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이성은 뇌의 작용이며, 뇌는 몸이다. 이성에 의한 예측은, 이성의 독립능력이 아니라, 관찰된 결과들이 쌓여서 얻어진 결과이다.

 

더불어서 연역이라는 것은, 거대한 전제(나무)를 분석해 내놓은 하나하나의 가지들이다. 그 가지는 꽃도 있고 열매도 있어서 화려하다. 화려함은 시간이 지나면 공허해진다.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낼수도 미래를 예측할수도 없기 때문이다.

 

필연도 공허하다. 필연의 법칙도 연역에 의해 얻어진 결론이므로, 새로운 예측이 아닌 뻔하고도 공허한 결론이다.

 

결국 새로운 진리의 획득이나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귀납추리에 의존할수밖에 없다. 그러나 귀납추리는 오류를 범할수 있기 때문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귀납의 방법론으로 베이컨(또는 한스)가 제시하는 것은, enumeration이다. 목록이나 열거, 나열로 번역할수 있는데, 보다 좋은 것은, 보이는 것 모두를 하나하나 센다는 의미로, 모셈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 세익스피어(1564~1616)와함께 임진왜란의 시기를 살아간 베이컨은, 지식의 체계를 갖추기 위해, 일반지식을 만들어내기 위해 공통분류법을 적용했다. 

 

“베이컨(1561~1626)은, 이성 단독으로는 어떤 예측능력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말해서 이성은 관찰과 결합할 때만 예측능력을 갖게 된다. (중략 / 연역추리의) 결론은 전제를 분석하여 연역된다. 전제에 덧붙여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론은 단지 전제속에 들어있는 내용의 일부를 명백하게 드러낼 뿐이다. 이런 공허성이 바로 연역추리의 본질이며, 따라서 공허성은 우리가 결론이 필연의 진리라고 말할때 지불하는 대가인 셈이다.

 

(중략) 결론은 아직 관찰되지 않은 까마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또 아직 관찰되지않은 까마귀들에까지 관찰된 까마귀의 속성을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결론의 진리성은 보증받을 수없다. (중략) 일반진리를 확립하려고 한다면 그런 추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일반진리는 관찰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일반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오류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추리를 한다. 그런 종류의 추리는 귀납추리(inductive inference),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모셈에 의한 귀납 추리(inference of inductive by enumeration)라 불린다.

 

(중략) 연역추리는 전제가 미래에 관한 언급을 할때만 예측력 있는 결론에 도달할수 있다 (중략) "모든 사람은 죽는다" 는 전제는 귀납추리에 의해 만들어졌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연역논리학은 예측력 있는 이론을 정립할수 없으므로 귀 납논리학에 의해 보충되지 않으면 안된다."(101~3쪽)

 

* enumerate 낱낱이 세다 -> enumeration 열거, 목록, 셈 또는 모셈(모든것을 세는 행위)

* trifle 사소한 일 -> trifling 사소한 행위

 

베이컨이 비록 이성과 관찰을 결합시켜 사고하는 방법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경험주의의 장점과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경험과 관찰이라는 단순한 행위에서 진리를 발견할수 있고, 모셈을 기반으로 일반화를 통해 진리에 다가서지만, 언제든 반례가 나타나 오류가 있음을 드러낼수 있다고 한다. 그것이 스스로도 알고있는 베이컨의 한계다.

 

하지만 베이컨의 생학은, 뉴턴의 세마와 결합되어서야 비로소 제대로된 방법론에 다가설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영국 경험주의가 극복해야했던 것은, 수학이라는 모형을 본떠 만든 확실한 지식을, 가지려고 했던 그리스인의 이상이었다. (중략) 베이컨은 귀납추리의 중요성을 그처럼 강조하면서도 귀납추리의 약점을 아주 명료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는 귀납추리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관찰사실들을 어떤 공통속성에 따라 분류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중략) 갈릴레오가 베이컨과 동시대 사람이란건 사실이다. 또 갈릴레오의 수학방법이 베이컨의 귀납분류보다 우수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수학의 가설을 구성하는 방법(제6장)이 철학탐구의 대상이 될 수 있으려면, 이 방법은 먼저, 이 방법과 관련된 모든것과 함께 발전했어야 한다. 

 

(중략) 베이컨의 귀납논리학은 소박한 것이며, 상식이 기꺼이 사용하는 규칙에 대한 확신에 근거를 두고있다. 하지만 그것은 세마학자가 사용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세마의 방법이 처음 생겨난 시기 그리고 세마방법이 처음으로 성공을 거두어 낙관론으로 들떠 있는 시기에, 그 세마방법을 비관하기란 거의 기대할수 없는법이다. 베이컨의 귀납논리학을 세마답지 않다고 비판하는 생학사가들은, 그들의 비판에는 후세의 표준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베이컨이 죽은 다음 약 60년 후에 발표된 뉴턴의 중력이론이 나온 다음에야 비로소 연역의 방법과 귀납 추리를 결합시켜 명확한 방식으로 사용할수 있게되었다. 

 

(중략) 경험주의는 베이컨에게서 그 예언자를, 로크에게서 그 공공연한 지도자를, 흄에게서 그 비판가를 발견했다. 로크는 경험을 귀납에 의해 일반화하여 경험지식을 얻는다는 베이컨의 이론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로크는 모든 종합지식이 경험지식인가 어떤가에 관해서는 그리 명료하게 생각하지 못했던것 같다.

 

로크는 수학지식을, 절대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수학지식을 경험지식과 구별한 것같다. 로크의 말에 따르면 필연명제는 '하나마나 한 말(trifling)이거나 아니면 '교훈의  말'이다. (중략) 로크는 도덕판단을 수학의 정리와 동일한 종류의 진리성을 갖는것으로 취급함으로써 윤리-인식병행론의 지지자가 되었고, 또한 수학이 분석이라는 생각과 거의 양립할 수 없는 결론에 빠지게 되었다." (103~5쪽)

 

 

수학이 절대확실한 것이라면 필연의 것이고, 그러면 연역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전제에 대한 분석이 수학이다. 흄은 지식은 분석지식과 종합지식이 있고, 종합지식은 귀납으로만 얻을수 있는데, 종합지식의 필연성을 갖지 않는다.

 

“흄은 모든 지식이, 분석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경험에서 얻은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시말해서 수학과 논리학은 분석지식이고, 모든 종합지식은 경험에서 얻은 것이다. 흄이 '경험에서 얻은'이라는 말로 의미하는것은, 개념들의 기원이 감각지각이라는 것뿐만아니라, 감각지각이 모든 지식(분석지식이 아닌 지식)의 정당성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이 제공하여 지식에 첨가하는 것은 공허한 성격의 것이다.” (107쪽)

 

모든 까마귀가 검다는 주장을 포기하지 않아도 흰까마귀가 존재하는 것은 상상할수 있다. 전제를 분석하지 않는것이 귀납추리의 방법이고, 귀납추리는 필연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필연성은 연역추리에서만 나온다.

 

“우리는 전제를 포기하라는 강요를 받지않고도 그 결론이 그르다고 상상할수있다. 옳은 전제와 그른 결론이 결합될수 있다는 가능성은 귀납추리가 논리필연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귀납이 분석하지 않는 성격을 지녔다는 것은, 흄의 첫번째 기본주장이다.” (108쪽)

 

귀납은 언제나 관찰을 전제로 하기때문에 예외의 사건이 관찰되면, 귀납추리는 신뢰할수 없게 된다. 그런데도 귀납추리를 계속하는 이유는, 그것말고는 새로운 진리나 일반진리를 발견할수 없기 때문이다. 귀납추리의 결과에 대한 열려있는 자세가 무엇보다 소중하다. 진리에 도달하고 싶다면.

 

귀납추리로 진리에 도달할수 없다는 것을 흄에 의해 인정된 것인데, 그렇다면 진리는 어떻게 얻어지는가.

 

“만일 우리가 귀납을 신뢰할 만한 것이라고 가정하면, (지금까지 성공했으므로, 예외가 없었으므로) 귀납은 신뢰할만한 것이라고 증명할수 있다. 이런 추론은 순환하는 것이고, 그래서 논증은 와해된다. 귀납이 경험을 언급함으로써 정당화될 수없다는 것은 흄의 두번째 기본주장이다. 귀납추리는 정당화될수 없다. 이것이 귀납추리에 대한 흄의 비판의 결론이다.

 

(중략) 우리는 귀납이 정당화될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귀납의 원리를 의심하면 바보가 된다는 것을, 계속 귀납 추리를 사용하여 논증하고있다. 이것이 경험주의의딜레마다. ” (109쪽)

 

흄에 의해서 경험주의는, 미래를 예측할수 없거나 경험추리를 할수 없게 되었다. 오로지 관찰된 사실에만 주목해야 한다. 이것이 과연 경험주의의 몰락일까?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왔다

-> 경험에서 얻은 진술이외에 어떤 결론도 인정하지 않는다

-> 귀납추리는 분석하지 않는다

-> 순환론에 빠지기 때문에, 귀납추리는 경험과 관찰로써 정당화할수 없다

-> 귀납추리가 불가능하다면, 경험주의는 미래를 예측할수 없다

-> 경험주의는 관찰한 사실의 기술 말고는 아무것도 할수 없게 되었다

-> 미래를 예측할수 없는 경험주의는 끝이다. 지식은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경험주의는 철저한 경험주의가 되어, 분석진술이나 경험에서 얻은 진술이외에 어떤 결론도 인정하지 않든가 (이 경우 경험주의는 귀납추리를 할수 없고, 또 미래에 관한 진술을 모두 단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귀납추리를 인정해야 한다 (이 경우 귀납추리가 정당하지 않다는 경험주의를 포기하게 된다). 따라서 철저한 경험주의는 미래에 관한 지식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중략) 흄의 비판은 경험주의를 불가지론으로 이끌었다. 불가지론은 무지의 철학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무지의 철학은 내가 미래에 관해 알고있는 것은, 실은 미래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뿐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경험주의에 대한 신뢰에 물들어있긴 하지만 조금도 주저함이없이 이런 스스로를 파괴하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지성의 명철함에  대해 경탄하지 않을수 없다." (109 ~10쪽)

 

라이헨바하는 흄을 높이 평가하면서, 습관이라는 말로 귀납진리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흄의 침묵에 동조하지 않겠다고 한다. 흄이 도달하지 못한, 경험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을 제시할수 있다고 믿는듯하다.

 

기대가 된다.

 

“흄은 귀납에 의해 얻어진 신념을 습관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비판이 일으킨 결과를 완화시키려 했다. 그리고 흄의 책을 읽으면 이렇게 바꿔 부름으로써 그의 의심이 해소됐다는 인상을 받는다. (중략) 경험주의 생학에 대해 자신이 제기했던 핵심 도전을 부드러운 미소로 간단히 넘겨버리는 한 생학자의 이상한 측면을 엿볼수 있다. 우리는 흄의 침묵에 동조할수 없다.“ (110-11쪽)

 

한스는 경험이 습관이라는 흄의 말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서 흄이 부정했던, 귀납추리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답하고 싶어한다.

 

이성을 세계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는 원천이라는 이성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대해, 이성의 힘을 분석의 원리들을 확립하는 것으로 제한한 경험주의자들은, 새로운 난관에 부딪힌다. 지식이 지닌 예측의 성격을 설명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귀납은 일종의 습관이다. (중략) 어느 누가 내일부터는 물이 위로 거슬러 흐를거라는 가정에 의거해서 행동할수 있을까? (중략) 경험주의 생학자는 경험이 미래에 관한 지식을 제공할수 있는지 없는지 또는 제공할수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할수 있는지를 알려고 한다.” (111쪽)

 

여기서부터 어려워진다. 미래에 관한 지식이나 진술은 다르다. 현재나 과거의 지식이나 진술과는, 미래에 관한 진술은 다르다. 진리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미래를 예측하는 지식의 성격은 어떠한가? 

 

"어떻게 미래에 관한 지식을 가질수 있는가라고 묻는 대신에, 미래에 관한 진술이 정당하려면, 미래에 관한 지식의 성격은 어떠해야 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중략) 경험주의자는 어떻게 하면 관찰의 신뢰성을 예측의 신뢰성으로까지 이행할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부딪힌다. (그러나 / 중략) 지식에 관한 물음을, 예측하는 지식의 성격에 관한 물음으로 바꾸는 일은 세마science의 토대가 근본부터 바뀌기 전에는 이루어질수 없었다." (113~4쪽)

 

관찰결과를 가지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확률의 문제이다. 그런데, 흄을 포함한 경험주의자들은 "확률이 적용되는 곳은, 지식이 아니라 의견이나 신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115쪽) 결국 확실한 지식, 불변의 진리는 없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일까?

 

"18세기의 세마가, 자기 스스로 그동안 얻은 성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문할수 있으려면, 그 당시의 탐구방법이 지닌 한계를 알았어야 했다. 이런 발전은 19세기에 시작되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중략) 먼저 수학의 성격에 관한 생각과 인과성에 대한 생각이 수정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중략) 예측은 단지 확률인 반면에 과거의 관찰은 확실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귀납문제에 대한 최종해답이 못된다. 이런 해답은 일종의 중간 해답에 불과하다. (중략) 귀납문제에 대한 해결은 20세기 물리학에서 자라나온 지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114~6쪽)

 

제6장 고전물리학의 이중성 : 경험측면과 이성측면

 

증명되지 못한 추리들이 서로 공존했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하고 별자리의 이름을 부여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추리가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사람들은 실험을 하지 않았다. 데카르트 철학의 반대자인 가상디라는 대수도원장이 달리는 배의 돛대 꼭대기에서 돌멩이를 떨어뜨리는 실험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모스란 섬에 살았던 아리스타르코스는 기원전 200년경에 햇님중심체계를 제안했다. (중략) 프톨레마이오스는 아리스타르코스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은 논증을 폈다. 지구는 정지해 있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만일 지구가 움직인다면, 공중에서 떨어지고 있는 돌멩이는 수직으로 떨어지지 않을것이며, 또 공중에 떠있는 새는 움직이고 있는 지구의 뒤에 남게되어 지구 표면의 다른 부분에 내려앉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 17세기 가상디의 실험으로) 갈릴레오의 법칙에 따르면, 떨어지는 동멩이는 본래 배의 운동을 지니고 있어서 떨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배의 운동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118~9쪽)

 

실험의 중요성과 그리스 사람들이 실험을 하지않은 이유를 이렇게 추정한다. 경험한 것을 축적하여 일반지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수 있다. 수학과 실험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세계관이 이성주의와 경험주의를 가르고 있다.

 

“계획된 실험에 의해 사람이 만들어낸 사건을 일으켜 봄으로써 자연의 복잡한 사건을 단순한 사건들로 분석해 볼수있다. 이것이 바로 실험이 근대세마modern science의 도구가 된 이유이다. 그리스의 세마가 어떤 의미있는 방식으로도 실험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추론으로부터 경험세마로 돌아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가를 증명해 준다.

 

(중략) 그리스인들의 이성주의에는 수학에 대한 연구의 성공이 반영되어 있다. 반면에 영국 경험주의에는 근대 세마에서 실험방법 즉 자연에 질문을 던져 자연으로 하여금 '그렇다'나 '아니다'란 답을 하도록 하는 방법의 승리가 반영되어 있다.”(120~2쪽)

 

관찰과 함께 수학의 힘도 강해지면서 이성주의의 힘도 강해졌다. 뉴턴과 달리 대륙에서는 라이프니츠와 칸트에 의해 수학을 바탕으로 한 이성주의가 확대되고 있었다. 실험은 강해졌지만, 수학과 이성도 강해졌다.

 

"대륙에서는 고대 이성주의의 체계보다 방법과 설득력 면에서 더 우수한 새로운 이성주의의 체계를 건설했다.

 

이 경험주의 철학과 이성주의 철학이라는 두가지 상반된 철학 경향의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실험방법의 출현이 아무리 혁명으로 보일지라도, 실험방법은 근대세마의 두가지 주요한 도구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이다. 실험 방법 외에도 근대세마의 또하나의 도구는 세마의 설명을 정립하기 위해 수학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중략) 해왕성이란 행성이 발견된 것이다(1846년). 

 

수학의 방법은 근대 물리학에 예측력을 주었다. (중략) 근대세마의 결정론은 (운명론과는) 매우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근대세마의 결정론은 물리학에서 수학의 방법이 성공을 거둠으로써 전개된 것이다. (중략) 물리 결정론은 미래의 목적에 의한 결정론이 아니라 과거의 사실에 의한 결정론이다. (중략)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중력이론을 신봉하는 자가 아니었다. (중략) 라이프니츠는 운동이란 상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에 의거하는 공간이론을 전개했다. 라이프니츠의 공간이론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의거하고 있는 논리요소들이 예견되어 있다. (중략) 라이프니츠는 자연을 기술하는데 수학의 방법이 사용될수 있음을 알았으므로, 모든 세마가 마지막에는 수학으로 변형될수 있다고 믿었다.

 

(중략 / 예정조화설은)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사람들의 마음은 서로 작용하지 않는다. (중략 / 그런데도) 마음들이 예정된 방향으로 서로 엄격하게 일치하는 단계들을 밟으며 끊임없이 가고 (있다)." (122~30쪽)

 

콩심은데 콩난다는 인과원리를 귀납의 방법으로는 알수 없다는 주장을 이해할수가 없다. 인과원리는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서 강력하게 증명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과원리의 발견이 아니라, 개별 원인들을 발견한 것이며, 이성에 의해 인과원리는 획득되어 있다는 말인가?

 

"칸트에 의하면 인과원리는 선험종합진리이다. 칸트는 우리가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안다고 생각했다. 관찰이 하는 일은 개개의 원인을 발견하는 일뿐이다. (중략) 귀납추리는 인과원리와 같은 물리학의 일반진리를 확립하는 일에는 사용할수 없다. 물리학의 일반진리는 이성에 의해 주어진다. (중략) 칸트는 이런 논증에 의거해서 그가 귀납에 대한 흄의 비판을 극복했다고 믿었다. 경험주의자가 회의주의로 물러나면서 포기한 자리를 선험종합진리의 확실성이 차지했다. 이것이 칸트철학의 본질이다." (133쪽)

 

페루에서 황금을 찾는 사람에게 '페루에 황금이 있다'는 말은 무슨 도움이 될까? 위안은 될 것이다. 한스는 칸트의 오류를 이렇게 지적한다.

 

칸트는, '원인이 있다는 것을 가정해야 원인을 찾을수 있다'고 말했다. 페루에 황금이 있다는 것을 가정해야 황금을 찾을수 있다는 것처럼. 만일 원인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겠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되는가? 원인을 찾을수도 있고, 못찾을수도 있다. 페루에 황금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황금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페루에 황금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있을만한 곳을 찾아보는 것이 아닌가. 어떤 행동을 위해서는 논리전제가 아니라 궁금증과 탐구정신이 필요하다.

 

"모든 지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것은 의심할수 없다. 그렇다고 모든 지식이 경험에서 나오는 건 아니다. 칸트는 이런말로 '순수이성비판'을 시작한다. (중략) 칸트에 의하면 우리가 특정한 인과법칙을 발견하기를 원한다면, 인과원리가 옳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논리 전제'란 용어는 논리관계를 뜻하는 말이다. (중략) 만일 당신이 특정한 원인 예컨대 조수의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면, 당신은 원인이 있다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 그렇지않으면 원인을 기대하는 일조차 불합리할 것이라고 칸트는 주장한다.

 

이 논증은 오류다. 우리가 특정한 원인을 찾으려할때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가정할 필요가 없다." (134~5쪽)

 

아, 시원하다. 한스가 느낀 이 명쾌함을 나도 느낄수 있을지 자신할수 없으나, 최대한 가까이 가보려고 한다. 확실한 것을 추구해서는 안되지만, 현재 수준에서 확실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구분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어떤 과제를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지를 알수 있기 때문이다.

 

연역은, 전제를 분석하는 공허한 필연이다.

귀납은,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가지만 오류를 극복할수 없다.

 

"고전물리학은 연역추리와 귀납추리를 가지고 복잡한 그물망을 만들어 예측방법을 고도로 효율높게 발전시켰다. 그러나 물리학자건 생학자건 미래를 예측하는데 사용되는 이 방법을 어떤 근거에서 신뢰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제시할수는 없었다.

 

18세기 말엽에 물리학에 관한 생학은 궁지에 빠졌다. 사람의 정신이 창조한 지식의 전체계는 이해할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었다. 경험주의자인 흄은 이점을 솔직하게 시인했는데, 이점에서 흄의 주장은 물리학의 토대가 이성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이성주의자인 칸트의 주장보다 우월한 것같다.

 

물리학자들 자신은 이런 생학의 궁지를 깨닫지 못했다. 물리학자들은 관찰하는 일과 이론을 구성하는 일을 계속했고 또 성공의 행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마침내는 물리학자들도 역시 궁지에 빠졌다. 이런 물리학의 궁지에서 새로운 물리학이 솟아나왔다. 이런 과정에서 생학의 궁지도 역시 극복되었다." (137쪽)

 

제2부 새로운 철학의 성과

 

제7장 새로운 철학의 기원

 

한스는 선언해버린다. 모든 물음들에 대해 답하기에 충분한 전문지식이 갖춰졌다고.

 

진리는 귀납지식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진리는 연역분석과 관찰에 의해 논리가 완벽해진다. 세마의 전문연구가 발전하면, 진리도 발전한다.

 

"진리는 논리분석을 필요로 한다. 사변철학의 역사는 답할수 없는 물음을 제기했던 사람들이 범한 오류의 역사이다. (중략) 상상에 호소하는 은유나 그림언어로 기술함으로써 해결되는게 아니고, 전문연구에 의해 해결된다. (중략) 생학체계는 세마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했다. 문제들을 논리의 측면에서 발전시키는 일은 세마학자의 일이다. (중략) 마침내 전문지식은 생학의 물음들에 답하기에 충분할만큼 완전해졌다." (141쪽)

 

홀사person보다 뛰어난 거대한 무리, 무리의 세마역량이 새로운 생학의 시대를 연다. 질문을 바꾸고, 수학을 비롯한 높은 추상사고 능력을 도구로 해서, 답해야 할것에 답한다. 그게 뭔지 궁금하다.

 

"역사에 나타난 어떤 문명도 그 문명을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 그처럼 격렬한 지성훈련을 요구한적이 없었다. 19세기의 생학philosophy은 그러한 추상사고력의 산물이다. 그것은 그림언어로 말하고 탐미욕구에 호소하는 체계를 세워 설득하는 해결책을 제공하지 않는다.

 

19세기의 생학은 추상사고 훈련이 되어있는 사람만이 이해할수 있는 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생학도가 모든 문제를 기사의 정밀성과 수학자의 엄밀성을 가지고 연구할것을 요구한다. (중략) 물음을 일단 대답가능한 물음이 되도록 바꿔야만 했다.

 

(중략) 생학체계는 칸트에서 끝났고, 그후의 생학체계를 칸트나 플라톤의 체계와 같은 수준에서 논의하는 것은 생학사에 대한 오해이다.

 

(중략) 우리 세대에 와서야 비로소 새로운 부류의 생학자, 즉 수학을 포함한 세마의 전문기술을 습득하고 생학의 분석에 관심을 집중한 생학자들이 생겨났다. (중략) 학문으로서의 생학을 하는 전문생학자는 이런 발전의 소산이다." (145~7쪽)

 

제8장 기하학의 성격

 

시간과 거리의 상대성과 베타붕괴를 일으키는 양성자의 충돌을 받아들이려면, 고전물리학의 법칙에서 벗어나야한다. 고전물리학도 모르니 현대물리학을 알턱이 없다. 백지상태이니 오히려 경계를 넘기가 쉬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모르는 상태에서 무엇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멍해질 것이다. 8장을 읽고나니 내가 지금 그렇다.

 

"세마science의 발전에 힘입어 온갖 절대진리와 선입견을 버리게 되었다. (중략) 고전물리학의 중요한 법칙은 단지 우리의 일상환경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에만 적용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고전물리학의 법칙은 천문학의 차원과 미시차원 둘다에서 새로운 물리학법칙으로 대체되어야 했다. (중략) 물리학의 법칙은 경험법칙이지 이성이 우리에게 강요한 (선험종합)법칙이 아니라는게 명백해졌다." (148쪽)

 

이해가 되는것 하나에 또하나의 이해가 되는것을 보태가는 방식으로 나아갈수밖에 없다. 모르는것은 뛰어넘겠지만, 이해하기위해 거듭거듭 노력은 할것이다. 아주 조금만이라도 알고 싶다. 명백한 유클리드 체계의 공리들이 어떤 조건에서는 무너진다는 이야기다.

 

공리와 정리의 관계. 공리는, 너무나 명백해서 증명이 필요없는 사실(절대명제). 정리는, 공리에 의해서 연역된 사실. 공리는 명백하게 참이다.

 

"유클리드 체계의 공리들은 너무나 당연하고 명백한 것으로 여겨져, 그 공리들이 옳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것처럼 보였다. (중략) 유클리드보다 한세대 앞서 살았던 플라톤은 기하학의 원리들이 지닌 명백한 자명성에 힘입어 이데아설을 주장했다. (중략) 칸트의 이론에 따르면 공리들은 선험종합진리이다." (149쪽)

 

유클리드(B.C 325?~365?)는 '원론'에서 수학의 공리주의 방법을 최초로 도입하여, 5개의 공리와 5개의 공준으로 465개의 명제를 증명하였다. 그 공리와 공준은 다음과 같다. 

 

공리 1. 같은 것과 같은 것들은 또한 서로 같다. a=b, b=c ->  c=a

공리 2. 같은 것에 같은 것을 더하면, 그 전체는 서로 같다. a = b -> a+c = b+c

공리 3. 같은 것에서 같은 것을 빼면, 그 나머지는 서로 같다. a = b -> a-c = b-c 

공리 4. 서로 겹치는 둘은 서로 같다. a ≡ b -> a = b

공리 5.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 a ⊂ b -> a < b

 

공준 1. 임의의 점으로부터 임의의 점으로 직선을 그릴 수 있다. 두개의 점을 연결한 것이 직선

공준 2. 유한의 직선을 계속 직선으로 연장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선분은 직선으로 확장할수 있다.

공준 3. 임의의 중심과 거리를 가지고 한 원을 그리는 일을 할 수 있다. 중심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 원.

공준 4. 모든 직각은 서로 같다. 직각은 90도다.

공준 5. 하나의 직선이 두 직선과 만나서 같은 쪽에 두 직각보다 작은 안각을 만들 때,

            이 두 직선은 그것들을 한없이 연장하면 두 직각보다 작은 각이 만들어지는 쪽에서 만난다(평행선공리)

 

평행선공리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싫어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뭔가 길고 복잡하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않는다. 한눈에 의미가 들어오지않고 여러번 읽어야한다. 그런것들이 싫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결국 2천년후에 비유클리드기하학을 만들어냈다. 놀라운 일이다. 삼각형의 세각의 합이 180도가 아니라니 말이다. 그런데, 평행선 공리를 없앤것이 아니고, 새로운 공리를 만들어냈다.

 

1) 유클리드기하학 : 평행선은 하나

2) 비유클리드기하학 : 평행선은 하나 이상이다 : 볼리아이, 가우스, 로바체프스키 (쌍곡선 기하학)

3) 비유클리드기하학 : 평행선은 없다 : 리만(가우스의 제자, 구면기하학)

 

"수학자들은 약간의 공리를 다른공리에서 연역해낼수 있다는것을 밝힘으로써 공리들의 수를 최소한으로 줄여보려고 했다. 수학자들은 특히 평행선 공리를 싫어했고, 그래서 평행선공리를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중략) 비유클리드기하학은 유클리드기하학과 모순을 일으킨다. 예컨대 비유클리드기하학에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비유클리드기하학들 각각에서는 모순이  일어나지 않는다. 비유클리드기하학은 유클리드기하학이 정합체계인 것과 동일한 의미로 정합체계이다. 이리하여 다수의 비유클리드기하학이 오직 하나의 유클리드기하학 대신에 대체되었다." (150~1쪽)

 

한스는 칸트생학 즉 이성주의의 마루는 칸트인데, 바로 이런 생각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수학의 기하학과 물리세계의 기하학은 일치하는가? 칸트시대까지는 일치했었는데, 볼리아이와 리만에 의해 깨졌다는 것이다.

 

서로 모순되는 여러개의 기하학이 나왔으니, 이성은 각각의 기하학이 정합체계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심판의 자격이 없어져버렸다. 누군가 판정을 내려야하는데, 그것은 바로 세계에 대한 관찰일수밖에 없다.  

 

"수학의 기하학과 물리세계의 기하학이 일치한다는데 대해선 설명이 필요하다. 칸트가 다른사람보다 이점을 더 강조했다는 사실은 칸트생학의 장점이라 하겠다. 선험종합진리에 관한 칸트의 이론은 이런 일치를 설명하려는 한 생학자의 위대한 시도라고 생각해야한다.

 

하지만 다수의 기하학이 발견됨으로써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만일 수학자가 여러 기하학중에서 하나만 선택해 보라는 제안을 받는다면, 그 여러 기하학중에서 어떤것이 물리세계에 관한 기하학인가라는 물음이 발생한다. 이성이 이물음에 대답할수 없다는건 분명하다. 다시말해서 그대답은 경험관찰에 맡겨야한다.

 

이런 결론을 맨처음 제시한 사람은 가우스였다. (중략) 관찰한 내각의 합이 180도와 편차가 생기더라도, 관찰에서 생길수밖에 없는 오차로 인해서 편차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세계가 비유클리드의 공간이라 할지라도, 세계는 유클리드기하학과 거의같은 비유클리드기하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 즉 양자간의 구별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가우스의 결론이었다." (152쪽)

 

기하학들이 모두 세계를 설명하는데 성공한다면, 기하학으로 표현된 세계가, 물리세계의 본질이 아니라 사람마다 임의로 설정한 틀이라고 주장할수 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수가 없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설명할수 있으니, 모두가 인정하는 설명이 나오지 못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넘어간다.

 

"만일 모든 기하학이 물리세계에 적용될수 있다면, 기하학은 물리세계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사람이라는 관찰자가 자신의 지각대상들 사이의 질서를 확립하기위해 스스로 구성해 놓은것에 지나지않는 것처럼 보인다.

 

(중략 / 신칸트학파와) 프랑스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Henri Poincare)에 의해 소개된 약정주의 (conventionalism)라 불리는 생학이론에 이용되었다. 푸앵카레에 따르면, 기하학의 문제는 약정의 문제이며, 물리세계에 관한 기하학을 기술할 목적으로 쓰여진 진술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156~7쪽)

 

그렇다. 마음대로 이생각 저생각을 가져다쓰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시공간에 어울리는 기하학을 가져다쓰는 것이 세계를 설명하는 방법이 될수있다. 하나의 체계로 세계를 전부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다면, 영역을 나누어 설명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개개의 모든 기하학체계는 물리세계의 구조를 기술하는데 사용될수 있다. 하지만 단 하나밖에 없다고 인정받은 기하학 체계는 물리세계의 구조를 완전하게 기술하지 못한다.

 

(중략) 아인슈타인은 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의거해서 천문학 차원에서 자연기하학이 비유클리드기하학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지구차원의 기하학이 유클리드의 기하학이라는 가우스의 측정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157~161쪽)

 

중력에 의해 시공간이 휘게 되면, 특히 별근처의 공간이 더많이 휘게되면, 유클리드기하학의 측정결과는 비유클리드기하학의 측정결과와 편차가 커지게 된다. 이때 따라야할 기하학체계는 어쩔수 없이 비유클리드기하학이다. 즉, 한울universe을 이해하려면 비유클리드기하학 체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아인슈타인의 생각에 따르면, 유클리드기하학과 편차가 생기는 원인은 별의 중량에 의해 생기는 중력에서 발견할수 있다. 어떤별 근처에서의 편차는 별과별사이의 공간에서 보다 더 크다. 이리하여 아인슈타인은 기하학과 중력사이의 관계를 확립했다. 전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런 놀라운 발견은 일식동안에 행해진 측정에 의해 확인되었고, 물리공간이 지닌 성격을 새로이 증명하였다." (162쪽)

 

결국 세계를 설명하는 것은, 관찰과 경험에 의한 귀납에 의해 가능하다는 한스의 주장이, 아인슈타인의 중력장방정식에 의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 아리스를 거쳐 칸트에까지 이른 이성주의자들의, 선험종합지식 중 대표인 수학(기하학)이, 경험지식이라는 것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칸트철학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아주 이상하게도 현대수학과 현대물리학에 이르기까지의 긴역사노선은 마침내 그것의 시초에 주장되었던 입장으로 되돌아간다. 기하학은 이집트인들에 의해 경험세마로서 시작되었는데, 그리스인들에 의해 연역세마로 만들어졌고, 결국최고로 완벽한 논리분석에 의해 다수의 기하학이 개발된 후에 다시 경험세마로 되돌아갔다. 다수의 기하학중 오직 하나만이 물리세계에 관한 기하학이다.

 

(중략) 기하학은 물리세계에 대해 기술하는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 하지만 이런 의미에서의 기하학은 선험의 성격을 지닌것이 아니라 경험의 성격을 지닌 것이다. 선험종합지식의 기하학은 없다." (163쪽)

 

한스는, 칸트가 종합한 이성주의생학의 종언을 선언해버린다. 물론 여기서 끝내지않고 새로운 세마에 기반한 생학을 보여주겠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생학은 발달과정에서 기하학의 발달에 의해 크게 영향받아왔다. 플라톤에서 칸트까지의 생학이성주의는 모든 지식이 기하학을 본보기로 삼아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성주의생학자는 2000년 이상 동안 의심 받지 않(았는데 / 중략) 그러나 비유클리드기하학이 발견됨으로써 상황은 역전되었다.

 

(중략) 수학자는 더이상 공리가 진리라고 주장할 자격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학자는 그런 주장을 물리학자에게 넘겨줬다. (중략) 이성주의생학자는 그의 가장 강력한 동맹자를 잃어버렸고, 길은 경험주의를 위해 열리게 된 것이다.

 

(중략 / 이 체계가 유클리드의 시대에 발견되었더라면) 중세는 신학과 야합할수 있는 정합이성주의를 발견하지 못했을것이고, 또 그들은 실증경험주의를 가르칠 용기를 가졌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기하학의 방법을 본떠 전개한 윤리학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쓰지 않았을것이다." (165~6쪽)

 

진리를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오류를 극복할수 없었다. 비유클리드기하학이 100년동안 가르쳐졌어도 여전히 플라톤과 칸트가 진리의 기준이 되고 있다. 확실하고 완전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조각진리는 불안하다. 그래도 진리를 향하는 발걸음이 꾸준히 늘어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것이 역사를 앞으로 조금씩 밀고 나간다.

 

"진리는 오류를 축출하기에 충분한 무기가 못된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진리를 지성으로 인정한다고 해서 정서밑바닥에 깔려있는 확실성을 추구하고 싶어하는 욕구에 저항할 힘이 사람의 정신에 언제나 생기는 것은아니다.

 

그러나 진리는 강력한 무기이고, 그래서 그시대의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언제나 진리의 추종자였다." (167쪽)

 

제9장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몹시 기대가 된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분명한 통찰이 있을까? 시간은 정확한 시계로 측정하는 것이다. 아래와 같은 서술은, 시간의 성격을, 물리세계와 시세계를 결합시켜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런 설명만으로도 실제 물리세계의 분석과 예측이 모두 가능하다. 그렇다면 시간은 만족스러운 물리량인가.

 

"우리는 언제나 영원한 현재에 머물러있다. 우리는 이 흐름을 중지시킬수도 없고 역류시켜 과거를 되돌아오게 할수도 없다. 이흐름은 우리를 냉혹하게 실어나르고, 우리에게 지연을 허락치 않는다.

 

시간에 대한 이런 심리의 기술을 수학방정식이라는 언어로 바꾸려는 수학자는 자신이 쉽지 않은 문제에 부딪혀 있음을 깨닫게 된다." (168쪽)

 

시간은 물리구조이다.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쌓여있는 물리구조이다. 공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도 시간이 쌓인다. 그러므로 시공간이다. 이것을 특수하다고 해야할까? 빛은 차폐할수 있다. 빛의 속도는 유한하여 1년을 날아가도 10조km를 날아가지 못한다. 신기하지 않은가. 그러나 시간은 모든 공간에 균일하게 쌓여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균일한지 어떤지도 모르지만, 시간은 지연없이 골고루 한울 구석구석가지 쌓이며 흐른다.

 

"수학자가 제일 먼저 관심을 갖는것은 시간의 측정표준이다. (중략 / 시간은 균일하게 흐른다) 시간이 균일하다는 것은 측정표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우리가 표준시계로 사용하고 있는것은 자전하고 있는 지구이다. 자전하고 있는 지구가 신뢰할만한 시계라는것 즉 자전하고 있는 지구가 정확하게 균일한 시간을 표시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중략 / 지구의 자전으로 시간의 균일성을 말하려하면 균일함을 유지하기 어렵다) 햇님주위를 공전하는 지구의 궤도가 타원형이기 때문이다.

 

(중략 / 항성시간도 세차운동으로 인해 균일할수 없다) 그러므로 천문학자가 균일한 시간이라고 하는것은 직접 관찰될 수 없는 어떤것이다." (169~70쪽)

 

시간은 시계로 측정하며 모든 공간에 두루두루 쌓이고(이런 서술은 그림언어이면서, 시간에 대한 시다), 지연이 없는 물리구조다. 만일 시간이 균일하게 흐른다면 표준시계를 만들어서 측정하는 일이 가능하다. 시간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은 이제 끝났고, 수학과 물리학에서 필요한 표준시간을 정하는 것이 첫번째 과제다.

 

시간이라는 물리량은 시계로 측정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시간의 균일성도 천문학의 시간을 균일하다고 정의해야 한다. 그래야 수학과 물리학을 전개해나갈수 있다. 이것은 정의의 문제이므로 물리세계와 맞지않으면, 고쳐나가면 된다.

 

"다시말해서 천문학자는 균일한 시간을 수학방정식이라는 수단을 사용해 계산해 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수학방정식을 사용해 계산한 결과는, 관찰된 수치에다 천문학자가 수정을 가하는 식으로 결정될 것이다. 그렇다면 균일한 시간이란 천문학자가 수학방정식과 관찰자료를 이용해 만들어놓은 시간흐름이다.

 

(중략) 균일한 시간을 알기 위해선 역학법칙을 알아야 하고, 역학법칙을 알기 위해선 균일한 시간을 알아야한다. (중략) 이런 종류의 순환을 피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균일한 시간의 문제를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이다. (중략)  실제로 균일한 시간이란 없다. 다시말해서 천문학의 시간이 균일한 시간을 정의한다고 말해야한다." (170~1쪽)

 

시간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단순하게 정의했다. 공간은 눈에 보이는 3차원 공간이므로 이해하기가 쉬웠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을 측정하는 도구를, 같은 방식으로 정의해야 한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공간은 자로 재고, 시간은 시계로 잰다. 시간의 표준은 천문학의 시간이다. 공간을 재는 자의 표준은 무엇인가? 빛이 이동한 거리인가? 그렇다, 결국 정의의 문제이고, 정의한 것은 수학식이든 관측이든 실제세계에서 수정되어야 한다. 그렇게 정의한 표준시간과 표준길이를 가지고 수학과 물리에 쓰면된다.

 

"시간의 측정표준을 만들기 위해 육안으로 보이는 별들의 자전을 이용하는 대신에 자전하는 원자나 이동하는 빛과 같은 다른 자연시계를 이용할수도 있다. 이모든 시간의 측정표준이 일치하느냐는, 사실의 문제다. 균일성에 대한 천문학의 정의가 실제의의를 갖는것은 이때문이다. 천문학이 제공하는 균일성에 대한 정의는, 모든 자연시계에 의해 제공되는 균일성에 대한 정의와 동일하다. 따라서 자연시계가 시간의 측정표준에 대해서 하는 역할은, 측정자가 공간의 측정표준에 대해서 하는 역할과 비슷하다." (171쪽)

 

현재를 기준으로 이미 일어난 일이 있고, 아직 일어나지않은 일이 있다. 그런데, 시간의 순서가 왜 두번째 문제인가? 당연히 관찰될수 있거나 추론할수 있는 문제아닌가? 물론 시간순서를 제대로 정열하지 않으면, 원인과 결과를 뒤집을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다른쪽으로 흘러간다.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는 기준을 만들어서 시간의 순서를 확인하려는 모양이다. 원인과 결과를 과연 구별할수 있을까? 

 

"두번째 문제는 시간의 질서에 관한 문제다. (중략) 시간질서를 판단하는 방법을 간략하게 개관해보면, 시간순서에 관한 하나의 근본기준이, 원인이 결과보다 선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근본기준이, 언제나 요구된다는 것을 알수있다. (중략)  시간질서의 관계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 (중략) 인과관계는 같은 유형의 사건이 반복해서 일어나는지 시험해 봄으로써 증명된다.

 

(중략) 시간질서를 인과질서에 의해 정의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질서와는 무관하게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는 기준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172~3쪽)

 

혼합과 불이라는 현상을 되돌릴 수는 없고, 어떤 상태가 이전 상태인지도 분명하다. 그래서 시간의 순서를 알고, 원인과 결과를 알수 있다. 여기까지는 어려움이 없다.

 

"두사건이 인과관계에 있는 간단한 실례를 연구해보면, 원인과 결과를 명료하게 구별지어 주는 자연과정이 있다는 것을알 수있다. 이런 종류의 자연과정에는 질서상태에서 무질서상태에로 진행하는 혼합과정과 같은 것이 있다. 물리학자는 이런 과정을 비가역과정이라 한다.

 

(중략) 인과관계가 물리사건들의 순서를 확립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가 지닌 근본특징들 중의 하나다. (중략) 더 나아가 (시간이라 불리는) 연속관계에 의해 정합 질서를 갖는 세계라는 것은 경험 사실이다. 시간질서에는 커미의 인과질서가 반영되어 있다" (173~4쪽)

 

* 커미 = 한울 = 커다란 미리내 = universe = cosmos

 

동시성은, 동시에 일어나서 동시성이 아니고, 두사건이 먼저 일어난 것도 아니고 나중에 일어난 것도 아닐때, 동시에 일어났다고 정의한다. 재미있는 생각이다. 그런데 왜 이런 생각을 해야했을까? 우리는 그저 시간의 순서가, 그래서 인과관계가 궁금한 것이다. 일단 비슷한 시기에 다른 장소에서 일어난 일은 인과관계가 없다. 그 두 사건은 동시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동시성을 정의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넘어간다.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이것이다. 최대속도가 빛의속도로 제한되어 있어서 애매함이 없이는 동시성을 정의할수 없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빛보다 빠른 속도가 있을수 없으므로 빛의 속도를 비교해서 측정할수가 없다는 말인 모양이다. 소리의 속도는 빛의 속도와 비교해서 잴수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즉, 빛의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거나, 빛의 속도가 초속 30만km라서, 빛의 속도를 잴때 애매해지는 것이 아니라, 빛의 속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가 없어서 정확한 비교측정이 불가능하다는 소리인 모양이다. 그러므로 애매한 측정도구를 이용해서 잴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시간 순서에 대한 정의는 동시성에 대한 정의와 한 짝을 이룬다. 두사건이 서로 먼저 일어난 것도 아니고, 나중에 일어난 것도 아니라면, 두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고 해야한다. 떨어져있는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비교될때, 동시성에 관한 문제는 특이한 결과를 낳는다. 이문제는 아인슈타인의 분석에 의해 유명해졌다.

 

(중략)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빛보다 더 빠른 신호는 있을수 없다. 이말은 빛보다 빠른 신호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만을 의미하는게 아니다.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빛이 가장빠른 신호라는 것은 자연법칙이고, 또 이것이 광속의 극한성 원리라고 부를 수있는것이다.

 

(중략) 우리가 살고 있는 상대론의 세계는 인과를 파악하는 전달의 최고속도가 제한되어 있어서 동시성을 애매함이 없이는 정의할수 없다." (174~9쪽)

 

이틀을 생각했더니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빛의 속도를 제대로 측정하지 못한다면, 빛이 등속운동을 하는지 등가속도 운동을 하는지, 등감속도 운동을 하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이해했다.

 

"빛이 거울을 향하여 갈때의 속도와 반사되어 되돌아올 때의 속도가 동일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175쪽)

 

먼거리를 이동한 시계는 느리다

-> 먼거리를 이동한 원자는 느리다

-> 사룸체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 그러므로 먼거리를 이동한 사룸체의 노화는 느리다

 

"(빛의 이동시간을 하나의 시계로 재기 위해 운반되었던 시계에 대하여)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왕복을 마친 시계는, 움직이지 않고 처음장소에 계속 있었던 시계에 비해 느리다는 것이다. 이결과는 중요한 논리 귀결을 낳는다. 이결과는, 모든 종류의 시계뿐만이 아니라 원자에도 적용된다. 원자는 원자자체내에서 방출되는 복사광선의 색깔로 원자의 회전주기를 표시한다. 급속도로 움직이는 원자에 대한 실험은 아인슈타인이 예측했던 회전의 지연을 확증했다. 생물체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원자단위 사건에서의 모든 지연은 그 생물체가 지배받고 있는 노화과정의 지연으로 나타나야 한다." (176~7쪽)

 

1) 빛이 화성에 도착한 것과 동시에 일어난 사건은 무엇인가?

     즉, 빛이 화성에 도착한 것과 동시성을 갖춘 사건은 무엇인가?

 

2) 12시에 발사된 빛이 화성에 반사되어 돌아온 시간은 12시 20분이다.

 

3) 그러므로 동시에 일어난 사건은, 12시에서 12시 20분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다.

 

4) 11시 59분에 일어난 사건은, 빛을 쏜다는 원인이 아직 발생하지 않은 시간이어서,

     즉, 빛이 아직 쏘여지지도 않아서 동시성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5) 12시 21분에 벌어진 사건은, 화성에서 이미 다시 출발한 빛이 지구에 도착한 시간이 20분이므로,

     화성에 빛이 도착한 시간 이후에 일어난 사건임이 명백하므로, 동시성을 갖춘 사건이 아니다.

 

6) 12시 ~ 12시20분 사이에 벌어진 사건들만이 애매하지만,

    화성에 빛이 도착한 사건과 동시에 벌어진 사건이다.

    즉, 동시성의 사건은 정확히 그 시간에 벌어진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빛신호를 12시 정각에 화성으로 보내, 그것이 화성으로부터 반사되어 20분후에 되돌아 올거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빛신호가 화성에 도착한 순간은 몇시라고 해야할까? 빛신호가 화성에 도착한 시각을 12시10분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빛이 가는속도와 돌아오는 속도가 같다고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빛이 가는 속도와 돌아오는 속도가 같다고 가정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안다.

 

사실 12시와 12시20분 사이의 어느 시각이든 빛신호가 화성에 도착한 순간이라고 정할수있다. 예를 들어 빛신호가 12시 5분에 화성에 도착했다고 말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빛이 가는데는 5분, 돌아오는데는 15분 걸린 셈이다. 시간 순서에 대한 정의가 배제하는 것은 빛이 화성에 11시 55분에 도착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빛신호가 11시 55분에 화성에 도착했다고 하면, 빛신호는 출발시각보다 앞서 도착한 것이고, 그러면 결과가 원인보다 먼저 일어난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빛신호가 화성에 도착한 시각을 12시와 12시20분 사이에서 잡는한,  시간 질서에 대한 정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시간 사이에 우리가 위치하고 있는곳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도 빛신호의 도착시간에 일어난 화성에서의 사건과 인과상호작용을 할수없다.

 

왜냐하면 동시성이란 인과의 상호작용 가능성을 배제함을 뜻하고, 우리가 있는 곳에서 이시간 사이에 일어난 사건은 모두 빛신호의 화성도착과 동시라고 할수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이 동시성의 상대성이라 부른것이다." (178쪽)

 

공간은 3차원의 유클리드 공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나 타원, 쌍곡선과 같은 공간이 실제로 존재한다. 시간도 질서를 가지고 있는데, 실제세계의 시간은 우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시간과 다르게 흘러간다. 다른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공간이 물리학자에 의해 정의되는 것처럼 시간도 결국 물리학자에 의해 정의되고 수정될 것이다. 일단 이렇게 이해하고 넘어가야겠다.

 

단순한 이야기를 어렵게 하는 것도 같고, 물론 기존의 시간 관념과 뭔가 다르고, 시간 흐름의 결과물도 달라서 독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머리가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하지않고, 무언가를 건너뛰어서 결과만을 외웠을수도 있다.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은 통찰행위에 의해 지각한 플라톤의 이상실존물이 아니다. 또한 시간은 칸트가 믿었던 것처럼 사람이라는 관찰자가 세계에 부여한 주관질서의 형식도 아니다. 사람의 정신은 시간질서에 관한 여러체계를 고안해 낼수있다. 고전의 시간은 이런 여러 체계중의 하나이고, 인과의 전달속도가 제한되어 있는 아인슈타인의 시간은 또다른 하나의 체계이다. 이런 여러 가능한 체계중에서 이세계에 합당한 시간질서를 선택하는 일은 경험의 문제이다. 시간질서는 우리가 살고있는 우주의 일반속성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시간이 실제라고 말하는 것은 공간이 실제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다. 그리고 시간에 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은, 선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찰의 결과로 이루어진다. 시간의 실제 구조를 결정하는 일은 물리학의 일이다. 이것이 시간에 관한 철학의 결론이다." (179쪽)

 

제10장 자연법칙

 

뉴턴역학은,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한울universe이 운행하고 있다고 증명해냄으로써 결정론 생학의 시대를 열었다. 마치 기하학의 자명한 원리들처럼, 커미universe는 중력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이것이 결정론이며 인과론이다.

 

"뉴턴역학이 생학체계들에 끼친 영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선험종합지식 개념의 뿌리가 물리세계를 결정론으로 해석하는데 있음을 명백히했다. 한시대의 물리학은 그시대의 지식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므로, 인과개념이 19세기와 20세기의 물리학에서 어떻게 발전했는가, 어떻게 자연법칙에 대한 생각이 수정되고 인과개념에 대한 새로운 생학으로 마무리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81쪽)

 

세계 또는 사건에 대한 설명은 일반화이고, 일반화는 인과관계를 밝히는 일이다. 언제나 반복되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진다. 예외가 없다. 그러면 우연한 사건과는 달리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은, 필연의 사건이 된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생각은 농업사회에서도 이미 발달해 있었다. 굳이 뉴턴의 물리학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다만, 뉴턴의 역학을 받아들인다면, 신과 미신이 들어설 자리가 거의 없어지는, 이성과 논리의 시대가 열린다고 해야할 것이다.

 

"설명은 일반화다. 설명은 결국 원인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인과관계 역시 일반화라고 해석할수 있다. (중략) 세마학자scientist는 인과법칙을 동일한 관계가 언제나 성립한다는 조건 아래서 " 만일 ~라면 (언제나) ~이다"라는 형식을 지닌 관계로 이해한다. (중략) 인과법칙과 단순한 우연의 일치를 구별할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반복밖에 없으므로, 인과관계의 의미는 예외없는 반복을 주장하는 진술로 표현된다." (181~2쪽)

 

피라미드를 보지 못해서 알수 없지만, 
피라미드를 보고 감동을 느끼는 것은 
압도되었기 때문이리라. 

사람은 압도되어야 
숭고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은 
사람의 생각과 경험을 넘어서는 
거대함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다. 

세상의 법칙조차 그러하다. 
사람이 만들어낸 법칙보다 
더 많은 범위에서 적용할수 있는 자연법칙이 
더 우월하고 숭고해 보이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도 
다른 어떤 사랑과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사룸life을 희생하면서까지 
행동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숭고하다.

그런 어머니들이 자꾸만 
우리들 곁을 떠나고 계신다.

그곳에서는 더 사랑받으시기를 -

 

"자연법칙이 더 우월한 것은 단지 자연법칙의 일반성이 전기규칙 등 단순한 규칙보다 더 크다는데에 있다. 자연법칙은 아주 많은 종류의 현상들에 적용될 수 있는 관계를 명확하게 개진하고 있다" (182쪽)

 

평균은 확률이며 통계이다. 그렇지? 에너지보존법칙은 덧셈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평균을 따르므로(?) 확률과 통계다. 분자들의 평균속도로 열에너지의 균형을 맞춘다. 평균속도라는 말은, 모든 분자의 운동속도가 같다는 것이 아니라, 빠른 것과 느린것,  그것들을 종합하여 계산한 평균이 있다는 말이다. 개별분자의 속도를 일일이 측정할수는 없다.

 

틀렸다. 열의 이동이 일어나는 확률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해야 한다. 운동속도가 빠른 분자가, 느린 분자를 만났을때, 운동에너지를 가져올 확률보다 빼앗길 확률이 더 크다는 이야기다.

 

큰 것을 중심으로 작은 것이 돈다.

크고 무거운 것의 질량때문에 만들어진 시공간의 휘어짐 때문에 직선운동을 하려는 관성이 원운동으로 바뀐다.

 

큰 열량은 작은 열량과 에너지를 나눈다.

 

S ≤ Smax - Δs

 

현 상태의 열량 S가, 최대상태의 열량을 가진 Smax에서, 나누어준 열량 Δs를 고려해도, 더 낮은 상태의 열량을 가질수 있다.

 

왜 작은 열량이 큰 열량으로 빨려들어가지 않을까?

확률이 낮다.

관찰과 경험으로 얻어진 귀납법칙이니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왜 부자는 점점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질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높은 이자율이 적용되고, 빌릴수 있는 돈도 적다.

부자들은 낮은 이자율이 적용되고, 빌릴수 있는 돈도 많다.

그런 제도 때문이며, 자연법칙에 위배된다.

자연법칙에 위배된 경제계는 붕괴되거나 불안정하여, 끊임없이 동요한다.

놀라운 것은, 사람은 불안정한 경제계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지 않고,

홀로 안전과 경호체계를 갖추려고 한다.

 

생학자 한스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서 자연법칙도 확률이고, 인과법칙이 무엇인지 더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짜릿하다. 내가 생각할수 없었던 다음 단계, 더 깊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이다.

 

"열에너지는 오직 한쪽방향으로만 이동한다는 사실을 에너지보존법칙과는 독립된 법칙으로 명확하게 개진되지 않으면 안된다. (중략) 비가역원리가 통계개념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비엔나의 물리학자 볼츠만(Botamanm)이다. 물체의 열량은 그 물체속의 분자들의 운동에 의해 주어진다. 다시말해서 분자들의 평균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온도는 높아진다.

 

이진술은 오직 분자들의 평균속도만 언급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개개의 분자들은 매우 다른 속도를 가지고 있을수도 있다. 뜨거운 물체가 찬 물체와 접촉하면, 두물체의 분자들은 충돌할 것이다. 빠른분자와 부딪친 느린분자는 속도를 완전히 상실하고, 빠른분자는 속도가 더욱 빨라지는 경우가 일어날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경우는 예외다. 다시말해서 분자들의 속도는 평균으로는 충돌로인해 동등해질 것이다.

 

열이동과정이 반대방향으로 진행될 확률은 낮기 때문에, 비가역성 법칙에 대하여 통계해석을 할때 나타나는 실제 결과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이론에 따르는 결과는 대단히 중요하다. 전에는 엄밀한 자연법칙이었던 것이 단지 통계 법칙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자연법칙의 확실성은 고도의 확률성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런 결과로 인해 인과관계에 관한 이론은 인과관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하게 되었다. 모든 자연법칙이 통계법칙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의문이 생겨났고, 그렇다면 엄밀한 인과법칙이란게 도대체 있는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184~6쪽)

 

신선이나 신이 아니고서는 분자운동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전부 동시에 관측할수 없다. 그러므로 인과법칙은 확률로 이해해야한다는 첫번째 견해. 그럴듯하다.

 

두번째 견해는, 관련된 인과요소의 수가 엄청나게 많아서 실제로는 통계법칙인 것을, 거시세계를 이상화하여, 완벽하고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 인과법칙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확률을, 인과법칙으로 오해하거나 떠받든다.

 

미시세계의 인과법칙을 전부 관측할수 없으니 확률로 이해하자는 주장과
미시세계는 원래 확률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주장,

이 두개의 주장이 대립한다.

 

결론은 뭘까? 원래 확률법칙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편안하다. 미시세계가 반영된 거시세계의 현상에 대해 인과법칙이라는 오해만 걷어내면, 두 세계 모두를 이해하게 되는 장점이 있다. 확실해진다.

 

"(첫번째) 견해는 인과관계를 사람의 지식으로 획득될수 없는것이라고 여길뿐이다. 사람의 지식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확률 법칙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중략 / 두번째 견해는) 우리가 인과의 자연법칙이라고 하는 것이 수많은 원자사건의 소산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엄밀한 인과개념은 우리가 살고있는 거시세계의 규칙성을 이상화시킨 것이라고 생각하는게 좋다고 본다. 다시말해서 인과개념은 관련된 요소과정의 수가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실제로는 통계법칙인 것을 엄밀한 법칙이라고 간주한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엄밀한 인과개념을 미시영역에까지 적용시킬 자격이 우리에겐 없다. " (186~7쪽)

 

답은 맞았는데 이유는 틀렸다. 한스는 불확정성의 원리 때문에 미시세계는 확률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인과법칙이 확률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확률은 도대체 어떻게 작동하는가? 확률을 가지고 무엇을 할수 있는가?

 

"우리는 현대의 양자역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개개의 원자사건이, 인과개념에 의해 설명될수는 없고, 단지 확률법칙의 지배를 받을뿐이라는 것을 안다.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유명한 불확정성 원리에 명확하게 개진되어있는 이런 결론은 앞에서 언급한 두번째 견해가 올바르다는 것, 즉 엄밀한 인과개념은 포기되어야 한다는것, 그래서 전에는 인과법칙이 차지했던 자리를 이제는 확률법칙이 이어받았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187쪽)

 

기하학의 공리와 수학의 공리들, 시간과 공간의 표준측정, 인관법칙의 확률론으로의 변화 등이 스피노자-라이프니츠-칸트의 체계를 붕괴시켰다. 그들 생각의 핵심에는 언제나 인과론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과법칙은 옳다할지라도 이상의 대상들에 대해서만 성립한다. 다시말해서 우리가 다루고있는 실제대상들은 실제대 상들의 인과구조를 모조리 기술할수 없기 때문에 일정한 확률의 한계안에서만 통제될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확률개념의 중요성은 양자역학이 발견되기 이전에 알려졌다. 어떤 생학자도 그가 지식의 구조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확률개념을 피할수 없다. 이점은 양자역학이 발견된후 더 명확해졌다.

 

(중략) 이성주의 생학은 세계가 이성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것을 증명하려고 할때는 언제나 인과개념을 근거로 내세웠다.  

 

한울이 예정되어 있다는 스피노자의 생각은, 인과에 대한 신념이 없으면 상상할 수도 없다.

 

라이프니츠는 논리의 필연성이 물리사건들의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라이프니츠의 이 생각은 모든 현상이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정에 의존하고 있다.

 

칸트는 자연에 관한 지식이 선험종합지식이라고 주장했는데, 칸트의 이런 지식론은 공간과 시간에관한 법칙들과 아울러 인과원리를 선험종합진리의 가장 주요한 실례로 들고있다.

 

칸트가 죽은 이후에 공간과 시간에 관한 문제가 해명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과원리에 관한 문제가 해명되자, 선험종합진리에 의거하는 칸트의 지식론은 붕괴되었다. 이성주의의 발판은, 자연에 대하여 수학으로 해석할수 있도록 해주어 이성주의를 지지했던, 바로 그 수리물리학에 의해 뒤흔들려 버렸다. 오늘날의 경험주의자는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가장 확실한 논증을 수리물리학을 근거로 삼아 내세우고 있다." (188~9쪽)

 

제11장 원자는 실재하는가?

 

한스는 당연히 원자가 실재하다는 것을 받아들였고, 볼츠만의 노력과 1905년 아인슈타인의 분자운동에 관한 논문이 발표된 후로는 원자의 존재를 인정한 것으로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왜 그럴까?

 

"19세기의 원자론은 원자가 실재한다는 주장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단계에 이르렀지만, 최근의 세마 발전은 원자의 실재 여부에 관한 논쟁을 새로이 부각시켰으므로, 원자가 실재한다는 주장은 전보다 한층 더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음을 알것이다." (190쪽)

 

데모크리토스의 생각처럼, 물질들이 압축과 분할이 가능한 탄력을 가지려면, 근본물질인 원자와 원자 사이에 빈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원자핵과 전자 사이에 엄청나게 넓은 빈공간도 존재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빈공간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원자의 존재를 인정해버리면 쉽기는 한데, 누군가 따지고 들면 골치 아프다. 무엇하나 속시원하게 설명할수가 없다.

 

"원자론에 관한 생학 논쟁들 중의 하나는 원자들 사이의 빈 공간이 논리에 따라 인정될 수 있는 개념이냐 아니냐라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원자들 사이에 빈공간이 없다면, 다시말해서 원자들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면, 원자들은 서로 붙어있어서 하나의 견고한 덩어리를 형성해야 할것이다. 그리고 사정이 그렇다면 원자들은 실재하지 않을것이다." (191쪽)

 

1) 데모크리토스는, 물질의 압축과 분할을 바탕으로 원자론을 제기했다.

2) 돌턴은, 화합물을 이루는 원소들은 일정한 무게의 정수비율로 결합한다는 실험결과를 바탕으로 원자가설을 제기했다.

 

 

"돌턴은 1803년 원자설의 대체적인 구상을 끝내고, 1808년에 원자설을 세상에 공포했다. 돌턴은 모든 원소의 원자는 공과 같이 둥근 모양이라고 상상하고 이것들의 모형을 만들어 화합물의 구조를 원자 개념으로 모형적으로 표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돌턴의 원자설은 옛날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원자설과 거의 비슷하지만, 원자의 질량을 특히 강조한 것은 돌턴의 학설의 특이한 장점이다. 

돌턴은 수소 원자를 표준으로 하고, 그 원자량을 1로 정한 다음 다른 원자의 원자량을 결정하려고 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틀린 부분도 많지만 그 당시의 정량 분석 방법이 아직도 유치했고, 돌턴의 실험 기술도 그리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 [동향] 1808년 돌턴의 원자설 등장, The Science times, 041104 )

 

그렇다. 빛을 포함한 미시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다른 원리가 작용한다. 미시세계의 작용들을 우리가 제어할수 있다는 것이 신비롭다. 관찰하기도 어렵고, 위치와 속도를 모두 측정할수는 없지만 조작할수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우리는 이런 불확정성이 미시의 것들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해야한다. 거시의 것들에는 불확정성이 없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은 플랑크가 발견한 양자의 크기가 너무 작기 때문에 인정될수 있지만, 거시의 것들에 대해선 인정될수 없기 때문이다. 원자전체에 대해서도 불확정성이 무시될수 있다. 왜냐하면 원자는 조금 큰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파동개념을 무시하고 원자를 입자로 취급할수 있다." (212쪽)

 

두개의 극단말고 또하나의 중립의견이 있다. 결정되지 않은 상태. 참과 거짓으로 나뉜 사건들이 또하나의 값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세상만사를 이분법으로만 바라보지 말자는 의견일까? 거시세계는 인과론의 지배를 받고, 위치와 속도를 알수 있으며, 예측까지도 가능하다. 그런 거시세계를 만드는 미시세계는 2개의 극단값이 아니라 결정되지 않는 제3의 값을 갖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우리의 일상언어는 2치논리 즉 '진리성'과 '허위성'이라는 두개의 진리치를 가진 논리에 바탕을 두고있다. 그러나 '비결정'이라는 중간 진리치를 갖고 있는 3치논리를 구성하는 일이 가능하다. 3치논리에서 진술은 옳거나 그르거나 아니면 비결정이다. 양자역학은 3치논리의 도움을 받아 일종의 중성언어로 기술될수 있다." (214쪽)

 

12장  진화

 

목적을 가진 행동을 해석하면,

미래가 현재를 결정한다는 말이 된다고

이성주의 생학philosophy은 주장한다.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살고 있다는 말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은 미래라는 말이란다.

 

놀랍다.

 

한번도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현재에 의해서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니까,

인과론으로만,

콩심은데 콩나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이게 인과론이 아니라 목적론이라고 생각한다고?

아리스는 우리의 농사짓던 조상들만도 못한 사람이었다고?

 

한스도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다.

 

"돌이 떨어지는것, 물이 흐르는것, 바람이 부는것 등등과 같은 무기물세계의 움직임에 비하면, 사룸체의 활동은 어떤 목적을 지향하며, 계획에의해 통제받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무기물세계는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고있다. 무기물세계에서는 과거가 현재를 통해 미래를결정한다.

 

사룸체life의 경우에는 그반대인 것같다. 현재의 사건은 미래의 목적에 기여하도록 조정되어있고, 과거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미래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현재가 미래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는 주장은 목적론(teleology)이라 불린다.

 

(중략) 따라서 목적성은 인과성과 맞먹는 기능을 부여받게 된다. 즉 둘다 똑같이 근본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자연을 원인과 결과만을 가지고 생각하는 물리학자는 직업의 편견-자신의 좁은 분야 이외에도 반드시 탐구할 필요가있는 분야가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편견-에 파묻히는 오류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216~7쪽)

 

이 부분은 자신이 없다. 다람쥐가 식량을 저장하는 것은, 본능이겠지만, 추운 겨울을 대비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계획이 아니라 본능일까? 씨앗을 땅에 떨어뜨리거나 바람에 날려버리는 것은, 자손을 남기기 위한 계획이다.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면 이것은 계획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아닌것같다. 비유에 불과하다 할것이다.

 

그리고 목적론에 따라 사룸의 행동을 설명하려는 것은, 원인이 결과 이전에 와야한다는 발생의 시간(순서)를 외면하는 일이다. 어떻게 결과가 원인보다 앞설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목적론의 설명은, 설명이 있어야할 자리에 비유 또는 의인화를 집어넣는, 사이비설명이다.

 

"누구도 쥐가 식량을 저장하는 동안에 어떤 계획을 따라 그런일을 한다고 말할수 없을것이고, 어떤 식물의 씨앗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식물이 종족번식이라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것이다. 사룸의 활동에 대하여 의인론의 생각을 피하면서 표현하려면, 다음과 같이 주의깊게 말해야한다.

 

사룸체의 활동은, 그유기체가 계획에 따라 행동한다면 나타나게될 그런 행동유형을 보여준다고 말해야 한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해서, 어떤 신비한 방식으로 유기체의 행동을 통제하는계획이 존재한다고 말하는것은, 유기세계 전체를 사람의 행동과 비슷하게 보려는 비유에 의거해 해석하고 있음을 뜻한다. 즉 설명을 제시해야할 자리를 비유로 대신하고 있음을 뜻한다. 목적론은 모든것을 사람에 비추어 생각하려는 비유이며, 그래서 사이비설명이다." (220~1쪽)

 

다윈의 진화론은, 이성주의 생학의 목적론을 무너뜨린다. 진화에는 어떤 목적과 방향이 없다는 말은, 선택과 우연에 의해서, 환경과 그에 어울리는 돌연변이체의 적응이라는, 원인에 의해서 진화라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사람으로 향하는 진화가, 진화의 목적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비유가 아닌, 독특하고 그럴듯한 설명이다.

 

"원인과 결과로 설명하려는 욕구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같다. 어떻게 목적이 있어 보이는 행동양태를 인과성에의해 설명할 수있을까?

 

(중략) 큰돌멩이와 작은 돌멩이가 동일한 파도에 의해 운반될 때는 항상 작은 돌멩이가 좀더 멀리 운반될 것이다. 이런 선택과 결합된 우연이 질서를 만들어낸다.

 

(중략) 다윈은 공존하고있는 종들에 관한 질서체계가 종들의 발생에 관한 역사의 질서를 나타낸다고 추리 (중략) 진화의 기간에 비하면 가장 오래산 사람의 인생은 하루살이의 하루보다 훨씬 더 짧다. 우리가 진화변화를 실제로 관찰할수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진화변화의 경우에는 사람의 역사가 기록된 6000년조차도 지극히 짧은기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체계속에서 역사의 질서를 알아내는 추리, 달리 말해서 현재의 것들이 보여주는 체계속에서 시간의 질서를 읽어내는 추리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중략) 다윈은 진화의 과정이 인과성에 의해서만 설명될수 있지, 어떤 목적론 개념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221~4쪽)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불가지론의 입장에 서게되면, 커미cosmos 138억년의 역사를 부정할수 있을까? 아무리 노력해도 알수 없는 것도 있을 것이다. 알수 없다고 해서 지금까지 밝혀진 한울universe의 역사를 부정하고, 창조론이 옳을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아갈수 있을까? 나도 현대세마를 완전히 믿지는 못한다. 의심하고 있다. 적외선 카메라 또는 전자현미경으로 찍은 사진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화면이라면, 그것이 과연 실제인 것일까? 그러나, 적어도 무엇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는 알지만, 거짓주장의 엉터리 근거는 이해할수 있지 않을까? 하기는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이 거짓에 동조하는 것을 보면, 그럴수도 있겠다. 그또한 불가지론이라는 신이다.

 

"사변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세마science대신 허구로 대치시킨 우주창조설을 꾸며내어 이물음에 답하거나, 무에서 물질을 창조하는 행위를 조작해냈다. 다시말해서 '우리는모른다'는 것을 서툴게 감추고 있는 것에 불과한 답을 제시했다. 더욱이 한걸음 더나아가 이답의 근거를 '우리는 결코 알수 없을 것이다'는 것에 두는 것은, 겸손이라는 가면아래서 미래의 세마발달을 예견하는 능력이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꾸며대는 것이다." (232쪽)

 

생학자는 지성과 이성을 무기로 하여 귀납 사실들을 잘 꿰어내어 의미를 드러내야 한다. 드러낸 의미를 확장하여 사람과 세계를 설명하고 나아갈 바를 제시해야 한다. 대신에 드러나지 않은 사실들에 대해서는 기다릴줄 알아야 한다. 왜 이렇게 영역이 갈라지게 되었을까? 세마기술에 의해 밝혀지는 귀납사실들이 깊고 넓고 비싸게 발전해서, 자연생학 natural philosophy의 시대나 르네상스, 계몽시대처럼 한두사람에 의해 밝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2,500년전의 생학자들에 비해 지금의 생학자들은 훨씬 부지런해야 한다. 검토해야할 귀납 사실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게으른 사람은 결코 생학자가 될수 없는 시대가 된듯하다.

 

"현대 생학자philosopher는 다른 태도를 취한다. 그는 세마학자가 해야할 명확한 답을 그가 대신해서 제시하려 하지않는다. 생학자가 할수있는 일은 - 어떤 답이 옳은가는 훗날의 세마학자에게 맡겨 - 두고 의미있게 물을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밝히고, 가능한 몇몇답의 윤곽을 그리는일이다. 실제로 현대물리학은 이러한 논리작업에 필요한 많은 자료를 제공하였고, 또 현재 알려진 가능한 답이 불충분하다고 판명되면 그이상의 해결책을 발견할수 있을 것이다." (232쪽)

 

호킹은, 빅뱅이전에 무엇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것이 처음이라며, 답답하다고 화를 냈다.

한스 라이헨바하는, 모든 사건에는 이전의 사건이 있고, 최초의 사건이 있어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근거는, 수체계를 검토하는 것만으로도 알수 있다는 것이다. 의미없는 질문에 매달리지 말라고 말한다.

 

시간은, 처음이 없이 무한히 존재한다고 생각해도 모순을 만들어내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억지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우리는 연역 아니면 귀납의 방법 말고는 생각하거나 검증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모순되지 않게 잘 정리하고 있는 것이 필요하다. 언젠가는 밝혀질수 있기 때문이다. 빛이나 양자, 전자의 세계가 입자이면서 파동이라는 것을 받아들여도, 세마를 다루는데 문제가 없다는 양자역학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놀라운 자신감, 이 짧은 문장을 쓸수 있다는 것이 너무 부럽다.

 

"물질이 어떻게 무에서 생겨났는가를 묻거나 최초사건의 원인(또는 전체로서의 커미universe의 원인)이라는 의미에서 제1원인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의미있는 물음이 안된다. 원인을 가지고 설명한다는 것은, 나중의 사건과 일반법칙에 의해 결합되어있는, 이전의 사건을 지적한다는 뜻이다.

 

만일 최초의 사건이 있다면, 이 최초의 사건은 원인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설명을 요구하는 일 역시무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최초의 사건이 꼭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다시말해서 우리는 모든 사건에는 이전의 사건이 있고, 시간에는 시초가 없다고 상상할 수있다. 양쪽방향으로 끝없이 뻗어나가는 시간의 무한성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떤 어려움도 없다.

 

우리는 수의 계열이 끝이 없다는것, 즉 모든 수는 그보다 큰 수를 가진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수의 계열에 음수를 포함시키면 수의계열은 시작도 없다. 다시말해서 모든수는 그보다 작은수를 가진다.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계열을 수학에서 다루는데 성공한다.

 

다시말해서 무한계열에서 아무런 역설도 일어나지 않는다. 최초의 사건 즉 시간의 시작이 있어야 한다고 반박하는 것은 문외한이나 취할 태도이다. 논리학은 시간의 구조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는게 없다.

 

논리학은 시작이있는 유한계열 뿐만아니라 시작이없는 무한계열을 다루는 수단을 제공한다. 만일 세마의 증거가 무한에서 와서 무한으로 가는 무한한 시간을 지지한다면, 논리학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을 것이다." (233쪽)

 

잘 나가다가 여기에서 한스와 충돌한다. 설명할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게, 어째서 세마의 자세가 아닌가? 설명은 어디에선가 끝이나지 않는가? 

 

“설명이란 어디에선가는 끝이나야하고, 대답할수 없는 물음이 언제나 남아있는 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마를 반대하는 생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논증이었다. 그러나 대답할수 없는 물음은, 언어를 잘못사용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다. (중략) 전체로서의 커미는 원인을 갖지않는다. 왜냐하면 '정의에 의해서' 전체로서의 커미universe 이외에 그 한울의 원인이 될수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의 물음은 생학논증이라기보다는 텅비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233~4쪽)

 

이 책은, 생학philosophy도 세마science가 될수 있다는 라이헨바하의 주장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세마학자는 존재의 현재 상태의 원인을 해명하는 일이지, 존재의 원인을 해명하는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세마는 존재를 종합하는 통찰을 할수 없다는 말인가? 생학은 존재를 생각하는 학문이다. 존재에 대한 종합통찰이 세마로 불가능하다면 생학은 세마가 될수 없다는 말 아닌가? 세마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생학은 얼마든지 상상하고 망상할수 있게 되지 않는가?

 

“세마학자는 한울universe의  원인을 묻는것 대신에 커미universe의 현재 상태의 원인을 물을수 있을뿐이다. 그리고 세마학자가 해야할 일은 커미를 자연법칙에 의거해 설명할 수 있는 연대까지 계속해서 소급해 올라가는 일이다.” (234쪽)

 

제13장 현대논리학

 

아리스의 논리학을 극복한 현대의 기호논리학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런데, 아리스의 논리학도 무엇인지 모르겠다.

 

삼단논법이란다.

 

그런데, 집합의 원소에 관한 추리가 삼단논법이라고?

처음듣는 이야기다.

집합의 원소에 대한 성질을 묘사하는 것을 연결해서

삼단논법을 만든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라는 집합의 한원소이다. 

  집합의 원소에 관한 추리는 삼단논법이라 불린다. 

 

예컨대 "모든 사람은 죽는다"와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라는 두전제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결론을 추리한다." (242쪽)

 

여기까지는 언제나 우리가 들어왔던 소리라서, 왜 삼단논법을 집합의 원소에 관한 추리라고 했는지를 이해하겠다. 실제로 벤이라는 사람이 삼단논법의 주장을 합당한 주장인지 구별하기 위해 만든 것이 벤다이어그램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삼단논법으로는 이삭이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할수 없다는 뜻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예컨대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버지라면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할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이런 추리 형식을 표현하는 수단을 갖추고 있지 않다. (중략) 논리학의 역사는 한 학문의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2000년 이상동안 그 창시자가 남긴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243쪽)

 

라이프니츠가 논리학을 기호로 설명하려는 노력을 처음으로 한데 이어 많은 수학자들이 논리학에 수학기호를 도입하면서 2천년동안 정체되어 있던 논리학이라는 학문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기호논리학.

 

"논리학의 역사에서 전환점은 불(Boole)이나 드 모르간(de Morgan)과 같은 수학자들이 수학표기법과 같은 성격의 기호언어로 논리학의 원리를 표현하려고 시도한 때인 19세기중엽이었다. 기호논리학을 구성하는 일은 페아노(G. Peano), 퍼스 (C.S.Peirce), 슈뢰더(E. Schroder), 프레게(G. Frege). 러셀(B. Russell)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이들과 함께 새로운 유형의 철학자 즉 수학 논리학자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245쪽)

 

생각을 문장으로 표현하고, 그 문장을 다시 기호로 바꿈으로써, 생각을 정돈해서 볼수 있다. 정돈된 생각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알게 하고, 올바른 이야기인지도 구별할수 있게 한다. 그런데, 기호를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수학과 논리학은 매우 닮아있다.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수학은, 양을 다루는 학문으로, 논리학의 한 분야라는 것을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증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러셀은, 수학은 텅빈 동어반복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기호논리학이 구성됨으로써 논리학과 수학간의 관계를 새로운 각도에서 탐구할수 있게 되었다. 왜 우리는 사고의 산물들을 다루는 추상 학문을 두개씩이나 가지고 있는가? 이 물음은 버트런드러셀과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이들은 수학과 논리학이 궁극으로는 동일하며, 수학은 특별히 양의 적용과 관련해서 발전된 논리학의 한분야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중략) 러셀은 정수, 예컨대  1, 2, 3 등등은 논리학의 기초개념만으로도 정의될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러한 증명이 기호표기법의 도움없이는 결코 주어질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248쪽)

 

1907년 당시 30대의 버트런드 러셀은 수학의 영광을 찬사하는 글을 쏟아냈다. 러셀은 이렇게 썼다. 

 

“누가 보더라도 수학은 진리만이 아니라 지고한 아름다움까지 지니고 있다. 

 차갑고 위엄있는 이 아름다움은,

 조각상의 아름다움처럼 우리의 나약한 본성에 호소하지 않고,

 미술이나 음악의 번지르르한 외관을 갖지 않으면서 숭고하게 순수하며,

 아울러 가장 위대한 예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엄격한 완벽성을 지닐 수 있다.” (출처를 모르겠다, 찾아보자)

 

수학의 초월 이미지를 강조하는 이런 노선은,

수학에 관한 대중교양서에서 흔히 나타난다. 

하지만 그런 책에서 좀처럼 목격할 수 없는 것은,

러셀이 80세 후반에 표현했던 상이한 견해다.

그 무렵 러셀은 젊은 시절에 열정에 휩쌓여 쓴 글을,

‘대체로 헛소리’로 치부했다.

 

늙은 러셀이 쓴 바에 의하면, 수학은,

 

“내용 면에서 더 이상 사람을 초월한 어떤 것이 아니다.

 대단히 내키지는 않지만,

 나는 수학이 동어반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게 되었다.

 

 두려운 말이긴 하지만,

 지성을 충분히 갖춘 사람이 보기에 수학 전체는,

 ‘네발동물은 동물이다’라는 진술만큼이나 하찮은 것 같다” (출처를 모르겠다, 찾아보자)

 

그러니 러셀은 살아가면서 수학에 관한 생각에 일대 전환을 겪은 셈이다.

 

한스는, 수학은 논리학이고, 논리학은 공허하다고 말한다. 러셀이 늙어서 깨달은 텅비를 한스는 러셀을 통해서 배웠고, 고끄한다. 답답한 것은, 러셀의 증명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러셀은, 수학을 논리학으로 환원시킴으로써, 기하학의 발전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앞에서 선험종합진리의 붕괴라고기술했던 진화과정을 완결시켰다. 칸트는 기하학 뿐만아니라 산술학 역시 선험종합의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믿었다. 러셀은 산술학의 원리들을 순수논리학에서 연역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수학의 필연성이 분석의 성격을 지닌것임을 밝혀냈다. 수학에 선험종합진리는 없다고 밝혀진 것이다." (248쪽)

 

* 텅비 : 공허 ; 텅 비어있음

* 고끄 : 共感 = 同意 = agreement : 고개를 끄덕임

 

세계속에 있는 모든 것이 자기자신과 같다.

세계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라는 의미인가?

세계의 일반속성은 무엇인가?

부분에 전체의 속성이 들어있다라는 말로 세계의 일반속성을 표현할수 있는가?

 

굉장히 길게 설명하고 있는데도, 모르겠다.

결론만을 기억한다면,

논리학으로는 새로운 진리를 발견할수 없고, 세계에 대한 일반속성을 논리학으로 알아낼수는 없다. 

 

"만일 논리학이 분석하는 것이라면 논리학은 텅비하다. 즉 논리학은 물리대상의 속성을 표현하지 못한다. 이성주의 생학자들은 논리학을 세계가 지닌 어떤 일반 속성을 기술하는 학문, 즉 존재에 관한 학문 또는 존재론(ontology)이라고 간주하려는 시도를 되풀이 해왔다. 그들은 "세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자기자신과 같다"는 원리와 같은 것이 사물들이 지닌 속성에 관한 정보를 전달해 준다고 믿었다.

 

그들은 그런 문장이 제공하는 모든 정보가 '같다'란 낱말의 사용을 규정하는 정의속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으며, 우리가 그런 문장에 대해 아는 것은 사물들의 속성이 아니라 언어 사용의 규칙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논리학은 언어사용의 규칙을 명확하게 표현한다. 논리학이, 분석하는 것이고 텅비한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248쪽)

 

수학과 논리학의 관계도 몰랐지만, 논리학이 공허하다는 선언도 무슨 이야기인지 알수가 없었다. 그럴줄 알고 한스가 설명을 해준다. 한스의 설명을 읽으니, 논리학이 공허하다는 것은 알겠다. 그렇다면 정말로 큰 문제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논리에 맞게 처리되면 모두가 와아해질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는 텅비하다는 말인가?

 

논리에 맞다는 말은, 말의 앞뒤가 맞다는 것이지, 말하는 것이 진리나 사실이라는 것은 아니다. 논리에 맞다라는 말과 항진명제라는 말도, 서로 다른 말이다.

 

우리는 또 이치에 맞는, 언제나 참인 이야기와 행동을 좋아한다. 그런데, 이런 항진 진술은 텅비하다? 정말 그런가?

 

정보가 없는 것을 텅비하다고 말한다면, 고끄할수 있다. 항진명제는 정보가 없다기보다는, 새로운 정보나 지식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에 대해 진술하는 것, 즉 새로운 정보가 없다는 말로 이해할수 있다. 

 

"나는 논리학의 분석의 성격, 즉 논리학이 텅비하다고 말할수 있는 이유를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논리학은, 결합된 문장 전체가 개별문장들의 진리성과는 무관하게 참이되는 방식으로, 문장들을 결합시킨다. 예를들어 "만일 나폴레옹과 시저가 둘다 예순살까지 살지 못했다면, 나폴레옹은 예순살까지 살지못했다"라는 결합문장은, 나폴레옹이나 시저가 예순살 전에 죽었든 죽지않았든 상관없이 옳다. 그러므로 이런 결합문장은 언급된 사람들이 몇살까지 살았는가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논리학이 텅비하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위의 예는 어째서 논리관계가 필연으로 옳은가를 보여준다. 논리관계는 필연으로 옳다. 왜냐하면 어떤 경험의 관찰도 논리관계를 그르다고 증명할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나폴레옹에 관한 책을 보고나서 나폴레옹이 쉰네 살에 죽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할지라도, 앞에서 든 결합문장이 그르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할것이다. 또한 어떤사람이 나폴레옹은 예순다섯살에 죽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이것 역시그 결합문장이 그르다는것을 증명하지는 못할것이다. 논리의 필연성과 텅비성은 공존하는것이며, 논리학의 분석 또는 항진의 성격을 이루는 것이다.

 

순전히 논리에 따르는 진술은 모두 앞에서 든 예와 마찬가지로 항진진술이다. 항진진술은 아무런 정보내용도 갖고있지 않으며, 따라서 "내일 비가 오거나, 내일 비가 오지않을것이다" 와 같은 항진 진술은 정보를 전달하는게 없다." (249쪽)

 

항진진술은 텅비하지만, 결코 공허하지 않다. 수학이든 논리학이든 분석해서, 참과 거짓을 구분할수 있다면, 믿을만한 도구가 될수 있다. 항진인 것은 텅비지만, 텅빈 것은 거짓이 섞일수 없어서 믿을만하다. 모든 일이 분석하기 어렵기 때문에 제대로 분석해서 항진여부를 판단할수 있다면, 수학이든 논리학이든 역할을 충분히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수학과 논리학만을 가지고는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알수 없다는 것을 마음에 꼭 새겨두어야 한다. 경험과 관찰로 증명되지 않으면 새로운 정보나 지식이라 할수 없기 때문이다.

 

"수학을 분석하는 것이라고 한다고 해서 수학의 사고를 경시하는게 아니다. 수학사고의 유용성은, 바로 수학이 지닌 분석의 성격으로부터 나온다. 다시말해서 수학의 정리가 텅비하다는 바로 그 이유때문에, 수학의 정리는 절대로 믿을수 있는 것이고, 자연세마natural science에서 사용해도 무방한것이다.

 

수학만 가지고서는 결코 세마의 결론을 반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학은 입증되지 않은채 숨겨져있는 어떤 내용을 세마에 도입할수 없기때문이다. 하지만 수학의 관계가 텅비하다고 말하는 것은, 수학의 관계가 쉽게 발견된다는 뜻이 아니다. 앞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텅비한 관계를 발견하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일일수 있다 . 그리고 수학에 쏟는 노력과 천재성의 총량은 수학의 탐구가 굉장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250쪽)

 

제14장 지식의 예측

 

어떤 지식을 예측하려면 이론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의 경험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지식을 만들고, 지식을 바탕으로 이론을 세워야 한다. 우리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지식과 이론에 의해서 예측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건희중심 밀정검찰독재는 과연 언제 무너질까? 박근혜가 무너질때보다 훨씬 더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들의 힘이 아직도 튼튼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일들이 더 일어나야  그들을 둘러싼 단단한 껍질이 깨어질까?

 

"관찰자료들이 주어지면 이 관찰자료들을 가지고 지식이 정립되고, 이 정립된 지식에 의거해 이론이 정당화된다. (중략) 추측을 통해 이론을 발견한 세마학자scientist가 이론을 다른사람에게 제시할때는, 그의 추측이 사실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것을 안 다음이라는 사실이다. 세마학자는 이론을 정당화할 때 귀납추리를 한다. 왜냐하면 세마학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사실이 이론에서 연역된다는 것뿐만이 아니고, (사실을 근거로) 이론이 옳을 확률이 높다는것도 보증하는 것이며, 또 이론에 의거하여 또다른 관찰사실들을 예측하도록 권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귀납추리는 이론을 발견하는데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된 이론을 관찰자료들에 의해 정당화하는데 사용된다." (257~8쪽)

 

계속 확률이 나온다. 예외없는 법칙이 제일 좋겠지만, 우리터에 절대법칙은 없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실들을 바탕으로 해서 이러이러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추정이다. 그 추정은 한가지가 아니라 여러가지이고 가설이라고 한다. 추정한 여러가지 가설들 중에서, 사실을 연역하거나 귀납추리할수 있다는 것이 여러사람에 의해 확인된 가설이, 새로운 이론이 된다. 가설을 세우는 과정이나 추정하는 과정에 참여해보지 않았다면, 이론이 세워지는 과정도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귀납추리에 관한 연구는 확률론에 속한다. 왜냐하면 관찰사실들에 의거해서 만들 수 있는 이론은 단지 거그probability라는 것이지 절대로 확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귀납을 확률론속에 통합시키는 일이 인정될 때조차도 새로운 형태의 오해가 발생한다." (259쪽)

 

* 거그 = probability ; 거의 그렇다 ; 개연 蓋然

* 거그한 = probable = 거의 그러한

 

오해는, 사실을 바탕으로 귀납추리를 통해 이론을 만들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실들을 안다고 해서 이론을 만들어낼수는 없다. 브라헤의 관측자료로 행성운동의 법칙을 발견한 것은, 케플러였다. 직접 자료를 모으고 수십년동안 관찰해왔던 브라헤는, 이론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사실을 토대로 귀납추리를 거쳐 이론을 만들수 있다는 생각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다. 사실이 없다면 이론을 만들수 없겠지만, 사실들이 주어졌다고 해서 이론이 귀납되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론을 발견하는 과정은 귀납추리와는 다르다.

 

"사실에 의해 이론들을 확증할 때, 확률 추리가 지닌 논리구조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일부 논리학자는 확증을 연역추리의 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어왔다. 다시말해서 일부 논리학자는, 우리가 이론에서 사실을 연역하여 도출해 낼 수 있다면, 사실에서 이론을 귀납으로 도출해낼수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과도하게 단순화된 것이다. 귀납추리를 하기 위해서는, 이론에서 사실을 도출하는 연역관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258~9쪽)

 

'귀납지식 = 예측지식 = 확률을 바탕으로한 미말지식'의 한계도 분명히 기억해 둘 일이다. 개별사건은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건이 일어날지를 미말할때, 75%의 확률로 사건이 일어날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맞거나 틀릴 것이다. 개별사건은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맞았다고 해서 미말 확률이 진리라고 말할수 없고, 틀렸다고 해서 미말 확률이 거짓이라고 말할수도 없다.

 

그렇지만, 미말은 삶의 기준으로 삼을수 있고, 확률을 바탕으로 한 예측진술도 쓸모가 많다.

 

"M씨가 병에서 살아났다고 가정하자. 이 사실이 75 %라는 확률을 언급하는 미말진술을 검증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는건 분명하다. 왜냐하면 75%라는 확률은 그사건의 발생과 양립가능할 뿐만아니라, 그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것과도 양립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많은 수의 사건을 고려한다면 75%라는 표현이 가능하고, 따라서 그렇게 표현된 확률진술은 관찰에 의해 시험될 수 있다. 그러나 개별 사건의 발생에는 정도 문제가 있을 수 없다. 단일사건에 관한 확률진술은 무의미하다." (265쪽)

 

이성주의에 바탕을 두고 말하면, 진리는 진리여야한다. 사실이 아닌것이 포함된 진리는, 불안한 진리다. 이성주의는 옳은 전제에 의해 연역된 모든 사실들이 참이기 때문에, 진리에 대해 이렇게 말할수 있다. 그러나 귀납지식은 언제나 귀납지식과는 다른 사실이 드러날수 있다. 그래서 흄은 경험주의로는 진리를 발견할수 없다고 생각했고, 우리도 예외없는 법칙은 없다라는 말로 참이 아닌 사실을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다.

 

그런데 한스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한다. 미래에 발견될지도 모르는 검은 새힌은, 예측진술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다고 해서 새힌은 하얗다라는 예측진술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거그한 진술인 귀납지식은, 거의 모든 새힌은 흰색이라고 미말predict한다. 이런 미말은 절대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의 추정이며, 확률을 바탕으로 한 미말이다. 어떤 새힌swan이 발견된다면, 그 새힌의 색은 대체로 흴것이라고 미말하는 것이다. 귀납지식으로 결과를 미말하는 것이므로 진리여부를 판단할 필요가 없다.

 

미말 진술이 훌륭하다는 것은, 관측한 사실들과 미말 진술이 논리에 맞고, 진술의 근거가 충분하다는 말이다.

 

* 미말 = predict = 예측 豫測 ; 미리 말하다

* 새힌 = swan = 白鳥 ; 흰새 -> 새흰 -> 새힌

 

"미말진술을 추정진술로 해석하면, 경험주의자의 지식개념에 남아 있던 마지막 문제 즉 귀납문제가 해결된다. 경험주의는 귀납에 대한 흄의 비판에 의해 붕괴되었다. 왜냐하면 경험주의는, 이성주의가 근본으로 삼고있는 공준, 즉 모든 지식은 옳은것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공준에서 벗어날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성주의자의 이 공준을 인정하는 한 귀납의 방법은 정당화될수 없다. 왜냐하면 귀납의 방법을 사용하면 옳은 결론에 도달할거라는 것이 증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말결론이 추정진술로 간주될때는 사정이 다르다. 미말한predicted 결론을 추정한 진술로 해석하면, 미말결론이 옳다는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서 예측결론이 훌륭한 추정진술이라는 것만 증명하면 그만이다. 미말결론이 훌륭한 추정진술이라는 것은 증명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귀납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269쪽)

 

제15장 막간극 - 햄릿의 독백

 

'to be or not to be'를 결정하는 것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동어반복이라고?

 

많이 공부하고 힘들여 생각을 한 사람의 넓은 생각을 따라가는 것은 정말 어렵다. 60년을 살았지만, 먼지처럼 살았지 제대로 산것이라고 할수 있을까? 생각의 끝을 잡지 못하고, 엉켜진 실타래를 이리저리 잡아당기며 우연히 풀려지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그러다가 가위로 싹둑 잘라서 일부는 버리고 일부만 쓰는 어리석은 짓을 계속해왔다. 실타래의 끝을 잡아 문제를 뚜렷하게 드러내며 살았다면, 생각을 그렇게 해왔다면, 지금처럼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다.

 

동어반복이란 무엇인가?

똑같은 말을 달리 말하는 것이다.

= 로 연결되는 수학식이다.

 

지금처럼 살것이냐 지금과 다르게 살것이냐?

to be or not to be?

 

이 말이 어째서 동어반복이지?

 

중요한 것은,

의미있는 것은,

복수를 실행할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다.

복수를 한다는 것은,

실행한다는 것이고,

현재의 정보와 지식으로 지금의 행동과 미래의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떤 정보와 지식이 지금의 행동과 미래의 상태를 결정할수 있다면,

그것들은 대단한 것이다. 

 

"to be or not to be.

이것은 문제가 아니라 동어반복이다.

나는 공허한 진술에는 흥미없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종합진술의 진리성이다.

나는 "내가 과연 할것인지 못할것인지"

바로 이걸 알고 싶다.

 

나는 정말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용기를 낼 것인가 아니면 못내고 말것인가." (278쪽)

 

햄릿의 고민은, 자신의 확신보다 다수의 고끄였을까? 나에게는 분명한 사실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방법이 없고, 햄릿 스스로도 아버지의 죽음의 이유를 확신하지 못했다.

 

"그자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게 할 수있다면, 모두 내편을 들것이다. 그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게 할 수 있어야 하다니. 나에겐 이처럼 명명백백한데도 말이다. (중략) 그러나 그런 사실들은 단지 간접증거에 불과하다. 나는 단지 확률에 지나지 않는것을 믿어도 괜찮을까? 내가 용기를 내지못하는 것은 바로 이점 때문이다. 나는 현재의 왕을 두려워하고 있는게 아니다. 나는 단지 확률에 지나지 않는것을 근거로 삼아 행동하는 것이 두렵다." (278~9쪽)

 

과감하게 추정하고 미말하라. 누구나 그렇게 살아간다. 주의할 것은, 추정의 기술과 미말의 세마를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나의 미말은, 삶이 10년 내에 끝나지 않을 것이니, 더 열심히 즐겁게 살라는 것이다. 그렇게 용기를 내어 행동해야 한다.

 

"나는 올바른 결과들을 보증하는 더 큰 백분율에 의지할수 있다. 내가 확보할 수 있는것은 이것이 전부다. 내가 내세울수 있는 진술은 추정진술밖에 없다. 나는 물론 확실성을 원하지만, 논리학자가 나에게 주는 충고는 과감하게 추정하라는 것뿐이다." (280쪽)

 

제16장 기능지식

 

모르는 것은 건너뛰어 가면서 지금까지 잘 따라왔다. 거의 막바지에 도달한 모양이다. 생학은 미말이 가능한 기능지식이어야 한다. 모든 학문이 그렇다. 단순히 즐기는 것에서부터 삶의 곳곳에서 쓰여질수 있는 학문들이 현재까지 살아남아있는 학문들이다. 한문이 잊혀지고 있는 것은, 더이상 현대사회의 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하는 기능을 할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아름다운 예술로는 남아있을만 하다. 의미를 가진 멋진 예술이다.

 

"학문으로서의 생학이 제시하는 지식은 기능(functional)지식이다. 기능지식에 따르면, 지식을 미말의 도구로 간주하며, 또 공허하지 않은 진리 즉 종합진리를 판별할수 있는 유일한 기준을 감각관찰이라고 본다." (281쪽)

 

기능지식과 대비되는 초월지식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의해 그려지는, 그림자를 중심으로 한 지식이다. 비유로서는 그럴싸하지만, 사슬에 묶여 동굴속에서 그림자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바보들은 존재할수 없다. 세마학자들은 이미 지각 16km 두께의 모든 암석들을 분석했다. 하나하나 뚫어서 일일이 성분을 분석했다. 100년 이상 걸리는 작업이었다. 바다속에도 들어가 보았다. 사람은 결코 사슬에 묶여 동굴에 갇힌채 그림자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그림자가 실제의 사물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동굴밖 세계가 있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오직 동굴밖 세계의 그림자만 본다. 플라톤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물리세계에 대한 지식은 이런 종류의 지식이라고 보았다. 지각할수 있는 세계란 동굴벽에 나타난 그림자와 같은것이다. 사고만이 더 차원높은 실재의 실존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준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들은 단지 실재의 빈약한 영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동굴의 비유는 2000년동안 사변생학자의 태도를 상징했다. (중략) 이 동굴의 비유에 의하면, 경험지식은 수학자나 생학자가 통찰에 의해서 획득하여 확보하고 있는 더 훌륭한 지식에 대한, 빈약한 대용물에 지나지 않는다. 동굴의 비유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초월주의이다. " (282쪽)

 

이성주의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세상을 온전하게 바라볼수 있다. 즉, 현상과 물자체라는 이분법으로 집대성되어있는 칸트철학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관찰과 미말의 성공을 경험하면, 물자체라는 환상에서 벗어날수 있다는 것이다.

 

이분법에서 벗어나려면, 정신분석학자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은, 일단 갈무리해 두자.

 

"온갖 소원이 이루어지는 마취 상태의 꿈을 깨기란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현상의 배후에서 암약하고 있는 관찰 불가능한 물자체에 대한 이성주의의 신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있다. 그것은 정서 상태를 재조명하는 일인데, 이런 일은 종종 실증세마를 연구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관찰 가능한 사물들을 통제하고, 그것들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오는, 정서의 만족감을 경험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종종 정신분석학자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284쪽)

 

세계를 이분법으로 구분하여 묘사하는 초월지식과 달리, 논리경험주의의 기능지식은, 세계를 묘사하고, 미래를 미말predict한다.

 

"지식을 획득하는 데 필요한 도구라는 것, 다시 말해서 수학의 분석은 지식의 도구일 뿐이지 진리의 원천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런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19세기와 20세기는 이성주의를 공격할 뿐만 아니라, 이성주의를 물리칠 수 있는 수단도 갖게 된 새로운 경험주의의 요람기가 되었다. 새로운 경험주의는 지식을 분석하기 위해 기호논리학의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논리경험주의라고도 불린다.

이 새로운 경험주의 생학의 지식 개념을 초월지식과 구별해, 기능지식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기능지식 개념에서 지식은 또 하나의 세계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사물들을 묘사함으로써 미래 예측이라는 목적에 기여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284쪽)

 

이준석과 천하람이 칠불사에서 새벽 4시에 홍매화를 심었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웃는다. 비웃는다. 왜?

 

이준석과 천하람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인데, 왜 사람들이 비웃을까? 혹시 90%의 사람들은 비웃지 않는데, 10%의 사람들만이 비웃는 것은 아닐까? 미신을 믿지 않아도, 절-성당-교회-모스크에 들어가서 언제나 기도를 한다. 간절할 때는 복전도 낸다. 비웃을 일인가? 국회의원 당선을 위해서 새벽 4시에 일어나 홍매화를 심는 기복행위가 못난 짓인가?

 

만일 30%의 사람들만이라도 이준석과 천하람을, 미신의 지배를 받는 한심한 젊은 정치인들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나라는 정말 대단한 나라이다. 세마science의 세계를 아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가 되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신은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의 진심을 전하고 다지기 위해서, 기도하는 마음 - 기도는 꼭 필요하다.

산채로 가죽을 벗겨낸 소를, 희생제물로 삼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문장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배우고 있다.

 

문자는, 기호이고 물리현상이며, 다른 물리현상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문장은, 기호의 조합이다.

의미있는 문장은, 옳고 그름을 결정할수 있는 문장이다.

문장의 옳고 그름은, 관찰에 의해서 결정할 수 있다.

 

"기호는, 종이 위의 잉크 자국이나 음파와 같은 일종의 물리 현상인데, 다른 물리 현상들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기호와 그것이 나타내는 것 사이의 대응 관계는 어떤 유사성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약정에 기초를 두고 있다. 예컨대 '집'이란 낱말은 실제의 집과 대응하고, '붉다'란 낱말은 붉음이란 속성과 대응한다.

 

기호들은 물리세계의 상황과 대응할 수 있는 방식으로 결합되는데, 이런 기호 조합을 문장이라 한다. 상황과 대응 관계에 있는 기호 조합은 옳다. 예를 들어 “그 집은 붉다"란 문장이 실제 상황과 대응하면 옳다. '아니다'라는 표시를 사용해서 옳은 문장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기호 조합은 그른 문장이다. 옳다든가 그르다고 밝혀질 수 있는 기호 조합은, 의미있는 문장이다.

검증 가능성은, 의미 이론에서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요소이다. 진리를 관찰에 의해서 결정할 수 없는 문장은 무의미하다.

 

이성주의자들은 의미 자체라는 것이 있다고 믿어 왔지만, 경험주의자들은 의미란 언제나 검증 가능성에 의존한다고 주장해 왔다. 현대 세마는 경험주의자의 이런 견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앞에서 말한 공간, 시간, 인과성, 양자역학에 대한 분석에서 의미가 검증 가능성에 의존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이런 견해를 고수하지 않고서는 현대 물리학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검증기능성 의미 이론은 학문으로서의 생학에서 필수 불가결한 부분이다." (285~6쪽)

 

1) 이 문장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2) 이 문장은 의미가 있다

 

위 두 문장의 차이가 뭘까?

 

두 문장의 차이를 구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자.

 

옳은 문장과 의미있는 문장을 구분해 보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나? 이 말은 맞네(틀리네). 이 말은 의미가 있네, 즉 생각해 볼 가치가 있네. 이 정도의 생각은 해왔다. 일단 이 정도로만 정리해놓고 넘어가자.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 

 

1) 옳은 문장 : 문법에 맞는 문장. 논리의 모순이 없는 문장. 사실 또는 진리를 말하는 문장

2) 의미있는 문장 : 관찰을 통해 검증이 되는 문장.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문장.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문장.

 

의미는 기호의 속성이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기호는 물리 형태이고, 문자(기호)는 물리세계와 연결시켜 물리세계를 나타낸다. (문자)기호를 조합한 것이 문장이며, 문장에는 의미가 있을수 있다. 의미는, 문장이 관측을 통해 검증된다는 것을 뜻한다. 의미있는 문장이란, 관측으로 옳고 그름을 결정할수 있는 기호조합을 말한다. 의미있는 문장은, 검증 가능한 기호조합이다.

 

여기에서 의미가 기호의 속성이라고 말할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의미있는 기호조합은, 의미있는 문장이다. 의미있는 문장으로, 미래의 사건을 말할수 있다.

문자는 언어를 표현하는 물리형태이다. 문자는 말을 다른 물리형태로 만든 것이다.

 

도저히 안되겠다. 그냥 넘어가자.

 

“이 문장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대신에 “이 문장은 유의미하다"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이런 변형된 표현은 의미가 기호의 속성이지, 기호에 덧붙여진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유의미한 기호 조합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지 않은 사건들, 특히 미래의 사건을 유의미한 기호 조합을 가지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옳은 문장만이 아니라 유의미한 문장에까지 확장해 사용하면, 언어를 이론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런 확장은 기호 사용자로 하여금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사건을 기술할 수 있게 하고, 또 기호 사용자가 진술한 것들 중에서 옳은 것으로 간주하기에 가장 권장할 만한 것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한다." (286쪽)

 

문장을 검증하는 방법

 

1) 직접 관찰을 통한 직접 검증

2) 직접 관찰을 근거로 하는 귀납추리의 도움을 받은 간접 검증

 

한스의 주장을 가지고 몇시간을 이야기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분명히 뭔가 얻은 것이 있는데, 체계를 갖추어 전달하기가 힘들다.

 

귀납추리와 귀납지식은, 연역과는 달리 필연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확실한 지식이 될수 없다. 귀납추리와 귀납지식에 힘을 불어넣는 것은 확률의 개념이다. 양자세계가 확률에 의해서 움직이듯이, 미래를 미말하는 지식은, 확률로 이야기할수밖에 없다. 추정할수 밖에 없다. 귀납으로 미말한 지식이 높은 확률로 사실이라고 관측된다면, 귀납지식은 이제 기능지식이 될수 있고, 귀납지식으로 미래를 이야기할수 있다.

 

"기능지식 개념은, 이성주의가 2000년 동안 지식에 끌어들인 신비한 것들을 지식에서 모조리 제거한다. 기능지식 개념은 지식의 성격을 아주 단순화한다. (중략) 지식론이 지식을 기능하는 것이라고 명료하게 진술할 수 있으려면, 먼저 선험종합지식이라는 무거운 짐(중략)을 벗어 버려야 한다.

 

따라서 지식이 기능을 한다는 것, 즉 지식이 예측을 위한 최상의 도구임을 증명하는 일은, 확률에 대한 만족스런 해석을 발견하기 전에는 이뤄질 수 없었다. 경험주의가 귀납 추리와 확률의 사용을 설명할 수 없는 동안에는, 그런 증명은 단지 계획일 뿐 생학이론이 아니었다. 경험주의의 계획 - 즉 모든 종합진리가 관찰에 의해 얻어진다는 원리와 이성이 지식에 기여하는 것은 오직 분석하는 것뿐이라는 원리 - 은 19세기와 20세기의 세마가 그것에 필요한 수단들을 마련하기 전에는 성취될 수 없었다. 우리 시대에 와서야 정합한 경험주의를 보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288쪽)

 

* 미말 prediction 預測 ; 미리 말하다

 

이 이야기 이전에 주관과 객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해하지 못해서 일단 넘어간다.

 

"예컨대 전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선을 통해 흐르거나 빈 공간을 파동으로 이동하는 전기라 불리는 물리 현상이 있다는 가정을 도입한다.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침의 기울어짐이나 라디오의 수신기에서 들려 오는 음악과 같은 현상이다.

 

전기는 결코 직접 관찰되지 않는다. 나는 이런 물리현상에 대하여 '추리된 것'이란 뜻의 추리물 (illata)이라 부르겠다. 추리물은 관찰 가능한 사물들의 세계를 이루는 구체물(concreta)과 구별된다. 추리물은 또한 추상물 (abstracta) 과도 구별되는데, 추상물은 구체물들의 조합이며 전체를 포괄하기 때문에 직접 관찰될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부'라는 말은 관찰 가능한 현상 즉 구체물 전체를 언급하며, 이 관찰 가능한 것들 모두를 연관 관계로 총괄하는 약어이다. 추리물은 구체물들의 조합이 아니라 구체물들에서 추리된 별개의 것이다. 추리물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구체물을 근거로 하여 추리된 거그한 것일 뿐이다." (293쪽)

 

* 거그한 = 蓋然의 = 거의 그러한이런저런 판본을 누비다가 결국, 중원문화에서 12년에 번역한 것을 읽기로 정했다.

 

 

 

임마누엘 칸트(1724~1804)의 임마누엘은, '신이 그와 함께 있다'라는 히브리어라고 한다. 히브리어까지 배울 생각은 없다. 칸트는, 대륙 합리주의와 영국 경험주의를 통합한 생학을, 뉴턴역학에 기반해서 정리했다. 이렇게 정리했지만, 칸트의 작업과 작업의 결과가 무엇인지, 그가 무슨말을 했는지, 모른다. 이제부터, 라이헨바흐를 통해서 알아가 보자.

 

 

 

* 생학 philosophy 哲學 : 생각하는 학문, 생각을 생각하는 학문, 지혜를 생각하는 학문, 세계를 정리하는 학문.

 

 

 

머리말

 

 

정말 놀라운 자신감이다. 이런 자신감을 가지고 있고 싶은데, 그러하지 못하다. 다른 사람이 이런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데 대해서, 놀랍고도 부럽다. 얼른 따라가서 내것으로 만들어 가슴벅찬 기쁨을 누려보자. 아주 쉽게 정리했으니,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해할수 있을 것이라고, 한스 라이헨바흐는 말했다.

 

 

 

“생학자philosopher란, 사실에 관한 지식이건 논리관계에 관한 지식이건 지식을 확립하는 방법을 사용할수 없으며, 따라서 검증해 볼수 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라고 믿고있다. 요컨대 생학은 학문이 아니라고 믿고 있는게 현실이다. 나는 이책에서 이와는 반대되는 주장 즉 생학이 학문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려고 한다.

 

 

 

(중략) 제1부에서는 전통생학의 여러가지 결점을 검토하면서, 사변철학이 자라나온 심리의 뿌리를 파헤치겠다. (중략) 제2부에서는 20세기에 전개된 학문으로서의 생학을 펼쳐보이겠다. (중략) 생학자는 답을 제시하려는 욕망에서 너무 자주 진리를 희생시켰고, 그림처럼 말하려는 유혹에 사로잡혀 명료성을 희생시켰다. 그래서 세마학자scientist가 오류라는 암초를 피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정확성이 생학자의 언어에는 결여되어있었다.

 

 

 

(중략) 나는 이책에서 생학이 가진 오류의 뿌리를 파헤치고, 생학이 오류의 도가니에서 빠져나와 진리의 세계에 올라와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려 한다.”(6~8쪽)

 

 

 

제1부 사변생학의 뿌리

 

 

제1장 문제

 

 

"문장마다 의미를 지니도록 언어를 사용하는데 익숙해있는 세마학자 scientist” (16쪽)

 

좋다. 

 

내가 쓰려고 하는 글 

= 의미전달이 분명한 글

= 문장마다 지식과 정보가 있는 글

 

김상욱이 이런 취지의 강연을 했다. 

: 수학의 증명과정은 = 로 연결된다. 

  즉, 끊임없는 동어반복을 한다. 

  곧, 변하지 않는 것들을 포착하여 = 로 연결해서 말한다.

 

  그러다보면 새로운 지식에 도달하게 된다.

 

 

 

라이헨바흐는 생학자들의 알아듣기 불가능한 발언들을, 이상하고 불합리하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참으로 시원하다.

 

몰라도 모른다고 말하지 못하는 생학도들에 비하면 좋은 상황이지만,

 

알려고 노력하는데도 알수없는,

 

막막하고 억울하게 무지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생학을 취미로 하는 시민으로서 정말 힘든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고 라이헨바흐는 계속 주장한다.

 

게다가 생학자들이 이런 말도 안되는 발언과 주장을 해대는 것에는 이유가 있단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이성은, 모든 사물의 존재가 그로부터 비롯되는 실체다 (헤겔 / 중략) 대개의 독자는 이런식의 문장에서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할것이므로 책을 불속에 던져버리고 싶을 것이다. (중략) 생학도는 대개 불명료한 주장을 보고도 분개하지 않는다. (중략) 이성은 사람의 행동, 좀더 온건하게 말하면 사람행동의 여러측면에 드러나는 추상능력이다. (중략 / 왜 생학자는) 그처럼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말해야 했던 것일까?" (15~17쪽)

 

제2장 일반성 추구와 사이비 설명

  

일반화를 통해 얻은 세마지식과 비유(시와 그림)에 의한 설명은 다르다.

 

비유는, 이해를 돕기 위한 방법이지,

진리에 대한 서술이 아니다.

진리의 서술이 어려울때, 비유를 통해서 이해를 돕는다.

 

지구의 자전축 기울기가 어떻게 북반구의 사계절을 만드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일반화이면서 세마이다.

 

아침에 다시 해가 뜨는 것은, 사람이 매일매일 하루의 일과를 시작해야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해의 운동을 삶에 비유한 것일뿐이고, 해의 운동에 대하여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햇님에게는 아침과 저녁이 없고, 오직 베타붕괴와 중력이 있을뿐이다.

 

일반성이 높은 설명을 하려면, 더많은 상상이 아니라, 더많은 관찰자료와 더많은 비판이 필요하다.

근거없는 상상으로 무리하게 일반성을 획득하려고 하면, 사이비설명이 되고, 심하게는 사변생학이 된다.

 

“도구를 사용하면서부터 알려는 욕구가 생겨났다. (중략) 지식의 본질은 일반화 generalization이다.

(중략) 일반화와 관련있는 요소와 관련없는 요소를 가르는 일에서부터 지식이 시작된다.

 

(중략 / 기하학, 천문학, 지렛대의) 법칙들은 모두 일반명제다. 이런 법칙들은 특정한 종류의 사물모두에 대해서 주장하는 조건진술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중략) 일반화는 바로 설명의 본질이며 속성이다. 어떤 관찰사실을 설명하는 일은, 그 사실을 어떤 일반법칙에 통합하는 것이다.

 

(중략 / 끌어당김은, 중력을 표현하는 단어이면서, 사람에게 끌린다는 마음을 묘사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끌어당김은, 중력에서는 운동을, 마음에서는 느낌을 표현하는 말이므로,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자연의 사건을 사람의 사건과 비슷하다고 보는 비유가 어떤 설명도 제공할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중략) 때로 설명은 관찰하지 않은 사실이나 관찰할수 없는 사실을 가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중략) 해양화석이 산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그 지역이 한때 바다밑에 있었다고 가정함으로써 설명된다. (중략) 일반법칙은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는 추리를 하는데 사용될수 있으며, 설명은 직접경험의 세계에다 추리한 대상들이나 추리한 사건들을 보충하는데 필요한 도구가 된다.

 

(중략) 이전보다 더큰 일반성을 지닌 지식을 추구하고 싶어했다. (중략) 수많은 관찰사실만으로는 알려는 욕구를 충족시킬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지식추구는 관찰을 넘어서 일반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한 답을 발견하는데 필요한 방법을 알지 못하는 때조차 어떻게든 답을 제시하려드는 것은 실은 불행한 일이다. (중략) 일반성이 높은 지식을 열망하면 할수록 관찰자료의 양은 더욱더 많아져야 하고, 사고는 더욱더 비판적이 되어야 한다.

 

(중략) 시대의 지식이 불충분해서 학문의 설명이 이루어지지 못할때는, 이 학문의 설명을 대신해서, 상상이 일종의 설명을 제공한다. 그런데 상상이 제공하는 이런 설명은, 일반성을 얻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구를 천박한 비유를 가지고 만족시켰다. 진실을 외면하는 비유, 특히 무엇이건 사람의 경험과 유사하다고 보려는 비유를, 일반화와 혼동해서 설명이라고 받아들였다. 일반성을 추구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사이비설명(pseudoexplanation)으로 가라앉혔던 것이다. 이런 토양에서 생학이 싹텄다.”(18~21쪽)

 

비유는 사실의 기술이 아니라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는 것이다. 이성이 실체인가 아닌가? 이성은, 뇌의 전기작용이다. 뇌라는 실체가 없으면, 이성은 사라져버린다. 이성이 몸을 움직이고, 논리를 만들어내고, 손과 도구를 이용하게 하더라도 여전히 뇌의 정신작용이지 실체는 아니다. 이성이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일수 있는가?

 

“막연한 언어가 문제거리가 되는 것은, 그것이 그릇된 생각을 갖게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는, 이성을 실체에 비유하는 것이다." (26쪽)

 

정말 강렬하다. 무리한 추정을 통찰이라며 얼버무리는 것이 생학발전의 걸림돌이란다.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 하고, 통찰은 검증되지 않은 주장이라고 해야하는데, 그렇게 분리하기에는 생학자들이 말을 너무 많이 한 것이 아닐까? 과연 한스는 제대로 읽어냈을까? 아직까지는 자신감이 넘친다.

 

"생학의 통찰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너무나 자주 저자도 결코 생각하지 못한 (중략) 말장난이다. (중략 / 말장난에 불과한 것을) 변호하기 위한 해석은, 생학자의 오류를 극복하는 방법이 못된다. 위대한 사람의 오류에 왜곡된 의미를 부여(하는 / 중략) 그런 해석은 생학의 발전을 촉진하지 못한다. 생학사를 연구주제로 삼았던 생학자들이 생학의 발전을 그처럼 빈번히 지연시키지 않았더라면, 생학은 훨씬 더빨리 발전했을것이다." (29쪽)

 

 

 

엄밀한 경험을 축적하여 내린 결론과

합의된 공리를 바탕으로 내린 결론중에서

어떤 것이 더 위험할까?

 

당연히 경험으로 내린 결론이다.

예외가 발견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리에 근거한 기하학의 결론들은 위험하지 않다.

공리라는 튼튼한 기반위에서 진술되기 때문이다.

 

“(가열된 모든 금속은 팽창한다) '금속'이라든가 '가열된'이라든가 하는 말의 의미는, '팽창하는 것'이라는 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진술의 상관관계는 관찰을 통해서만 실증될수 있다. 우리는 모든 과거의 경험에서 가열된 금속은 팽창함을 발견해왔다. (중략 / 기하학자는) 각들을 재지는 않는다. 그는 '공리'라는 어떤 일반진리에 호소한다. (중략) 공리는 도형으로 설명된다. (중략) 그러므로 이 기하학의 진리는 이성의 산물이다. 이점 때문에 무수히 많은 실례를 일반화하여 발견하는 경험진리보다 기하학의 진리가 더 훌륭한 것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32~3쪽)

 

우리가 이데아를 알수 있다는 것은, 관찰을 통해 대상의 속성을 제대로 안다는 뜻이다. 아무리 실제와 이데아를 구분해서 말한다고 해도, 이데아는 실제에 대한 관찰이다. 관찰을 엄밀하게 해서 필연의 속성을 찾아내면, 그것이 곧 이데아이고, 경험으로 축적한 사실과 이성이 찾아낸 무오류의 진리를 구분하는 것은, 사실 무의미해진다. 같은 결론을 내릴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상의 사물이 지닌 속성을 통찰함으로써 실제의 사물에 관한 지식을 얻는다. 이데아에 대한 통찰은 실제 대상에 대한 관찰과 마찬가지로 지식을 얻는 한 방법이다. 그러나 이데아에 대한 통찰은, 실제 대상이 지닌 필연 속성을 파악한다는 점에서 관찰보다 더우수하다. 감각에 의한 관찰로는 무오류의 진리를 파악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성의 통찰은, 무오류의 진리를 알아낼 수있다.”(34쪽)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열심히 읽었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들과 대화하는 방법, 증명해나가는 방법말고는 특별한 정보가 없다. 한스의 이런 주장이 정말 강렬하다.

 

"플라톤이 창조한 것은 시다. 그리고 그의 '대화편'은 세계문학의 걸작이다. (중략)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을 지나치게 중대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떻게 그것을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의 제자들을 자극하여 토론하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생학은, 시인으로 전향한 생학자의 작품이다." (39쪽)

 

제3장 확실성의 탐구와 지식의 개념

 

생학의 첫번째 오류는, 알지 못하는 것을 설명하려는 비유서술(그림사고, 지식을 바탕으로 지은 시)로, 논리영역 밖에 있는 정신의 요구에 기인한, '논리밖의 동기(학문너머의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생학자는, 학문으로 대답을 제시할 수있는 수단을 갖지 못한 시기인데도, 물음에 답하려 시도하기 때문에, 학문에 속하지 않은 언어로 말하게된다.”(40쪽)

 

상상한 것을, 추정한 것을, 특별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시처럼 은유를 통해 이야기하면, 그것이 마치 학문인 것처럼 생각된다.

 

아니다.

상상은 여전히 상상일뿐이다. 설명하는 지식은, 재현가능하고, 오해없이 이해되어야 한다.

 

“생학자는 알려는 욕구를 억제하지 못하는 것같다. 우리는 생학정신이 시인의 상상과 융합되어 있음을 생학사 어디에서나 발견한다. 생학자가 묻는 물음에 대해 시인이 대답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학책을 읽을 때, 제시된 답보다는 오히려 제기된 물음에 더 주의를 집중해서 읽어야한다. 근본물음을 발견한 일, 그 자체만으로도 지성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기여를 한셈이기 때문이다.” (40쪽)

 

생학의 두번째 오류는, 꿈(환상)과 실제세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성으로 진리를 창조할수 있다고 믿으면,

이성이 아닌 사람의 정신작용,

즉 여러가지 감정이나 본능, 환상으로도 진리를 창조할수 있다고 믿게 되어,

결국에는 신비주의로 빠질수 있다.

 

이성은 경험에 의해 끊임없이 검증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확실한 것을 추구한 플라톤은, 하늘을 관찰한다고 해서 진리를 발견할수 없다고 했다. 예외없는 영원한 법칙을 찾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찰은 포기하고, 이성을 수단으로 삼아 생각을 많이 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모든 주장의 근거들도, 그당시의 사람들이 받아들일수 있었던 자연법칙이나 사회법칙들이었다. 이성이 근거가 아니라 '법칙들의 기억'이 근거가 되었다.

 

"생학자로 하여금 지식에서 관찰의 중요성을 무시하게 만드는 것은, 확실성에 대한 추구이다." (46쪽)

 

"우리가 꿈을 꿈으로 아는것은, 다만 나중에 깬후에 있는 일이다. (중략) 생학자는 항상 감각지각을 신뢰할수 없음을 고민하여 왔다. (물속에 일부를 넣으면 굽어보이는 작대기와 사막의 신기루처럼 / 중략)

 

현대의 경험세마는 empirical science 수학방법과 관찰방법의 성공한 결합이다. (중략) 플라톤이 수학방법과 경험의 결합에 의하여 얼마만큼 많은 일이 달성될수 있는가를 몰랐음은 물론 사실이다. (중략 / 플라톤은) 자연지식이란 관찰을 요구하지 않고 이성에만 의하여 도달된다는 확신을 표현하고 있다. (중략) 확률에 의존한 논의가 생학자에게는 가짜이기 때문에 그는 오직 허용할수 있는 진리의 근원으로서 수학으로 향한다.

 

(중략) 이성을 물리세계 지식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생학을 합리주의(플라톤의 이상주의 포함)라고 했다. (중략) 이 인식론에서는 이성이, 그것에 의하여 물리세계의 일반법칙을 발견하는 힘을 스스로 가진다고 믿는다. 진리의 근원을 찾을때, 경험관찰이 한번 포기되면, 그것은 얼마 가지않아 신비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성이 진리를 창조할수 있다면, 사람의 정신 중 다른 것이 만들어낸 것도 지식과 마찬가지로 신뢰할수 있는 것이라 여겨질는지도 모른다. (중략) 논리를 갖춘 통찰이 물리세계의 여러 성질을 드러낼수 있다는 생각도 피타고라스주의자에 그 기원이 있다."(42~7쪽)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으면서도 빙빙 도는 기분이었는데, 한스는 그냥 불가능한 신의 존재증명을 하는 신학논의라 잘라말한다. 세마학자scinentist는, 신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없고, 그런 목적을 가진 논리는 틀리기 쉽다고, 딱 잘라 말한다.

 

회의하는 내가 존재하고,

내 생각이 완벽한 무엇을 생각하므로

완벽한 신은 존재해야하고,

신이 존재하므로

신이 만든 세상이 존재해야한다는 이야기다.

 

쉽게 말하면,

나와 신과 세계는 그냥 존재해야한다는 것이다.

 

증명은 없다.

 

자신의 능력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지만, 실패했는데,

자기의 책이 공격당하지 않는 좋은 보호막이 될것으로 생각해서 그냥 적어둔 것으로 추정한다.

 

"(확실한 것을 추구한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나는,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의심할수 있다 ; 내가 의심하고 있을 때에는, 나는 생각하고 있다 ; 내가 생각하고 있을때, 나는 존재해야 한다. (중략) 자아가 있기 때문에, 신은 있어야 한다 ; 그렇지않으면 자아는, 무한한 존재의 관념을 가질수는 없을 것이다 ; 우리를 에워싼 사물들 역시 존재해야 한다 ; 그렇지 않으면 신이 사기꾼일 것이기 때문에 ; 이 신학논의는 데카르트같은 유명한 수학자가 제출할 때는 정말 이상하게 여겨진다. (중략) 논리의 탐구결과가 예상 목적에 의하여 결정된다면, 우리가 어떤 다른 이유로 확립하고 싶어하는 결과의 증명도구로서 논리가 사용된다면, 그러한 논리는 틀리기 쉽다." (48~9쪽)

 

확실한 것을 바탕으로 더 높은 지식을 추구하려는 갈망이나 기대가, 경험을 무시하는 오류를 낳는다.

 

"논리를 바탕으로 한 증명이, 그 증명이 지니는 확실성은, 지식의 이상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모든 지식이 논리학만큼 신뢰할만한 방법들에 의해 확립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하게 된다.

 

 

 

논리증명은 연역deduction이라고 불린다. 결론은 논증의 전제라 불리는 다른 진술들에서 연역함으로써 얻어진다. (중략) 연역의 가치는 그것이 공허하다는 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중략) 주어진 진술에서 다른 진술로 진리를 변환시키는 것이 연역이 지닌 논리기능이다. (중략) 연역은 다른 종합진리가 이미 알려져 있지 않는한 종합진리를 확립할수 없다." (53~4쪽)

 

 

 

종합진술은 감각 경험으로 얻어진 지식이다. 예외가 나타날수 있다.

 

 

 

"분석진술은 자기설명이며 공허하다 (중략) 반면에 사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진술들은 종합진술이다. 다시 말해서 종합진술은 우리의 지식에 무언가를 덧붙인다. 그러나 경험에서 얻어진 종합진술은, 모두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이어서 확실한 지식을 제공해줄수 없다." (54~5쪽)

 

 

 

칸트의 존재론 증명과 분석진술, 그리고 종합진술에 대하여.

 

 

 

1) 신은 무한히 완전한 존재자이다.

 

2) 무한히 완전한 존재자는 필수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 존재라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

 

3)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신이 존재한다는 진술은, 감각 경험의 지식이 아니라, 선험종합진술이라고 한다. 그런데, 1)과 2)는 분석진술이다. 어디에도 경험과 감각은 없다. 신의 개념을 만들고, 신의 존재를 규정했다.

 

 

 

칸트(1724~1804)는 선험종합지식이 있는가를 물었다. 선험이란, 경험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닌, 이성(또는 이성의 통찰력)에 의해서 얻어진 증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옳은 것을 말한다. 한스는 이것을 경험지식에 대한 교묘한 해석이라고 평가한다. 세마는 관찰과 경험, 귀납 추리, 이성에 의한 일반화에 기반한다. 이와는 달리 칸트는, 세마는 인과론이라는 선험종합진리에 의해 발전한다고 말한다.

 

 

 

"칸트는 기하학의 공리들을 선험종합진리라고 생각했다 (중략) 기하학의 정리들이 실제에 적용된다는 확신이 서면, 공리들이 옳다는 것이고, 따라서 공리들을 선험종합진리라고 믿게 된다. (중략) 연기의 무게를 결정하는데에는 질량은 불변이라는 가정이 들어있다. 따라서 칸트는 질량보존의 법칙은 선험종합진리라는게 밝혀(진 것 / 중략) 또다른 선험종합진리는 인과원리다. 우리는 관찰된 사건의 원인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있지만, 그 사건이 원인없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중략) 즉 세마는 선험종합지식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57~9쪽)

 

 

 

종교가 차지하던 자리에 세마학자가 앉기 시작했다. 그럴수는 없겠지만, 종교와 세마가 서로 보완하는 관계로 나란히 서있다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세마에 대한 믿음이 너무 커져서, 오류가 없는 명백한 상태가, 사람들이 종교를 버리고 세마에 매달리는 결과를 낳고 있다. 정말인가?

 

 

 

"마치 예언자보다 더 열광하는 신도처럼 세마를 신봉하는 생학자는, 세마의 성과들이 토대로 하는, 관찰과 일반화가 보증해주는것 이상으로, 세마의 성과들을 신뢰할 위험이 있다. (중략) 세마science는 원래 종교가 맡았던 사회의 역할 즉 안전을 보장해주는 일까지 떠맡아버렸다. 신에 대한 믿음은, 대부분 세마에 대한 믿음으로 대체되었다. (중략) 확실성을 보증받으려는 신학의 사고방식이 세마를 무오류의 것으로 간주하는 생학에서 다시 나타났다." (60쪽)

 

 

 

칸트는, 유클리드가 기하학 문제들을 풀어갈때, 처음으로 한 일이, 선-점-면-직각-평행 등을 정의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의에 기초해서 찾아낸 기하법칙들이 선험지식이라고 주장한 근거가 무엇일까? 기하학법칙을 이용해서 실제 구조물을, 너무도 거대하고 믿기지 않은 구조물을 만들수 있기 때문이었을까? 너무나 확실하고 자명한 것이기 때문에 선험종합지식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인과론도 콩심은데 콩이 나다보니 알게된 경험법칙이고, 질량보존의 법칙이나 기하학의 공리들은 증명하거나, 전제하고 관찰해서 얻은 법칙들이다. 선험종합지식은 설명할수 없다.

 

 

 

"칸트는 선험종합지식이 있다는 것을 설명할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략) 칸트에 따르면 경험지식을 체계화시키려면 기하학의 공리들, 인과원리, 질량보존의 법칙과 같은 원리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런 원리들은 본래 사람의 정신에 내재되어있고, 우리는 세마를 구성할때, 그 원리들을 규칙원리로써 사용한다. 따라서 칸트는 그런 원리들이 필연으로 타당한 것이라고 결론내린다." (61~2쪽)

 

 

 

시간과 공간이 변한다는 생각은, 아인슈타인 이전에 없었던 것이다. 시공간의 크기의 다름은, 간단한 증명과정을 거쳐 확인할수 있다. 그런데, 칸트가 살던 시대에는 시공간이 변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러므로 절대변하지 않는 요소가 있고, 그것을 선험종합지식이라고 생각했다.

 

 

 

잘 모르겠다. 절대변하지 않는 것들도, 관찰과 분석으로 얻어진다. 가만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난로가에 앉아서, 회의하는 나의 존재를 믿는다고해서, 얻어지는 지식들이 아니다. 확실한 것과 인과론, 선험종합지식 등 모든 것이 새로운 지식개념이 등장하면서,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불태어졌다고, 한스는 주장한다.

 

 

 

"(칸트는) 뉴턴 물리학을 신봉함으로써 확실성에 대한 갈망을 채우려했던 시도(이다. / 중략) 사실 칸트의 철학체계는 절대공간, 절대시간, 자연에 관한 절대 결정론을 가정하고 있는 물리학을 토대로 삼아 세워진 상부구조의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해야 한다.

 

 

 

(중략) 경험은 언제나 선험원리들의 틀안에서 가능해야 한다는 공준은, 칸트체계가 상정하고 있는 보증받지 못한 가정이다. 즉 칸트의 체계가 의존하고 있는 증명될수 없는 전제이다. (중략) 오늘날의 물리학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들, 인과원리, 질량보존의 법칙을 더이상 선험종합지식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중략) 우리는 이런 경험을 통해 어떤 체계든 몰락할 것이라고 예견할수 있을만큼 현명해졌다. (중략) 확실성 추구는, 영원한 진리를 요구할 모든 권리를 박탈해 버리는 지식개념이 나타나자, 과거의 생학체계속에서 불타 없어지지 않을수 없었다." (61~6쪽)

 

 

 

제4장 도덕률 추구와 윤리-인식 병행론

 

 

덕은 네가지의 마음이라고 맹자는 말했다. 가련하게 여기는 마음(측은지심), 부끄러워하는 마음(수오지심),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마음(시비지심), 양보하고 겸손하려는 마음(사양지심). 이 마음들은 지식과는 달리, 사람이 태어날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닐까? 가지고 태어나는 이 마음들을, 실천하도록 교육하는 것일까? 만일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면, 이 마음들 자체를 가르치는 것일까? 일부는 가지고 태어나고, 일부는 교육으로 얻는 것일까?

 

 

 

소크라테스의 이런 시작은 이해하겠는데, 풀어가는 방식과 결론은 정말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소크라테스는 덕도 지식과 같이 가르칠수 있다고 말한다.

 

 

 

생학은 왜 도덕윤리와 연결되는 것일까? 생학의 과제가 왜 도덕일까? 생학은 생각하는 것이고, 생각을 생각하는 것이며, 지혜를 말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올바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다. 지혜롭다는 것은, 자연과 사람에게 유용한 것이고, 자연과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도덕윤리다. 세계를 올바르게 바라본다는 것은, 지금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일이다. 선한 일은 하고, 악한 일은 거부한다. 그러므로 역시 윤리다.

 

 

 

그러므로 생학은, 도덕윤리와 연결되어 있다.

 

 

 

"소크라테스 : 그렇다면 덕이 학문이나 지식의 일종이라면 , 그것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겠지?

 

 메 논 : 물론입니다.

 소크라테스 :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가설 탐구를 끝낸 셈이 됐네. 만일 덕이 학문이나 지식의 일종이라면 가르칠수 있는 것이고, 만일 덕이 학문이나 지식의 일종이 아니라면 가르칠 수없는 것이니까 말일세.

 

 

 

(중략) 윤리의 통찰은, 기하학의 통찰과 병행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기하학 지식과 같은 것이 있다면, 윤리의 지식 역시 있어야 한다. (중략) 이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신조는 덕이 지식이라는 것을 기본주장으로 삼고있다고 볼수 있다. (중략 / 윤리-인식병행론) 만일 어떤 사람이 부도덕한 행위를 한다면, 그 사람은 기하학에서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 무지한 것과 똑같은 의미로 무지하다." (67~9쪽)

 

 

 

특정 종교는 특정의 윤리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이성은, 모두가 동의하는, 어느 종교를 믿든 동의하는 지식에 근거를 두고, 윤리(앎)을 실천하도록 명령한다. 특정 신의 명령보다 이성이 만들어낸 도덕명령은 더욱 강력하다.

 

 

 

"윤리-인식병행론을 주장하는 동기는, 윤리를 종교보다 더 훌륭한 근거에 입각해서 확립하려는 욕구라고 볼수 있을 것같다. (중략) 논리형식을 지닌 수학을 구성한 사람은 새로운 형태의 명령 즉 이성의 명령을 발견했다. (중략) 이성의 명령은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나 안믿는 사람 모두에게 동의할 것을 요구한다. (중략) 그렇다면 윤리규칙을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의무로 확립시키는 최상의 방법은, 윤리-인식병행론 다시 말하면 덕이 지식이라는 기본주장에서 주어진다" (70~1쪽)

 

 

 

종교와 윤리-인식병행론의 공통점은, 진리를 배워서 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하나이신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과같이, 생학(윤리)를 알지못하는 무지에 의해 부도덕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그러므로 교육을 통해 앎에 이르게 되면, 하느님을 믿게 되고, 도덕에 바탕을 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데, 안다고해서 제대로 실천하며 건실한 삶을 살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종교인들이 매일같이 회개하는 이유는, 알면서도 죄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학자들은, 잘 모르고도 말을 많이하면 엉터리고, 조용하면 무지하거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말할수도 없고 실천할수도 없으니, 확실한 진리를 추구하는 학자들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연구에 매진하며 산다. 이런 상황에서 스피노자가 위대한 것은, 생각하고-알고-말한데로 실천했다는데 있다. 

 

 

 

뉴턴과 스피노자는, 데카르트(~1650)와 갈릴레오가 죽고(~1642) 태어나서 활동했으므로 그들의 세마를 받아들여 지식-사고체계를 만들었고, 스피노자는 아마도 뉴턴과 비슷한 세마수준에서 사고했을 것이다.

 

 

 

"윤리-인식병행론을 극단의 형태로 표현한 생학체계는, 스피노자(1632~1677)의 윤리학이다. (중략) 스피노자는 열정이란 영혼의 부적당한 관념에서 나온 것이라는 이론을 전개한다. 이 이론은 부도덕이 무지라는 소크라테스의 이론에 해당된다. (중략) 열정이란 슬픔을 유발시키는 것이므로 악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열정의 힘을 극복할때 와아하게 happy 된다. (중략) 우리를 예속에서 해방시켜 주는 힘은 이성에 있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금욕주의이며, 선이란 단지 지식에 의해 얻어지는 지식쾌락에 불과하다.

 

 

 

(중략 / 한스 라이헨바흐는) 스피노자의 명성이 그가 생학에 공헌했기 때문에 얻은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인격이 훌륭했기 때문에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그는 안경렌즈를 갈아 생계를 유지했고, 대학교수직을 사절했다. (중략) 그는 온갖 비판에 대하여 무관심했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친절했고, 그리고 결코 어떤 증오심도 표시하지 않았다." (71~2쪽)

 

 

 

스피노자는 논리에 따라 증명가능한 윤리법칙들과 그 법칙들에서 유도되는 윤리들을 제시하고 있다. 철저하게 기하학의 논리전개를 따른다. 전제를 뛰어넘는 과도한 결론에 도달하기는 하지만.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자제와 지성연구를 최고선으로 여기는 냉철한 인격을 가진 사람의 신조를 표현해놓은 것이다. (중략) 그의 결론은 전제의 내용을 훨씬 넘어서 있다. (중략) 윤리학을 소크라테스처럼 지성화하여, 감정을 경멸하는 윤리학을 건설하려 했다. (중략) 스토아학파 시대부터 생학자philosopher란 열정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공공연하게 인정받은 것이었고 (중략) 나는 왜 철학자가 그처럼 감정에 무딘 사람상을 찬양하고 그런 생활을 해야하는지 이해할수 없다. (중략) 삶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정열이다. 이 원칙은 생학자에게도 적용된다. (생학이나 논리학에 대한 열정이든 다른 분야에 대한 열정이든)" (72~3쪽)

 

 

 

공리에서 출발해서 어떤 정리들을 말하게 되면, 그것은 공리와 정리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공리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정리는 참 또는 진리라고 말할수 없다. 여기에서 증명되어야 할 것은 공리의 참 또는 진리여부다. 만약에 공리를 참이나 진리라고 약속한 것이라면, 그것은 증명할수 없어서 약속하고 합의한 것이 된다.

 

 

 

그런데, 윤리학의 공리들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윤리는 지식이므로 가르쳐질수 있다. 윤리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윤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제와 지성연구가 최고선이다. 열정은 슬픔을 유발하는 악이다. 열정이란 영혼의 부적당한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것들을 말하는가?

 

 

 

"기하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윤리학의 공리들은 연역논증의 출발점에 불과한 것으로, 이 공리들로부터 일련의 추론을 통해 계속 그다음 결론을 이끌어낸다. 윤리학은 지식이다.

 

 

 

(중략) 연역은 궁극의 진리를 발견하는 수단이 아니라 단지 여러 진리를 연결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중략) 윤리학의 공리들은 이 윤리학의 공리들로부터 연역되는 윤리학의 정리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논리에 따라 증명이 가능한 것은 '만약 이 공리들을 인정한다면, 이 정리들 역시 인정해야 한다'와 같은 만일 ~라면, 그러면 ~이다라는 형식을 지닌 두 진술사이의 관계뿐이다. 따라서 이런 분석은 윤리학의 정당성 문제가 윤리학의 공리들의 정당성 문제로 환원될수 있음을 보여준다. (중략) 연역이라는 방법은 신뢰문제를 공리에서 정리로 전환할 뿐이지 신뢰문제에 해답을 줄수는 없다." (73~6쪽)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스피노자를 거쳐 다시 칸트로 간다. 윤리학의 공리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를 분석하자는 것이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제1준칙은, 공동체의 윤리와 합당하게 너의 행동윤리를 결정하라는 말이다. 공동체의 윤리는 집단이, 사회가 선택한 윤리이기 때문에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한스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칸트의 논리는 정확했지만, 논리의 언어가 아니라 시를 쓰듯 도덕철학을 완성했다고 본다. 

 

 

 

"윤리의 성격에 관한 문제를 윤리학의 공리들이 지닌 성격에 관한 문제로 본 임마누엘 칸트의 공적을 또다시 인정해야 한다. 칸트는 연역이란 분석의 성격을 지닌 것이어서 윤리규칙들의 정당성을 수학에서처럼 오로지 연역에만 의존해서 확보할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칸트는 윤리학의 공리들이 어떤 성격을 지닌 것인지에 대한 답을 확보한 후에야 비로소 윤리의 성격이 밝혀질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략 / 실천이성비판) 너의 행동준칙이 일반 입법의 원리가 될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라 (중략) 칸트 윤리학의 실패는 종합진술을 순전히 이성에 의해 획득할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중략) 도덕에 관한 칸트의 저작들은, 윤리규칙들과 윤리개념들에 대해 시를 쓰듯, 감탄과 경탄 (중략) 의무여! 그대 위대하고 숭고한 이름이여 (중략) 그대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거나 반감을 살 어떤것을 가지고 우리를 위협하지도 않는구나." (77~8쪽)

 

 

 

논리를 중시하면서도 의무를 신성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그의 계급의식을 반영하여, 노동과 군대에 대한 복종을 초래한다. 시간과 공간의 절대주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르는 필연과 당위, 이런 뉴턴 역학이 칸트 철학의 기반이 되었다. 목적과 동기가 즉 원인이 결과보다 중요하다는 도덕론을 펼치게 된다. 그렇지만 칸트의 도덕률은, 깊이있는 이론이 아니라 그의 계급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스는 단언한다.

 

 

 

"그의 선험인식은 그가 살던 시대의 물리학과 일치하고, 그의 선험도덕은 그가 속해있었던 사회계급의 윤리와 일치한다. (중략) 칸트는 목적이 수단보다 우월하다고 보고 (중략) 도덕률에 대한 추구는 지식에 대한 논리분석을 방해하는 논리밖동기에서 나온 것이다." (80~1쪽)

 

 

 

실제와 당위(도덕율)을 구별하는 것이 윤리학자의 윤리인식병행론이다. 윤리학에서는 당위가 실제와 일치하기 매우 어렵지만, 기하학에서는 당위(법칙)이 실제와 거의 일치한다. 그래서 당위가 아니라 실제가 어떻게 있는가, 즉 실제를 언어 또는 수학이라는 추상의 방법으로 알려준다. 기하학에서는 당위(법칙)과 실제가 부딪히면, 당위(법칙)을 버린다. 윤리학에서는 당위(도덕률)과 실제가 부딪히면, 아마도 실제를 버릴 것이다.

 

 

 

"윤리학자는 실제 삼각형과 이상 삼각형을 구별하고 (중략) 윤리학의 정리가 '어떻게 행하고 있는가'와 구별되는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에 관한 진술이라고 해석되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수학의 정리 역시 '어떻게 있는가'와 구별되는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에 관한 진술이라고 해석된다. (중략) 이상의 기하학 도형이 실제 속에서 발견될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기하학의 법칙들은 최소한 실제 대상들 사이에 성립하는 근사치의 관계를 제공한다. (중략 / 그러나) 수학은 실제가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게 아니라, 실제가 어떻게 있는가를 알려준다." (81쪽)

 

 

 

기술윤리학이라는, 모범사람을 가정하고, 실제 사람들의 행동을 근사치로 서술하는 윤리학은 가능해 보인다.

 

 

 

"우리는 기하학자가 이상삼각형을 다루는 것처럼 모범사람을 다룸으로써 최소한 이론으로는 기술윤리학을 구성해 볼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이상윤리의 법칙들이 어느 정도는 근사치로 실현될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대부분의 사람은 사실 도둑질이나 살인을 하지 않는다. 윤리의 이상은 근사치로 실현된다. 왜냐하면 윤리의 이상이 근사치로 실현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사회집단을 이루며 살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기술윤리학은 모범사람의 행동을 기술함으로써 사람의 윤리 행동에 관한 근사치의 지식을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다." (82쪽)

 

 

 

케플러는 행성의 운동법칙을 발견하는데 3년이 넘는 매우 오랜 시간을 들인다. 그 이유가 바로 별의 운동은 완벽한 원을 그릴것이라는 오랜 편견 때문이었다고 한다. 한스 라이헨바흐는 그리스 천문학이 이런 자세를 갖게 된것이, 윤리인식병행론에 근거하여 천문학에 도덕률이 개입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케플러는 튀코 브라헤의 엄밀한 관찰기록이 원운동과 맞아떨어지지 않자, 관찰기록이 틀렸다고 던져버리지 않고, 원운동이라는 고귀함을 버리고 타원운동이라는 잡동사니를 선택함으로써 행성운동의 법칙을 발견할수 있었고, 스스로를 어리석었다고 한탄했다.

 

 

 

도덕율 또는 이데아론을 우선하게 되면, 물리세계의 실재와는 다른 논리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그 대표 사례가 바로 천문학 연구의 오류다. 물리세계의 실제는 거칠고 복잡하며, 규칙으로 보일만한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데아의 세계는 단순하고 완벽하여 규범이나 규칙이 눈에 띈다. 그래서 이데아의 세계가 현실보다 가치가 높다는, 가치판단의 전환이 나타난다.

 

 

 

"그러나 윤리학자가 원하는 것은 이런 근사치의 것이 아니다. (중략) 윤리학자는 이성 또는 이데아에 대한 통찰이 도덕률들을 밝혀낼수 있다고 주장하고, 그럼으로써 수학의 기능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규범이라고 해석할 것이다. 따라서 윤리학자는 정신을 입법자라고 생각하게 된다. 좀더 온건하게 말하면, 정신은 훨씬 더 고차원의 존재영역을 주시함으로써 규범의 법칙을 지각하는 통찰도구라고 윤리학자는 생각한다. 우리는 여기서 존재의 영역이 하나만 있는게 아니라는 심리의 기원을 알수 있겠는데, 이런 생각의 주창자는 플라톤이다.

 

 

 

(중략) 별들의 궤도는 완전한 원을 그린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만일 그것이 원이 아니라면 소위 위신이 안선다는 것이다. (중략) 플라톤의 이데아설은 물리의 실재로부터 이상의 실재로 나아간 가치판단의 전환을 표현하고 있다." (82~3쪽)

 

 

 

플라톤의 이분법이 칸트까지 영향을 주었다. 칸트는 종교와 도덕에 논리를 부여하기 위해 물리세계의 실재를 뛰어넘는 이상의 세계 - 이데아의 세계인 물자체의 세계를 끌어왔다.

 

 

 

이성은 현상을 넘어서서 확장된 사고를 하는데, 왜 이율배반이 생긴다는 것일까? 이성은,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종합해서 지식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그런 다음에 이성은, 현상을 넘어서는 세상으로 나아간다. 불행히도 그 세상은 물리법칙을 따르지 않는 세계다. 그러므로 이율배반이다.

 

 

 

완전한 법칙이 지배하는 이데아의 세계 = 물자체의 세계 = 물리법칙이 따르지 않는 세계.  

 

 

 

칸트와 그를 따르는 생학자들은, 현상과 물자체라는 그럴듯한 이분법에 따라서 현상의 물리법칙을 따르지 않는 형이상학의 세계를 창조했다. 그리고 물자체의 세계는 그들만의 세계가 되었다.

 

 

 

"(플라톤보다 덜 유치한 논증) 칸트는 현상과 물자체를 구별한다. 우리의 지식은 모두 현상에 대한 것이다. (중략)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칸트는 관찰과 학문에 의해 해명되는 세계와 다를뿐만아니라, 그보다 더 우월한 선험 세계에 도달했다. (중략) 칸트는 도덕의 원리들과 종교의 원리들이 적용되는 영역을 건설하고 싶어했다. 

 

 

 

(중략) 이성이 현상의 세계를 넘어서 확장되면, 이성은 불가피하게 이율배반이라 불리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것과 이런 이성의 좌절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가시 세계의 배후에서 실재를 지탱해주는 원리들로서 신-자유-영혼불멸을 믿는데 있다는 것이다.

 

 

 

(중략) 세마를 적대시하는 생학자들은 (중략) 이상 존재의 세계를 확립한 양, 또 오직 생학자만이 그런 존재의 세계에 관한 지식을 손에 넣을수 있는양 꾸며댔다." (84~5쪽)

 

 

 

끔찍한 평가다. 헤겔을, 이론 기반은 갖추지 못했고, 생학이 답해야 할 중요한 물음들은 알지 못하고, 실수들만 반복한 사람이란다. 최근 10년 사이에 헤겔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그가 이야기한 '시대정신'이라는 단어만 회자된다. 그의 책은 난해하기만하니 읽을 필요가 없다는 충고가 난무한다. 게다가 이제는 이런 실수 투성이의 그림같은 언어만 난무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이 평가는 20세기 중반의 이야기다.

 

 

 

"헤겔은 수학의 학문들을 찬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플라톤이나 칸트와는 다르다. 더욱이 헤겔은 플라톤이나 칸트가 제기한 물음들이 갖는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에도 플라톤이나 칸트와는 다르다. 하지만 헤겔은 플라톤이나 칸트가 범했던 온갖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고" (86쪽)

 

 

 

헤겔(1770~1830)의 변증법을, 변증의 도식이라고 말하며 법칙의 수준까지 올라가지도 못하는, 사건들이 벌어진 사후에 짜맞추기식으로 정리하는 도식이고, 미래를 예측할수 없는 방법론으로, 진리여부를 증명하는 수단으로도 사용할수 없다고 한다. 놀랍다. 정반합의 과정은 작용-반작용과 같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로 생각했는데, 그냥 짜맞추기식 설명이라니. 적어도 하나는 인정한다. 어떤 사실의 진위여부를 이를 통해 증명할수 없다는 것을.

 

 

 

"자신의 생학체계를 세우는 신입생에게나 어울릴 이런 원시 도식화는 헤겔의 또다른 역사도식보다 훨씬 덜 알려진 것이다. (중략) 변증 도식은 역사발전이 이루어진 연후에야 그 역사발전을 짜맞춰 집어넣을수 있는 편리한 틀에 지나지 않는다. 변증 도식은 역사에 대한 예측을 할수 있을만큼 정확한 도식도 아니고 일반 도식도 아니다. 또 변증 도식은 어떤 세마이론의 진리여부를 증명하기 위한 논거로 사용될수도 없다." (88쪽)

 

 

 

헤겔의 역사발전론을 논리나 세마가 아니라, 논리에서 벗어난 이성주의라고 평한다. 역사가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를 예측하기 위해서, 역사는 이렇게 발전한다고 결정해두고 그틀에 맞춰서 해석하고 분석한다는 것이다. 뭇사람의 역사가 야만에서 문명으로 점점 진보해오고 있다. 민주주의가 확대하는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다. 그리고 진보의 방향을 따라가다보면, '뭇사람이 평등한 세상'이 올것이라는 것은, 가능한 생각이 아닐까?

 

 

 

"헤겔은 도덕의 목적을 역사에 반영시키기 위해서 도덕률을 추구했다. 이를테면, 선은 결국 실재가 될것이고, 우리는 역사의 과정에 참여하고 있으므로 선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보다 쉬운 말로 하면,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인가에 관한 진술이,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가에 관한 진술에서 도출된다는 것을 뜻한다.

 

 

 

(중략) 생학자는 이런 생각을 '역사의 목적에 따른 해석'이라고 부른다. (중략) 이런 생학은 이성주의가 논리의 통제를 벗어나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 (90쪽)

 

 

 

역사는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다시 묻지 않을수 없다. 경제체제에 의해 사상-문화-정치의 변동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이데올로기 운동을 경제조건의 결과라고 설명하고, 계급투쟁을 역사발전의 수단이라고 선전했던 사람은 이성주의자일수가 없다. 막스의 역사관이 취하고 있는 입장은 경험주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중략 / 그런데 인과론에 너무 집착하고 말았다.) 막스의 신조에 따르면, 항성의 궤도가 물리법칙에 의해 결정되어있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역사발전 역시 경제법칙에 의해 엄격하게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조건은 역사발전에 기여하는 여러 요인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중략) 경험주의자는 역사의 사건에서 우연이라는 요소를 완전히 제거할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이 우연이란 요소가 역사의 주요한 추세마저도 정확하게 예측할수 없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90~1쪽)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상상의 세계를 통해 덕이라는 세상의 윤리를 확립하려고 했다. 칸트는 흔들림없는 공리를 바탕으로 도덕과 종교의 생학을 완성하려했다. 헤겔은 변증의 도식을 이용해 역사발전이라는 목적을 이루려했다. 막스는 역사를 경제로 해석하는 것에서 나아가 경제결정론을 만들려 했다. 모두 이성주의의 산물이다. 기하학-경험주의-역사 등 무엇을 염두에 두었든 상관없이, 사변철학자들은 그들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 논리와 세마를 결합시키려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칸트의 체계는 이성주의가 걸은 역사노선의 최고점에 도달한 반면에, 헤겔의 체계는 19세기의 특징을 이루는 사변철학의 쇠퇴기에 속한다. (중략) 이성주의 생학자의 사고방식은, 세마의 성과와 방법을 세마바깥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논리바깥의 동기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중략) 세마와 사변생학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 한차원 높은 종합을 얻으려는 희망에서 이 두가지 것을 융합시키려 하지 말라." (92쪽)

 

 

 

재미있게 읽었지만 아직도 윤리-인식병행론, 즉 윤리와 인식은 가르쳐질수 있다는 생각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언젠가는 알수 있을 것이다.

 

 

 

제5장 경험주의의 성공과 실패

 

 

이성주의와 경험주의라는 양대 산맥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1) 이성주의는, 정신의 특별한 능력이 세마지식을 뛰어넘는 지식을 제공한다고 믿는다.

2) 경험주의는, 관찰이 지식을 얻는 일차수단이면서 사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심판관이라고 믿는다.

 

"(이성-직관-이데아에 대한 통찰-물자체의 인식) 정신의 특별한 능력이, 세마science를 뛰어넘는 지식을 제공한다고 믿는다. 관찰자가 획득할수 없는 종류의 지식, 즉 세마를 건설한 감각 관찰의 방법과 일반화라는 방법에 의해서는 얻을수 없는 지식. 이런 종류의 철학은 이성주의rationalism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중략) 수학이 아니라 경험과학을 지식의 이상형태라고 생각한다. 다시말해서 그들은 감각 관찰이 지식을 얻는 일차수단이면서, 지식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궁극의 심판관이라고 주장한다. 또 그들은, 사람의 정신이 논리 관계에 관한 공허한 진리이외의 다른 어떤 진리를 경험과는 무관하게 직접 파악할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자기기만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유형의 철학은 경험주의empiricism라 불린다." (94~5쪽)

 

관찰에 의해 얻어진 지식을 연구 분석하고, 지식들 사이의 함축관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특별한 정신능력이 없어도 관찰하고 분석하고 이해하려 한다면 얻을수 있는 것이 지식이다.

 

* 생학 philosophy 哲學 : 생각하는 학문, 생각을 생각하는 학문, 세계를 설명하려는 학문, 지혜를 생각하는 학문

 

“경험주의 생학자는, 관찰에 의해 얻어진 지식을 연구하고 분석할 따름이고, 그리하여 그런 지식이 지닌 의미나 그런 지식들 상호간의 함축관계를 이해하려한다. 경험주의자는이렇게 구성된 지식론이 생학지식이라 불리든 그렇지않든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경험주의자는 그런 지식론이 세마학자scientist가 사용하는 방법과 동일한 방법에 의해 구성된다고 생각하며, 또 그런 지식론을 특별한 생학능력의 산물이라고 해석하는 것을 거부한다.” (95쪽)

 

피타고라스 - 소크라테스(bc 5세기) -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이성주의자 또는 수학을 사랑한 생학자philosopher들의 계보와 함께,

 

 

 

데모크리토스(bc 5세기) - 카르네아데스 -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경험주의의 계보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두자. 엠피리쿠스는 경험주의의 empricism의 아버지가 되는 모양이다. 그의 이름을 따서 철학의 명칭이 정해진 것인가?

 

“(소크라테스 시절의 데모크리토스 이후, 확실성을 갖고있는 수학만이 유일하게 인정할수 있는 지식형태라고 생각하는 지적환경에서, 진리가 아닌, 잘 정립된 의견과 확률이론을 옹호함으로써, 경험주의자의 입장이 설수있는 토대를 마련한) 카르네아데스 이후 대략 300년이 지난 다음,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 A.D.150년경)는 회의주의의 신조들을 개관하는 책을 썼다.

 

우리는 이책을 통해 엠피리쿠스의 선배 철학자들인 초기 경험주의자들에 관한 것을 알 수 있고, 또 엠피리쿠스가 감각지각으로 얻은 지식에 의거해 '목적에 맞는 행동'이 가능함을 믿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수 있다. 또한 엠피리쿠스는 경험의학과를 이끄는 대표자였는데, 이 학파는 의학이라는 학문에서 사변의 부가물을 제거하여 정화하려 했다." (97쪽)

 

* empiric : one who relies on practical experience (etymology) Middle English emperiqe "physician in ancient Greece and Rome who held that treatment should be based on observation rather than theory," borrowed from Latin empīricus, empēricus, borrowed from Greek empeirikós.

 

[ 출처 ] merriam-webster Empiric Definition & Meaning - Merriam-Webster

 

수학처럼 이성에 의한 지식을 생각해낸 생학자philosopher들은 종교와 손을 잡고, 결국에는 설명할수 없는 것까지 설명해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만다. 원조는 그것을 피하려고 노력했을지라도 후대의 추종자들이 이성주의 생학자들이 생각을 적극 이용하게 되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경험주의자와 이성주의자 사이에서 제법 그럴듯한 토론이 벌어지기는 했던 모양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그런 의미에서라도 다시 훑어봐야할 모양이다. 경험주의자는 이성주의자를 상식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이성주의자는 경험주의자를 윤리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좀 웃기다.

 

“종교 신조들은 감각지각에 의존하지 않기때문에 지식을 획득할때 초감각 수단을 필요로한다. 이런 유형의 지식을 발견한 체하는 생학자philosopher는 자연스럽게 신학자와 손을 잡는다. (중략) 플라톤은 신비한 생각에 사로잡혀있는 집단이 신봉하는 철학자가 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콜라주의가 신봉하는 철학자가되었다.

 

(중략) 이성주의자는 경험주의자를 열등한 도덕윤리를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경험주의자는 이성주의자를 상식도 모르는 자라고 생각했다." (98쪽)

 

 

 

1543년 그레고리우스력을 완성한 코페르니쿠스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 on the revolution of the heavenly orb)'를 발표하였고,

 

 

 

1600년 지동설을 주장하고 삼위일체설을 부정한 브루노는, 7년동안 고문을 받다가 혀가 쇠꼬챙이에 꽂힌채 화형을 당했다.

 

 

 

1609년 케플러가 행성운동의 제1법칙인 타원운동의 법칙을 포함하는 '신천문학'을 발표하였다. 제2법칙은 행성의 공전궤도는, 속도와 관계없이 같은 시간에 같은 면적을 이동한다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달나라 여행을 한다는 아들의 소설 '꿈' 때문에 마녀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케플러의 노력에 의해 추방되는 것으로 그쳤다.

 

 

 

1632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두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 Dialogo de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 Dialogue Concerning Two Chief World System' 에서 지동설을 펼치다가 종교재판에서 죽을때까지 10년동안 가택연금형을 당했다.

 

 

 

이런 배경에서 경험주의 생학은 이론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경험주의의 대표 생학자들은 서로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로크는 베이컨을 이어받기만 했고, 흄도 베이컨과 흄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이들 사이의 토론은 있을수가 없다. 흄은 국부론과 증기기관과 미국 독립의 해에 죽었다. 

 

 

 

"경험주의를 이성주의와 대등한 입장에서 경쟁할수 있을만큼 긍정하면서도, 경험주의가 충분한 근거를 갖춘 생학이론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때는, 1600년경으로 근대세마가 발흥하면서다. 근대에 들어와서야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1561~1626),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과같은 위대한 경험주의자의 생학체계가 제시되었다." (98쪽)

 

 

 

2024년 7월 5일은,

 

24년의 햇님에 대한 지구 공전의 원일점이다.

거리는 약 1억 5,200만 km

 

지구 공전의 근일점의 거리는

약 1억 4,700만 km

 

두 지점의 차이는 500만km다.

 

엄청난 차이일까?

얼마나 춥고 더울까?

 

 

 

로크의 정신백지론, 흄의 인상과 관념을 기억할수 있을까? 모만대상인 심리사건은 감정이다. 그런데, 모만감각이 무엇인가?

 

 

 

“로크는정신이 백지상태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이 백지위에 쓰여지는 것은 경험이다. 이전에 감각한 적이 없는것은 정신 속에도 없다. 하지만 감각지각에는 두종류가 있다. 바깥대상에 대한 지각과 모만대상에 대한 지각이 그것이다. 모만대상은 생각하는것, 믿는것, 고통의 느낌, 또는 색깔감각과 같은 심리사건에 의해 주어진다. 우리는 모만대상들을 모만감각을 통해 알게된다.

 

 

 

흄은 정신의 내용을 인상과 관념으로나눈다. 인상은 모만감각을 포함한 감각에 의해 주어진다. 관념은 옛날의 인상을 떠올리는 것이다. 관념은 인상들의 결합물이라는 점에서만 관찰된 현상과 다르다. 예컨대 관찰된 황금에 대한 인상과 관찰된 산에 대한 인상은 결합되어 관찰되진 않지만, 상상할수는 있는 황금산이란 결합물을 형성할수있다. 따라서 경험주의는 이성주의와는 달리, 정신이 인상과 관념의 질서를 확립하는 일종의 종속역할을 한다고 함으로써 정신의 역할을 격하시킨다. 이 질서지어진 체계가 다름아닌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식을 구성하는 일에서 정신이 담당하는 역할은 베이컨, 로크, 흄이 사용했다고 할수 있는 몇개의 실례를 들면 쉽게 이해될수 있을 것이다. 정신은 하루동안 일어난 여러 경험 중에서 눈으로 보았던 불의 밝음을 상기해 내고, 그것을 전에 불 에 가까이 갈때 지각한 뜨거운 느낌과 연관시켜, 불은 뜨겁다라는 물리법칙에 도달한다. 비슷하게 정신은 다른날 다른 시각에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관찰한 여러심상을 비교함으로써 별의 운동법칙을 발견한다. 다시말해서 정신은, 어떤 별의 여러 위치를 상상의 선으로 연결함으로써, 그자체로서는 관찰의 대상이 아닌, 그별의 궤도를 구성한다. 내가 이런 지 식개념에서 정신이 종속역할을 한다고 할때 말하려 하는 것은 정신을 진리의 심판자라고 생각할수 없다는 것이다.” (98~9쪽)

 

 

 

* 모만 : 몸안 -> 모만 inside of the body 內部 ; 모만감각, 모만대상

 

 

 

이성의 올바른 사용법이자 자연스러운 기능이다. 물리세상을 잘 관찰하여 추리를 통해 체계를 만드는 것. 케플러가 행성운동법칙을 발견하고 확인한 것은, 브라헤의 관측자료를 참조하고 종합한 결과이다. 뉴턴의 법칙도 핼리가 혜성의 도래주기를 예측하고 맞춤으로써 확인되었다.

 

 

 

이성은 체계를 만들고, 감각을 이용한 관찰은 그 체계의 진위여부를 판정한다. 놀라운 것은 체계를 만들어 일반지식을 만들어낸 이성의 힘으로 미래를 예측할수 있다. 이것이 베이컨의 경험주의 생학이다.

 

 

 

“별의 운동이 실제로 원을 그리는지 어떤지는 지각에 의해 판정된다. (중략/그러나) 이성은 지식의 체계를 잡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도구이다. 이성없이는 감각사실보다 높은 수준의 추상사실을 알수없다. 감각은 행성들이 햇님의 주위를 타원을 그리며 돈다든가 물질이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런 추상진리에로 인도하는 것은 추리와 결합된 감각관찰이다.

 

 

 

(중략) 베이컨은 새로운 경험주의에 대해서는, 재료를 모아 소화하고, 그것에다 자신의 몸에 있는것을 첨가시켜 더 고차원의 산물을 창조하는 벌과 같다고 주장했다. (중략) 우리는 이성이, 질서라는 추상관계를, 관찰한 지식에 첨가한다고 말했다. (중략) 만일 추상관계가 일반 진리라면,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관찰뿐만아니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관찰에도 역시 적용될 것이다. 다시말해서 추상관계는 미래의 경험을 예측하는 일에도 사용된다. 이성이 관찰한 지식에 첨가하는 것은 바로 이런것이다. 관찰은 과거와 현재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반면에 이성은 미래를 예측한다" (99~101쪽)

 

이성의 한계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우리 몸이 생각에 의해서 움직여지므로, 이성이 독립된 실체로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이성은 뇌의 작용이며, 뇌는 몸이다. 이성에 의한 예측은, 이성의 독립능력이 아니라, 관찰된 결과들이 쌓여서 얻어진 결과이다.

 

더불어서 연역이라는 것은, 거대한 전제(나무)를 분석해 내놓은 하나하나의 가지들이다. 그 가지는 꽃도 있고 열매도 있어서 화려하다. 화려함은 시간이 지나면 공허해진다.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낼수도 미래를 예측할수도 없기 때문이다.

 

필연도 공허하다. 필연의 법칙도 연역에 의해 얻어진 결론이므로, 새로운 예측이 아닌 뻔하고도 공허한 결론이다.

 

결국 새로운 진리의 획득이나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귀납추리에 의존할수밖에 없다. 그러나 귀납추리는 오류를 범할수 있기 때문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귀납의 방법론으로 베이컨(또는 한스)가 제시하는 것은, enumeration이다. 목록이나 열거, 나열로 번역할수 있는데, 보다 좋은 것은, 보이는 것 모두를 하나하나 센다는 의미로, 모셈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 세익스피어(1564~1616)와함께 임진왜란의 시기를 살아간 베이컨은, 지식의 체계를 갖추기 위해, 일반지식을 만들어내기 위해 공통분류법을 적용했다. 

 

“베이컨(1561~1626)은, 이성 단독으로는 어떤 예측능력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말해서 이성은 관찰과 결합할 때만 예측능력을 갖게 된다. (중략 / 연역추리의) 결론은 전제를 분석하여 연역된다. 전제에 덧붙여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론은 단지 전제속에 들어있는 내용의 일부를 명백하게 드러낼 뿐이다. 이런 공허성이 바로 연역추리의 본질이며, 따라서 공허성은 우리가 결론이 필연의 진리라고 말할때 지불하는 대가인 셈이다.

 

(중략) 결론은 아직 관찰되지 않은 까마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또 아직 관찰되지않은 까마귀들에까지 관찰된 까마귀의 속성을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결론의 진리성은 보증받을 수없다. (중략) 일반진리를 확립하려고 한다면 그런 추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일반진리는 관찰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일반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오류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추리를 한다. 그런 종류의 추리는 귀납추리(inductive inference),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모셈에 의한 귀납 추리(inference of inductive by enumeration)라 불린다.

 

(중략) 연역추리는 전제가 미래에 관한 언급을 할때만 예측력 있는 결론에 도달할수 있다 (중략) "모든 사람은 죽는다" 는 전제는 귀납추리에 의해 만들어졌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연역논리학은 예측력 있는 이론을 정립할수 없으므로 귀 납논리학에 의해 보충되지 않으면 안된다."(101~3쪽)

 

* enumerate 낱낱이 세다 -> enumeration 열거, 목록, 셈 또는 모셈(모든것을 세는 행위)

* trifle 사소한 일 -> trifling 사소한 행위

 

베이컨이 비록 이성과 관찰을 결합시켜 사고하는 방법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경험주의의 장점과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경험과 관찰이라는 단순한 행위에서 진리를 발견할수 있고, 모셈을 기반으로 일반화를 통해 진리에 다가서지만, 언제든 반례가 나타나 오류가 있음을 드러낼수 있다고 한다. 그것이 스스로도 알고있는 베이컨의 한계다.

 

하지만 베이컨의 생학은, 뉴턴의 세마와 결합되어서야 비로소 제대로된 방법론에 다가설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영국 경험주의가 극복해야했던 것은, 수학이라는 모형을 본떠 만든 확실한 지식을, 가지려고 했던 그리스인의 이상이었다. (중략) 베이컨은 귀납추리의 중요성을 그처럼 강조하면서도 귀납추리의 약점을 아주 명료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는 귀납추리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관찰사실들을 어떤 공통속성에 따라 분류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중략) 갈릴레오가 베이컨과 동시대 사람이란건 사실이다. 또 갈릴레오의 수학방법이 베이컨의 귀납분류보다 우수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수학의 가설을 구성하는 방법(제6장)이 철학탐구의 대상이 될 수 있으려면, 이 방법은 먼저, 이 방법과 관련된 모든것과 함께 발전했어야 한다. 

 

(중략) 베이컨의 귀납논리학은 소박한 것이며, 상식이 기꺼이 사용하는 규칙에 대한 확신에 근거를 두고있다. 하지만 그것은 세마학자가 사용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세마의 방법이 처음 생겨난 시기 그리고 세마방법이 처음으로 성공을 거두어 낙관론으로 들떠 있는 시기에, 그 세마방법을 비관하기란 거의 기대할수 없는법이다. 베이컨의 귀납논리학을 세마답지 않다고 비판하는 생학사가들은, 그들의 비판에는 후세의 표준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베이컨이 죽은 다음 약 60년 후에 발표된 뉴턴의 중력이론이 나온 다음에야 비로소 연역의 방법과 귀납 추리를 결합시켜 명확한 방식으로 사용할수 있게되었다. 

 

(중략) 경험주의는 베이컨에게서 그 예언자를, 로크에게서 그 공공연한 지도자를, 흄에게서 그 비판가를 발견했다. 로크는 경험을 귀납에 의해 일반화하여 경험지식을 얻는다는 베이컨의 이론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로크는 모든 종합지식이 경험지식인가 어떤가에 관해서는 그리 명료하게 생각하지 못했던것 같다.

 

로크는 수학지식을, 절대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수학지식을 경험지식과 구별한 것같다. 로크의 말에 따르면 필연명제는 '하나마나 한 말(trifling)이거나 아니면 '교훈의 말'이다. (중략) 로크는 도덕판단을 수학의 정리와 동일한 종류의 진리성을 갖는것으로 취급함으로써 윤리-인식병행론의 지지자가 되었고, 또한 수학이 분석이라는 생각과 거의 양립할 수 없는 결론에 빠지게 되었다." (103~5쪽)

 

수학이 절대확실한 것이라면 필연의 것이고, 그러면 연역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전제에 대한 분석이 수학이다. 흄은 지식은 분석지식과 종합지식이 있고, 종합지식은 귀납으로만 얻을수 있는데, 종합지식의 필연성을 갖지 않는다.

 

“흄은 모든 지식이, 분석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경험에서 얻은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시말해서 수학과 논리학은 분석지식이고, 모든 종합지식은 경험에서 얻은 것이다. 흄이 '경험에서 얻은'이라는 말로 의미하는것은, 개념들의 기원이 감각지각이라는 것뿐만아니라, 감각지각이 모든 지식(분석지식이 아닌 지식)의 정당성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이 제공하여 지식에 첨가하는 것은 공허한 성격의 것이다.” (107쪽)

 

모든 까마귀가 검다는 주장을 포기하지 않아도 흰까마귀가 존재하는 것은 상상할수 있다. 전제를 분석하지 않는것이 귀납추리의 방법이고, 귀납추리는 필연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필연성은 연역추리에서만 나온다.

 

“우리는 전제를 포기하라는 강요를 받지않고도 그 결론이 그르다고 상상할수있다. 옳은 전제와 그른 결론이 결합될수 있다는 가능성은 귀납추리가 논리필연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귀납이 분석하지 않는 성격을 지녔다는 것은, 흄의 첫번째 기본주장이다.” (108쪽)

 

귀납은 언제나 관찰을 전제로 하기때문에 예외의 사건이 관찰되면, 귀납추리는 신뢰할수 없게 된다. 그런데도 귀납추리를 계속하는 이유는, 그것말고는 새로운 진리나 일반진리를 발견할수 없기 때문이다. 귀납추리의 결과에 대한 열려있는 자세가 무엇보다 소중하다. 진리에 도달하고 싶다면.

 

귀납추리로 진리에 도달할수 없다는 것을 흄에 의해 인정된 것인데, 그렇다면 진리는 어떻게 얻어지는가. 

 

“만일 우리가 귀납을 신뢰할 만한 것이라고 가정하면, (지금까지 성공했으므로, 예외가 없었으므로) 귀납은 신뢰할만한 것이라고 증명할수 있다. 이런 추론은 순환하는 것이고, 그래서 논증은 와해된다. 귀납이 경험을 언급함으로써 정당화될 수없다는 것은 흄의 두번째 기본주장이다. 귀납추리는 정당화될수 없다. 이것이 귀납추리에 대한 흄의 비판의 결론이다.

 

(중략) 우리는 귀납이 정당화될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귀납의 원리를 의심하면 바보가 된다는 것을, 계속 귀납 추리를 사용하여 논증하고있다. 이것이 경험주의의 딜레마다. ” (109쪽)

 

흄에 의해서 경험주의는, 미래를 예측할수 없거나 경험추리를 할수 없게 되었다. 오로지 관찰된 사실에만 주목해야 한다. 이것이 과연 경험주의의 몰락일까?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왔다

-> 경험에서 얻은 진술이외에 어떤 결론도 인정하지 않는다

-> 귀납추리는 분석하지 않는다

-> 순환론에 빠지기 때문에, 귀납추리는 경험과 관찰로써 정당화할수 없다

-> 귀납추리가 불가능하다면, 경험주의는 미래를 예측할수 없다

-> 경험주의는 관찰한 사실의 기술 말고는 아무것도 할수 없게 되었다

-> 미래를 예측할수 없는 경험주의는 끝이다. 지식은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경험주의는 철저한 경험주의가 되어, 분석진술이나 경험에서 얻은 진술이외에 어떤 결론도 인정하지 않든가 (이 경우 경험주의는 귀납추리를 할수 없고, 또 미래에 관한 진술을 모두 단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귀납추리를 인정해야 한다 (이 경우 귀납추리가 정당하지 않다는 경험주의를 포기하게 된다). 따라서 철저한 경험주의는 미래에 관한 지식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중략) 흄의 비판은 경험주의를 불가지론으로 이끌었다. 불가지론은 무지의 철학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무지의 철학은 내가 미래에 관해 알고있는 것은, 실은 미래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뿐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경험주의에 대한 신뢰에 물들어있긴 하지만 조금도 주저함이없이 이런 스스로를 파괴하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지성의 명철함에 대해 경탄하지 않을수 없다." (109 ~10쪽)

 

라이헨바하는 흄을 높이 평가하면서, 습관이라는 말로 귀납진리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흄의 침묵에 동조하지 않겠다고 한다. 흄이 도달하지 못한, 경험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을 제시할수 있다고 믿는듯하다.

 

기대가 된다.

 

“흄은 귀납에 의해 얻어진 신념을 습관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비판이 일으킨 결과를 완화시키려 했다. 그리고 흄의 책을 읽으면 이렇게 바꿔 부름으로써 그의 의심이 해소됐다는 인상을 받는다. (중략) 경험주의 생학에 대해 자신이 제기했던 핵심 도전을 부드러운 미소로 간단히 넘겨버리는 한 생학자의 이상한 측면을 엿볼수 있다. 우리는 흄의 침묵에 동조할수 없다.“ (110-11쪽)

 

한스는 경험이 습관이라는 흄의 말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서 흄이 부정했던, 귀납추리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답하고 싶어한다.

 

이성을 세계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는 원천이라는 이성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대해, 이성의 힘을 분석의 원리들을 확립하는 것으로 제한한 경험주의자들은, 새로운 난관에 부딪힌다. 지식이 지닌 예측의 성격을 설명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귀납은 일종의 습관이다. (중략) 어느 누가 내일부터는 물이 위로 거슬러 흐를거라는 가정에 의거해서 행동할수 있을까? (중략) 경험주의 생학자는 경험이 미래에 관한 지식을 제공할수 있는지 없는지 또는 제공할수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할수 있는지를 알려고 한다.” (111쪽)

 

여기서부터 어려워진다. 미래에 관한 지식이나 진술은 다르다. 현재나 과거의 지식이나 진술과는, 미래에 관한 진술은 다르다. 진리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미래를 예측하는 지식의 성격은 어떠한가? 

 

"어떻게 미래에 관한 지식을 가질수 있는가라고 묻는 대신에, 미래에 관한 진술이 정당하려면, 미래에 관한 지식의 성격은 어떠해야 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중략) 경험주의자는 어떻게 하면 관찰의 신뢰성을 예측의 신뢰성으로까지 이행할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부딪힌다. (그러나 / 중략) 지식에 관한 물음을, 예측하는 지식의 성격에 관한 물음으로 바꾸는 일은 세마science의 토대가 근본부터 바뀌기 전에는 이루어질수 없었다." (113~4쪽)

 

관찰결과를 가지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확률의 문제이다. 그런데, 흄을 포함한 경험주의자들은 "확률이 적용되는 곳은, 지식이 아니라 의견이나 신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115쪽)

 

결국 확실한 지식, 불변의 진리는 없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일까?

 

"18세기의 세마가, 자기 스스로 그동안 얻은 성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문할수 있으려면, 그 당시의 탐구방법이 지닌 한계를 알았어야 했다. 이런 발전은 19세기에 시작되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중략) 먼저 수학의 성격에 관한 생각과 인과성에 대한 생각이 수정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중략) 예측은 단지 확률인 반면에 과거의 관찰은 확실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귀납문제에 대한 최종해답이 못된다. 이런 해답은 일종의 중간 해답에 불과하다. (중략) 귀납문제에 대한 해결은 20세기 물리학에서 자라나온 지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114~6쪽)

 

제6장 고전물리학의 이중성 : 경험측면과 이성측면

 

증명되지 못한 추리들이 서로 공존했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하고 별자리의 이름을 부여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추리가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사람들은 실험을 하지 않았다. 데카르트 철학의 반대자인 가상디라는 대수도원장이 달리는 배의 돛대 꼭대기에서 돌멩이를 떨어뜨리는 실험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모스란 섬에 살았던 아리스타르코스는 기원전 200년경에 햇님중심체계를 제안했다. (중략) 프톨레마이오스는 아리스타르코스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은 논증을 폈다. 지구는 정지해 있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만일 지구가 움직인다면, 공중에서 떨어지고 있는 돌멩이는 수직으로 떨어지지 않을것이며, 또 공중에 떠있는 새는 움직이고 있는 지구의 뒤에 남게되어 지구 표면의 다른 부분에 내려앉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 17세기 가상디의 실험으로) 갈릴레오의 법칙에 따르면, 떨어지는 동멩이는 본래 배의 운동을 지니고 있어서 떨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배의 운동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118~9쪽)

 

 

 

실험의 중요성과 그리스 사람들이 실험을 하지않은 이유를 이렇게 추정한다. 경험한 것을 축적하여 일반지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수 있다. 수학과 실험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세계관이 이성주의와 경험주의를 가르고 있다.

 

 

 

“계획된 실험에 의해 사람이 만들어낸 사건을 일으켜 봄으로써 자연의 복잡한 사건을 단순한 사건들로 분석해 볼수있다. 이것이 바로 실험이 근대세마modern science의 도구가 된 이유이다. 그리스의 세마가 어떤 의미있는 방식으로도 실험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추론으로부터 경험세마로 돌아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가를 증명해 준다.

 

 

 

(중략) 그리스인들의 이성주의에는 수학에 대한 연구의 성공이 반영되어 있다. 반면에 영국 경험주의에는 근대 세마에서 실험방법 즉 자연에 질문을 던져 자연으로 하여금 '그렇다'나 '아니다'란 답을 하도록 하는 방법의 승리가 반영되어 있다.”(120~2쪽)

 

 

 

관찰과 함께 수학의 힘도 강해지면서 이성주의의 힘도 강해졌다. 뉴턴과 달리 대륙에서는 라이프니츠와 칸트에 의해 수학을 바탕으로 한 이성주의가 확대되고 있었다. 실험은 강해졌지만, 수학과 이성도 강해졌다.

 

 

 

"대륙에서는 고대 이성주의의 체계보다 방법과 설득력 면에서 더 우수한 새로운 이성주의의 체계를 건설했다.

 

 

 

이 경험주의 철학과 이성주의 철학이라는 두가지 상반된 철학 경향의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실험방법의 출현이 아무리 혁명으로 보일지라도, 실험방법은 근대세마의 두가지 주요한 도구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이다. 실험 방법 외에도 근대세마의 또하나의 도구는 세마의 설명을 정립하기 위해 수학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중략) 해왕성이란 행성이 발견된 것이다(1846년). 

 

 

 

수학의 방법은 근대 물리학에 예측력을 주었다. (중략) 근대세마의 결정론은 (운명론과는) 매우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근대세마의 결정론은 물리학에서 수학의 방법이 성공을 거둠으로써 전개된 것이다. (중략) 물리 결정론은 미래의 목적에 의한 결정론이 아니라 과거의 사실에 의한 결정론이다. (중략)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중력이론을 신봉하는 자가 아니었다. (중략) 라이프니츠는 운동이란 상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에 의거하는 공간이론을 전개했다. 라이프니츠의 공간이론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의거하고 있는 논리요소들이 예견되어 있다. (중략) 라이프니츠는 자연을 기술하는데 수학의 방법이 사용될수 있음을 알았으므로, 모든 세마가 마지막에는 수학으로 변형될수 있다고 믿었다.

 

 

 

(중략 / 예정조화설은)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사람들의 마음은 서로 작용하지 않는다. (중략 / 그런데도) 마음들이 예정된 방향으로 서로 엄격하게 일치하는 단계들을 밟으며 끊임없이 가고 (있다)." (122~30쪽)

 

 

 

콩심은데 콩난다는 인과원리를 귀납의 방법으로는 알수 없다는 주장을 이해할수가 없다. 인과원리는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서 강력하게 증명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과원리의 발견이 아니라, 개별 원인들을 발견한 것이며, 이성에 의해 인과원리는 획득되어 있다는 말인가?

 

 

 

"칸트에 의하면 인과원리는 선험종합진리이다. 칸트는 우리가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안다고 생각했다. 관찰이 하는 일은 개개의 원인을 발견하는 일뿐이다. (중략) 귀납추리는 인과원리와 같은 물리학의 일반진리를 확립하는 일에는 사용할수 없다. 물리학의 일반진리는 이성에 의해 주어진다. (중략) 칸트는 이런 논증에 의거해서 그가 귀납에 대한 흄의 비판을 극복했다고 믿었다. 경험주의자가 회의주의로 물러나면서 포기한 자리를 선험종합진리의 확실성이 차지했다. 이것이 칸트철학의 본질이다." (133쪽)

 

 

 

페루에서 황금을 찾는 사람에게 '페루에 황금이 있다'는 말은 무슨 도움이 될까? 위안은 될 것이다. 한스는 칸트의 오류를 이렇게 지적한다.

 

 

 

칸트는, '원인이 있다는 것을 가정해야 원인을 찾을수 있다'고 말했다. 페루에 황금이 있다는 것을 가정해야 황금을 찾을수 있다는 것처럼. 만일 원인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겠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되는가? 원인을 찾을수도 있고, 못찾을수도 있다. 페루에 황금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황금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페루에 황금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있을만한 곳을 찾아보는 것이 아닌가. 어떤 행동을 위해서는 논리전제가 아니라 궁금증과 탐구정신이 필요하다.

 

 

 

"모든 지식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것은 의심할수 없다. 그렇다고 모든 지식이 경험에서 나오는 건 아니다. 칸트는 이런말로 '순수이성비판'을 시작한다. (중략) 칸트에 의하면 우리가 특정한 인과법칙을 발견하기를 원한다면, 인과원리가 옳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논리 전제'란 용어는 논리관계를 뜻하는 말이다. (중략) 만일 당신이 특정한 원인 예컨대 조수의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면, 당신은 원인이 있다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 그렇지않으면 원인을 기대하는 일조차 불합리할 것이라고 칸트는 주장한다.

 

 

 

이 논증은 오류다. 우리가 특정한 원인을 찾으려할때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가정할 필요가 없다." (134~5쪽)

 

 

 

아, 시원하다. 한스가 느낀 이 명쾌함을 나도 느낄수 있을지 자신할수 없으나, 최대한 가까이 가보려고 한다. 확실한 것을 추구해서는 안되지만, 현재 수준에서 확실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구분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어떤 과제를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지를 알수 있기 때문이다.

 

 

 

연역은, 전제를 분석하는 공허한 필연이다.

 

귀납은,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가지만 오류를 극복할수 없다.

 

 

 

"고전물리학은 연역추리와 귀납추리를 가지고 복잡한 그물망을 만들어 예측방법을 고도로 효율높게 발전시켰다. 그러나 물리학자건 생학자건 미래를 예측하는데 사용되는 이 방법을 어떤 근거에서 신뢰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제시할수는 없었다.

 

 

 

18세기 말엽에 물리학에 관한 생학은 궁지에 빠졌다. 사람의 정신이 창조한 지식의 전체계는 이해할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었다. 경험주의자인 흄은 이점을 솔직하게 시인했는데, 이점에서 흄의 주장은 물리학의 토대가 이성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이성주의자인 칸트의 주장보다 우월한 것같다.

 

 

 

물리학자들 자신은 이런 생학의 궁지를 깨닫지 못했다. 물리학자들은 관찰하는 일과 이론을 구성하는 일을 계속했고 또 성공의 행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마침내는 물리학자들도 역시 궁지에 빠졌다. 이런 물리학의 궁지에서 새로운 물리학이 솟아나왔다. 이런 과정에서 생학의 궁지도 역시 극복되었다." (137쪽)

 

 

 

제2부 새로운 철학의 성과

 

 

제7장 새로운 철학의 기원

 

 

한스는 선언해버린다. 모든 물음들에 대해 답하기에 충분한 전문지식이 갖춰졌다고.

 

 

 

진리는 귀납지식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진리는 연역분석과 관찰에 의해 논리가 완벽해진다. 세마의 전문연구가 발전하면, 진리도 발전한다.

 

 

 

"진리는 논리분석을 필요로 한다. 사변철학의 역사는 답할수 없는 물음을 제기했던 사람들이 범한 오류의 역사이다. (중략) 상상에 호소하는 은유나 그림언어로 기술함으로써 해결되는게 아니고, 전문연구에 의해 해결된다. (중략) 생학체계는 세마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했다. 문제들을 논리의 측면에서 발전시키는 일은 세마학자의 일이다. (중략) 마침내 전문지식은 생학의 물음들에 답하기에 충분할만큼 완전해졌다." (141쪽)

 

 

 

홀사person보다 뛰어난 거대한 무리, 무리의 세마역량이 새로운 생학의 시대를 연다. 질문을 바꾸고, 수학을 비롯한 높은 추상사고 능력을 도구로 해서, 답해야 할것에 답한다. 그게 뭔지 궁금하다.

 

 

 

"역사에 나타난 어떤 문명도 그 문명을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 그처럼 격렬한 지성훈련을 요구한적이 없었다. 19세기의 생학philosophy은 그러한 추상사고력의 산물이다. 그것은 그림언어로 말하고 탐미욕구에 호소하는 체계를 세워 설득하는 해결책을 제공하지 않는다.

 

 

 

19세기의 생학은 추상사고 훈련이 되어있는 사람만이 이해할수 있는 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생학도가 모든 문제를 기사의 정밀성과 수학자의 엄밀성을 가지고 연구할것을 요구한다. (중략) 물음을 일단 대답가능한 물음이 되도록 바꿔야만 했다.

 

 

 

(중략) 생학체계는 칸트에서 끝났고, 그후의 생학체계를 칸트나 플라톤의 체계와 같은 수준에서 논의하는 것은 생학사에 대한 오해이다.

 

 

 

(중략) 우리 세대에 와서야 비로소 새로운 부류의 생학자, 즉 수학을 포함한 세마의 전문기술을 습득하고 생학의 분석에 관심을 집중한 생학자들이 생겨났다. (중략) 학문으로서의 생학을 하는 전문생학자는 이런 발전의 소산이다." (145~7쪽)

 

 

 

제8장 기하학의 성격

 

 

시간과 거리의 상대성과 베타붕괴를 일으키는 양성자의 충돌을 받아들이려면, 고전물리학의 법칙에서 벗어나야한다. 고전물리학도 모르니 현대물리학을 알턱이 없다. 백지상태이니 오히려 경계를 넘기가 쉬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모르는 상태에서 무엇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멍해질 것이다. 8장을 읽고나니 내가 지금 그렇다.

 

 

 

"세마science의 발전에 힘입어 온갖 절대진리와 선입견을 버리게 되었다. (중략) 고전물리학의 중요한 법칙은 단지 우리의 일상환경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에만 적용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고전물리학의 법칙은 천문학의 차원과 미시차원 둘다에서 새로운 물리학법칙으로 대체되어야 했다. (중략) 물리학의 법칙은 경험법칙이지 이성이 우리에게 강요한 (선험종합)법칙이 아니라는게 명백해졌다." (148쪽)

 

 

 

이해가 되는것 하나에 또하나의 이해가 되는것을 보태가는 방식으로 나아갈수밖에 없다. 모르는것은 뛰어넘겠지만, 이해하기위해 거듭거듭 노력은 할것이다. 아주 조금만이라도 알고 싶다. 명백한 유클리드 체계의 공리들이 어떤 조건에서는 무너진다는 이야기다.

 

 

 

공리와 정리의 관계. 공리는, 너무나 명백해서 증명이 필요없는 사실(절대명제). 정리는, 공리에 의해서 연역된 사실. 공리는 명백하게 참이다.

 

 

 

"유클리드 체계의 공리들은 너무나 당연하고 명백한 것으로 여겨져, 그 공리들이 옳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것처럼 보였다. (중략) 유클리드보다 한세대 앞서 살았던 플라톤은 기하학의 원리들이 지닌 명백한 자명성에 힘입어 이데아설을 주장했다. (중략) 칸트의 이론에 따르면 공리들은 선험종합진리이다." (149쪽)

 

 

 

유클리드(B.C 325?~365?)는 '원론'에서 수학의 공리주의 방법을 최초로 도입하여, 5개의 공리와 5개의 공준으로 465개의 명제를 증명하였다. 그 공리와 공준은 다음과 같다. 

 

 

 

공리 1. 같은 것과 같은 것들은 또한 서로 같다. a=b, b=c -> c=a

 

공리 2. 같은 것에 같은 것을 더하면, 그 전체는 서로 같다. a = b -> a+c = b+c

 

공리 3. 같은 것에서 같은 것을 빼면, 그 나머지는 서로 같다. a = b -> a-c = b-c 

 

공리 4. 서로 겹치는 둘은 서로 같다. a ≡ b -> a = b

 

공리 5.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 a ⊂ b -> a < b

 

 

 

공준 1. 임의의 점으로부터 임의의 점으로 직선을 그릴 수 있다. 두개의 점을 연결한 것이 직선

 

공준 2. 유한의 직선을 계속 직선으로 연장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선분은 직선으로 확장할수 있다.

 

공준 3. 임의의 중심과 거리를 가지고 한 원을 그리는 일을 할 수 있다. 중심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 원.

 

공준 4. 모든 직각은 서로 같다. 직각은 90도다.

 

공준 5. 하나의 직선이 두 직선과 만나서 같은 쪽에 두 직각보다 작은 안각을 만들 때,

 

            이 두 직선은 그것들을 한없이 연장하면 두 직각보다 작은 각이 만들어지는 쪽에서 만난다(평행선공리)

 

 

 

평행선공리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싫어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뭔가 길고 복잡하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않는다. 한눈에 의미가 들어오지않고 여러번 읽어야한다. 그런것들이 싫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결국 2천년후에 비유클리드기하학을 만들어냈다. 놀라운 일이다. 삼각형의 세각의 합이 180도가 아니라니 말이다. 그런데, 평행선 공리를 없앤것이 아니고, 새로운 공리를 만들어냈다.

 

1) 유클리드기하학 : 평행선은 하나

2) 비유클리드기하학 : 평행선은 하나 이상이다 : 볼리아이, 가우스, 로바체프스키 (쌍곡선 기하학)

3) 비유클리드기하학 : 평행선은 없다 : 리만(가우스의 제자, 구면기하학)

 

"수학자들은 약간의 공리를 다른공리에서 연역해낼수 있다는것을 밝힘으로써 공리들의 수를 최소한으로 줄여보려고 했다. 수학자들은 특히 평행선 공리를 싫어했고, 그래서 평행선공리를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중략) 비유클리드기하학은 유클리드기하학과 모순을 일으킨다. 예컨대 비유클리드기하학에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비유클리드기하학들 각각에서는 모순이 일어나지 않는다. 비유클리드기하학은 유클리드기하학이 정합체계인 것과 동일한 의미로 정합체계이다. 이리하여 다수의 비유클리드기하학이 오직 하나의 유클리드기하학 대신에 대체되었다." (150~1쪽)

 

한스는 칸트생학 즉 이성주의의 마루는 칸트인데, 바로 이런 생각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수학의 기하학과 물리세계의 기하학은 일치하는가? 칸트시대까지는 일치했었는데, 볼리아이와 리만에 의해 깨졌다는 것이다.

 

서로 모순되는 여러개의 기하학이 나왔으니, 이성은 각각의 기하학이 정합체계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심판의 자격이 없어져버렸다. 누군가 판정을 내려야하는데, 그것은 바로 세계에 대한 관찰일수밖에 없다.  

 

"수학의 기하학과 물리세계의 기하학이 일치한다는데 대해선 설명이 필요하다. 칸트가 다른사람보다 이점을 더 강조했다는 사실은 칸트생학의 장점이라 하겠다. 선험종합진리에 관한 칸트의 이론은 이런 일치를 설명하려는 한 생학자의 위대한 시도라고 생각해야한다.

 

하지만 다수의 기하학이 발견됨으로써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만일 수학자가 여러 기하학중에서 하나만 선택해 보라는 제안을 받는다면, 그 여러 기하학중에서 어떤것이 물리세계에 관한 기하학인가라는 물음이 발생한다. 이성이 이물음에 대답할수 없다는건 분명하다. 다시말해서 그대답은 경험관찰에 맡겨야한다.

 

이런 결론을 맨처음 제시한 사람은 가우스였다. (중략) 관찰한 내각의 합이 180도와 편차가 생기더라도, 관찰에서 생길수밖에 없는 오차로 인해서 편차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세계가 비유클리드의 공간이라 할지라도, 세계는 유클리드기하학과 거의같은 비유클리드기하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 즉 양자간의 구별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가우스의 결론이었다." (152쪽)

 

기하학들이 모두 세계를 설명하는데 성공한다면, 기하학으로 표현된 세계가, 물리세계의 본질이 아니라 사람마다 임의로 설정한 틀이라고 주장할수 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수가 없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설명할수 있으니, 모두가 인정하는 설명이 나오지 못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넘어간다.

 

"만일 모든 기하학이 물리세계에 적용될수 있다면, 기하학은 물리세계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사람이라는 관찰자가 자신의 지각대상들 사이의 질서를 확립하기위해 스스로 구성해 놓은것에 지나지않는 것처럼 보인다.

 

(중략 / 신칸트학파와) 프랑스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Henri Poincare)에 의해 소개된 약정주의 (conventionalism)라 불리는 생학이론에 이용되었다. 푸앵카레에 따르면, 기하학의 문제는 약정의 문제이며, 물리세계에 관한 기하학을 기술할 목적으로 쓰여진 진술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156~7쪽)

 

그렇다. 마음대로 이생각 저생각을 가져다쓰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시공간에 어울리는 기하학을 가져다쓰는 것이 세계를 설명하는 방법이 될수있다. 하나의 체계로 세계를 전부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다면, 영역을 나누어 설명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개개의 모든 기하학체계는 물리세계의 구조를 기술하는데 사용될수 있다. 하지만 단 하나밖에 없다고 인정받은 기하학 체계는 물리세계의 구조를 완전하게 기술하지 못한다.

 

(중략) 아인슈타인은 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의거해서 천문학 차원에서 자연기하학이 비유클리드기하학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지구차원의 기하학이 유클리드의 기하학이라는 가우스의 측정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157~161쪽)

 

 

 

중력에 의해 시공간이 휘게 되면, 특히 별근처의 공간이 더많이 휘게되면, 유클리드기하학의 측정결과는 비유클리드기하학의 측정결과와 편차가 커지게 된다. 이때 따라야할 기하학체계는 어쩔수 없이 비유클리드기하학이다. 즉, 한울universe을 이해하려면 비유클리드기하학 체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아인슈타인의 생각에 따르면, 유클리드기하학과 편차가 생기는 원인은 별의 중량에 의해 생기는 중력에서 발견할수 있다. 어떤별 근처에서의 편차는 별과별사이의 공간에서 보다 더 크다. 이리하여 아인슈타인은 기하학과 중력사이의 관계를 확립했다. 전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런 놀라운 발견은 일식동안에 행해진 측정에 의해 확인되었고, 물리공간이 지닌 성격을 새로이 증명하였다." (162쪽)

 

결국 세계를 설명하는 것은, 관찰과 경험에 의한 귀납에 의해 가능하다는 한스의 주장이, 아인슈타인의 중력장방정식에 의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 아리스를 거쳐 칸트에까지 이른 이성주의자들의, 선험종합지식 중 대표인 수학(기하학)이, 경험지식이라는 것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칸트철학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아주 이상하게도 현대수학과 현대물리학에 이르기까지의 긴역사노선은 마침내 그것의 시초에 주장되었던 입장으로 되돌아간다. 기하학은 이집트인들에 의해 경험세마로서 시작되었는데, 그리스인들에 의해 연역세마로 만들어졌고, 결국최고로 완벽한 논리분석에 의해 다수의 기하학이 개발된 후에 다시 경험세마로 되돌아갔다. 다수의 기하학중 오직 하나만이 물리세계에 관한 기하학이다.

 

(중략) 기하학은 물리세계에 대해 기술하는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 하지만 이런 의미에서의 기하학은 선험의 성격을 지닌것이 아니라 경험의 성격을 지닌 것이다. 선험종합지식의 기하학은 없다." (163쪽)

 

한스는, 칸트가 종합한 이성주의생학의 종언을 선언해버린다. 물론 여기서 끝내지않고 새로운 세마에 기반한 생학을 보여주겠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생학은 발달과정에서 기하학의 발달에 의해 크게 영향받아왔다. 플라톤에서 칸트까지의 생학이성주의는 모든 지식이 기하학을 본보기로 삼아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성주의생학자는 2000년 이상 동안 의심 받지 않(았는데 / 중략) 그러나 비유클리드기하학이 발견됨으로써 상황은 역전되었다.

 

(중략) 수학자는 더이상 공리가 진리라고 주장할 자격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학자는 그런 주장을 물리학자에게 넘겨줬다. (중략) 이성주의생학자는 그의 가장 강력한 동맹자를 잃어버렸고, 길은 경험주의를 위해 열리게 된 것이다.

 

(중략 / 이 체계가 유클리드의 시대에 발견되었더라면) 중세는 신학과 야합할수 있는 정합이성주의를 발견하지 못했을것이고, 또 그들은 실증경험주의를 가르칠 용기를 가졌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기하학의 방법을 본떠 전개한 윤리학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쓰지 않았을것이다." (165~6쪽)

 

진리를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오류를 극복할수 없었다. 비유클리드기하학이 100년동안 가르쳐졌어도 여전히 플라톤과 칸트가 진리의 기준이 되고 있다. 확실하고 완전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조각진리는 불안하다. 그래도 진리를 향하는 발걸음이 꾸준히 늘어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것이 역사를 앞으로 조금씩 밀고 나간다.

 

"진리는 오류를 축출하기에 충분한 무기가 못된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진리를 지성으로 인정한다고 해서 정서밑바닥에 깔려있는 확실성을 추구하고 싶어하는 욕구에 저항할 힘이 사람의 정신에 언제나 생기는 것은아니다.

 

그러나 진리는 강력한 무기이고, 그래서 그시대의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언제나 진리의 추종자였다." (167쪽)

 

제9장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몹시 기대가 된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분명한 통찰이 있을까? 시간은 정확한 시계로 측정하는 것이다. 아래와 같은 서술은, 시간의 성격을, 물리세계와 시세계를 결합시켜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런 설명만으로도 실제 물리세계의 분석과 예측이 모두 가능하다. 그렇다면 시간은 만족스러운 물리량인가.

 

"우리는 언제나 영원한 현재에 머물러있다. 우리는 이 흐름을 중지시킬수도 없고 역류시켜 과거를 되돌아오게 할수도 없다. 이흐름은 우리를 냉혹하게 실어나르고, 우리에게 지연을 허락치 않는다.

 

시간에 대한 이런 심리의 기술을 수학방정식이라는 언어로 바꾸려는 수학자는 자신이 쉽지 않은 문제에 부딪혀 있음을 깨닫게 된다." (168쪽)

 

시간은 물리구조이다.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쌓여있는 물리구조이다. 공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도 시간이 쌓인다. 그러므로 시공간이다. 이것을 특수하다고 해야할까? 빛은 차폐할수 있다. 빛의 속도는 유한하여 1년을 날아가도 10조km를 날아가지 못한다. 신기하지 않은가. 그러나 시간은 모든 공간에 균일하게 쌓여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균일한지 어떤지도 모르지만, 시간은 지연없이 골고루 한울 구석구석가지 쌓이며 흐른다.

 

"수학자가 제일 먼저 관심을 갖는것은 시간의 측정표준이다. (중략 / 시간은 균일하게 흐른다) 시간이 균일하다는 것은 측정표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우리가 표준시계로 사용하고 있는것은 자전하고 있는 지구이다. 자전하고 있는 지구가 신뢰할만한 시계라는것 즉 자전하고 있는 지구가 정확하게 균일한 시간을 표시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중략 / 지구의 자전으로 시간의 균일성을 말하려하면 균일함을 유지하기 어렵다) 햇님주위를 공전하는 지구의 궤도가 타원형이기 때문이다.

 

(중략 / 항성시간도 세차운동으로 인해 균일할수 없다) 그러므로 천문학자가 균일한 시간이라고 하는것은 직접 관찰될 수 없는 어떤것이다." (169~70쪽)

 

시간은 시계로 측정하며 모든 공간에 두루두루 쌓이고(이런 서술은 그림언어이면서, 시간에 대한 시다), 지연이 없는 물리구조다. 만일 시간이 균일하게 흐른다면 표준시계를 만들어서 측정하는 일이 가능하다. 시간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은 이제 끝났고, 수학과 물리학에서 필요한 표준시간을 정하는 것이 첫번째 과제다.

 

시간이라는 물리량은 시계로 측정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시간의 균일성도 천문학의 시간을 균일하다고 정의해야 한다. 그래야 수학과 물리학을 전개해나갈수 있다. 이것은 정의의 문제이므로 물리세계와 맞지않으면, 고쳐나가면 된다.

 

"다시말해서 천문학자는 균일한 시간을 수학방정식이라는 수단을 사용해 계산해 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수학방정식을 사용해 계산한 결과는, 관찰된 수치에다 천문학자가 수정을 가하는 식으로 결정될 것이다. 그렇다면 균일한 시간이란 천문학자가 수학방정식과 관찰자료를 이용해 만들어놓은 시간흐름이다.

 

(중략) 균일한 시간을 알기 위해선 역학법칙을 알아야 하고, 역학법칙을 알기 위해선 균일한 시간을 알아야한다. (중략) 이런 종류의 순환을 피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균일한 시간의 문제를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이다. (중략) 실제로 균일한 시간이란 없다. 다시말해서 천문학의 시간이 균일한 시간을 정의한다고 말해야한다." (170~1쪽)

 

시간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단순하게 정의했다. 공간은 눈에 보이는 3차원 공간이므로 이해하기가 쉬웠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을 측정하는 도구를, 같은 방식으로 정의해야 한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공간은 자로 재고, 시간은 시계로 잰다. 시간의 표준은 천문학의 시간이다. 공간을 재는 자의 표준은 무엇인가? 빛이 이동한 거리인가? 그렇다, 결국 정의의 문제이고, 정의한 것은 수학식이든 관측이든 실제세계에서 수정되어야 한다. 그렇게 정의한 표준시간과 표준길이를 가지고 수학과 물리에 쓰면된다.

 

 

 

"시간의 측정표준을 만들기 위해 육안으로 보이는 별들의 자전을 이용하는 대신에 자전하는 원자나 이동하는 빛과 같은 다른 자연시계를 이용할수도 있다. 이모든 시간의 측정표준이 일치하느냐는, 사실의 문제다. 균일성에 대한 천문학의 정의가 실제의의를 갖는것은 이때문이다. 천문학이 제공하는 균일성에 대한 정의는, 모든 자연시계에 의해 제공되는 균일성에 대한 정의와 동일하다. 따라서 자연시계가 시간의 측정표준에 대해서 하는 역할은, 측정자가 공간의 측정표준에 대해서 하는 역할과 비슷하다." (171쪽)

 

현재를 기준으로 이미 일어난 일이 있고, 아직 일어나지않은 일이 있다. 그런데, 시간의 순서가 왜 두번째 문제인가? 당연히 관찰될수 있거나 추론할수 있는 문제아닌가? 물론 시간순서를 제대로 정열하지 않으면, 원인과 결과를 뒤집을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다른쪽으로 흘러간다.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는 기준을 만들어서 시간의 순서를 확인하려는 모양이다. 원인과 결과를 과연 구별할수 있을까? 

 

"두번째 문제는 시간의 질서에 관한 문제다. (중략) 시간질서를 판단하는 방법을 간략하게 개관해보면, 시간순서에 관한 하나의 근본기준이, 원인이 결과보다 선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근본기준이, 언제나 요구된다는 것을 알수있다. (중략) 시간질서의 관계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 (중략) 인과관계는 같은 유형의 사건이 반복해서 일어나는지 시험해 봄으로써 증명된다.

 

(중략) 시간질서를 인과질서에 의해 정의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질서와는 무관하게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는 기준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172~3쪽)

 

혼합과 불이라는 현상을 되돌릴 수는 없고, 어떤 상태가 이전 상태인지도 분명하다. 그래서 시간의 순서를 알고, 원인과 결과를 알수 있다. 여기까지는 어려움이 없다.

 

"두사건이 인과관계에 있는 간단한 실례를 연구해보면, 원인과 결과를 명료하게 구별지어 주는 자연과정이 있다는 것을알 수있다. 이런 종류의 자연과정에는 질서상태에서 무질서상태에로 진행하는 혼합과정과 같은 것이 있다. 물리학자는 이런 과정을 비가역과정이라 한다.

 

(중략) 인과관계가 물리사건들의 순서를 확립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가 지닌 근본특징들 중의 하나다. (중략) 더 나아가 (시간이라 불리는) 연속관계에 의해 정합 질서를 갖는 세계라는 것은 경험 사실이다. 시간질서에는 커미의 인과질서가 반영되어 있다" (173~4쪽)

 

 * 커미 = 한울 = 커다란 미리내 = universe = cosmos

 

 동시성은, 동시에 일어나서 동시성이 아니고, 두사건이 먼저 일어난 것도 아니고 나중에 일어난 것도 아닐때, 동시에 일어났다고 정의한다. 재미있는 생각이다. 그런데 왜 이런 생각을 해야했을까? 우리는 그저 시간의 순서가, 그래서 인과관계가 궁금한 것이다. 일단 비슷한 시기에 다른 장소에서 일어난 일은 인과관계가 없다. 그 두 사건은 동시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동시성을 정의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넘어간다.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이것이다. 최대속도가 빛의속도로 제한되어 있어서 애매함이 없이는 동시성을 정의할수 없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빛보다 빠른 속도가 있을수 없으므로 빛의 속도를 비교해서 측정할수가 없다는 말인 모양이다. 소리의 속도는 빛의 속도와 비교해서 잴수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즉, 빛의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거나, 빛의 속도가 초속 30만km라서, 빛의 속도를 잴때 애매해지는 것이 아니라, 빛의 속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가 없어서 정확한 비교측정이 불가능하다는 소리인 모양이다. 그러므로 애매한 측정도구를 이용해서 잴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시간 순서에 대한 정의는 동시성에 대한 정의와 한 짝을 이룬다. 두사건이 서로 먼저 일어난 것도 아니고, 나중에 일어난 것도 아니라면, 두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고 해야한다. 떨어져있는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비교될때, 동시성에 관한 문제는 특이한 결과를 낳는다. 이문제는 아인슈타인의 분석에 의해 유명해졌다.

  

(중략)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빛보다 더 빠른 신호는 있을수 없다. 이말은 빛보다 빠른 신호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만을 의미하는게 아니다.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빛이 가장빠른 신호라는 것은 자연법칙이고, 또 이것이 광속의 극한성 원리라고 부를 수있는것이다.

 

 (중략) 우리가 살고 있는 상대론의 세계는 인과를 파악하는 전달의 최고속도가 제한되어 있어서 동시성을 애매함이 없이는 정의할수 없다." (174~9쪽)

 

 이틀을 생각했더니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빛의 속도를 제대로 측정하지 못한다면, 빛이 등속운동을 하는지 등가속도 운동을 하는지, 등감속도 운동을 하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이해했다.

 

 "빛이 거울을 향하여 갈때의 속도와 반사되어 되돌아올 때의 속도가 동일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175쪽)

 

 먼거리를 이동한 시계는 느리다

 -> 먼거리를 이동한 원자는 느리다

-> 사룸체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 그러므로 먼거리를 이동한 사룸체의 노화는 느리다

 

 

 

"(빛의 이동시간을 하나의 시계로 재기 위해 운반되었던 시계에 대하여)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왕복을 마친 시계는, 움직이지 않고 처음장소에 계속 있었던 시계에 비해 느리다는 것이다. 이결과는 중요한 논리 귀결을 낳는다. 이결과는, 모든 종류의 시계뿐만이 아니라 원자에도 적용된다. 원자는 원자자체내에서 방출되는 복사광선의 색깔로 원자의 회전주기를 표시한다. 급속도로 움직이는 원자에 대한 실험은 아인슈타인이 예측했던 회전의 지연을 확증했다. 생물체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원자단위 사건에서의 모든 지연은 그 생물체가 지배받고 있는 노화과정의 지연으로 나타나야 한다." (176~7쪽)

 

 

 

1) 빛이 화성에 도착한 것과 동시에 일어난 사건은 무엇인가?

     즉, 빛이 화성에 도착한 것과 동시성을 갖춘 사건은 무엇인가?

 

 2) 12시에 발사된 빛이 화성에 반사되어 돌아온 시간은 12시 20분이다.

 

 3) 그러므로 동시에 일어난 사건은, 12시에서 12시 20분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다.

 

4) 11시 59분에 일어난 사건은, 빛을 쏜다는 원인이 아직 발생하지 않은 시간이어서,

     즉, 빛이 아직 쏘여지지도 않아서 동시성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5) 12시 21분에 벌어진 사건은, 화성에서 이미 다시 출발한 빛이 지구에 도착한 시간이 20분이므로,

     화성에 빛이 도착한 시간 이후에 일어난 사건임이 명백하므로, 동시성을 갖춘 사건이 아니다.

 

6) 12시 ~ 12시20분 사이에 벌어진 사건들만이 애매하지만,

    화성에 빛이 도착한 사건과 동시에 벌어진 사건이다.

    즉, 동시성의 사건은 정확히 그 시간에 벌어진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빛신호를 12시 정각에 화성으로 보내, 그것이 화성으로부터 반사되어 20분후에 되돌아 올거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빛신호가 화성에 도착한 순간은 몇시라고 해야할까? 빛신호가 화성에 도착한 시각을 12시10분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빛이 가는속도와 돌아오는 속도가 같다고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빛이 가는 속도와 돌아오는 속도가 같다고 가정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안다.

 

사실 12시와 12시20분 사이의 어느 시각이든 빛신호가 화성에 도착한 순간이라고 정할수있다. 예를 들어 빛신호가 12시 5분에 화성에 도착했다고 말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빛이 가는데는 5분, 돌아오는데는 15분 걸린 셈이다. 시간 순서에 대한 정의가 배제하는 것은 빛이 화성에 11시 55분에 도착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빛신호가 11시 55분에 화성에 도착했다고 하면, 빛신호는 출발시각보다 앞서 도착한 것이고, 그러면 결과가 원인보다 먼저 일어난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빛신호가 화성에 도착한 시각을 12시와 12시20분 사이에서 잡는한, 시간 질서에 대한 정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시간 사이에 우리가 위치하고 있는곳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도 빛신호의 도착시간에 일어난 화성에서의 사건과 인과상호작용을 할수없다.

 

 왜냐하면 동시성이란 인과의 상호작용 가능성을 배제함을 뜻하고, 우리가 있는 곳에서 이시간 사이에 일어난 사건은 모두 빛신호의 화성도착과 동시라고 할수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이 동시성의 상대성이라 부른것이다." (178쪽)

 

 공간은 3차원의 유클리드 공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나 타원, 쌍곡선과 같은 공간이 실제로 존재한다. 시간도 질서를 가지고 있는데, 실제세계의 시간은 우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시간과 다르게 흘러간다. 다른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공간이 물리학자에 의해 정의되는 것처럼 시간도 결국 물리학자에 의해 정의되고 수정될 것이다. 일단 이렇게 이해하고 넘어가야겠다.

 

단순한 이야기를 어렵게 하는 것도 같고, 물론 기존의 시간 관념과 뭔가 다르고, 시간 흐름의 결과물도 달라서 독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머리가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하지않고, 무언가를 건너뛰어서 결과만을 외웠을수도 있다.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은 통찰행위에 의해 지각한 플라톤의 이상실존물이 아니다. 또한 시간은 칸트가 믿었던 것처럼 사람이라는 관찰자가 세계에 부여한 주관질서의 형식도 아니다. 사람의 정신은 시간질서에 관한 여러체계를 고안해 낼수있다. 고전의 시간은 이런 여러 체계중의 하나이고, 인과의 전달속도가 제한되어 있는 아인슈타인의 시간은 또다른 하나의 체계이다. 이런 여러 가능한 체계중에서 이세계에 합당한 시간질서를 선택하는 일은 경험의 문제이다. 시간질서는 우리가 살고있는 우주의 일반속성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시간이 실제라고 말하는 것은 공간이 실제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다. 그리고 시간에 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은, 선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찰의 결과로 이루어진다. 시간의 실제 구조를 결정하는 일은 물리학의 일이다. 이것이 시간에 관한 철학의 결론이다." (179쪽)

 

 

 

제10장 자연법칙

 

뉴턴역학은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한울universe이 운행하고 있다고 증명해냄으로써 결정론 생학의 시대를 열었다. 마치 기하학의 자명한 원리들처럼 커미universe는 중력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이것이 결정론이며 인과론이다.

 

"뉴턴역학이 생학체계들에 끼친 영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선험종합지식 개념의 뿌리가 물리세계를 결정론으로 해석하는데 있음을 명백히했다. 한시대의 물리학은 그시대의 지식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므로, 인과개념이 19세기와 20세기의 물리학에서 어떻게 발전했는가, 어떻게 자연법칙에 대한 생각이 수정되고 인과개념에 대한 새로운 생학으로 마무리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81쪽)

 

세계 또는 사건에 대한 설명은 일반화이고, 일반화는 인과관계를 밝히는 일이다. 언제나 반복되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진다. 예외가 없다. 그러면 우연한 사건과는 달리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은, 필연의 사건이 된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생각은 농업사회에서도 이미 발달해 있었다. 굳이 뉴턴의 물리학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다만, 뉴턴의 역학을 받아들인다면, 신과 미신이 들어설 자리가 거의 없어지는, 이성과 합리의 시대가 열린다고 해야할 것이다.

 

 "설명은 일반화다. 설명은 결국 원인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인과관계 역시 일반화라고 해석할수 있다. (중략) 세마학자scientist는 인과법칙을 동일한 관계가 언제나 성립한다는 조건 아래서 " 만일 ~라면 (언제나) ~이다"라는 형식을 지닌 관계로 이해한다. (중략) 인과법칙과 단순한 우연의 일치를 구별할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반복밖에 없으므로, 인과관계의 의미는 예외없는 반복을 주장하는 진술로 표현된다." (181~2쪽)

 

피라미드를 보지 못해서 알수 없지만, 

피라미드를 보고 감동을 느끼는 것은 

압도되었기 때문이리라. 

 

사람은 압도되어야 

숭고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은 

사람의 생각과 경험을 넘어서는 

거대함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다. 

 

세상의 법칙조차 그러하다. 

사람이 만들어낸 법칙보다 

더 많은 범위에서 적용할수 있는 자연법칙이 

더 우월하고 숭고해 보이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도 

다른 어떤 사랑과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사룸life을 희생하면서까지 

행동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숭고하다.

 

그런 어머니들이 자꾸만 

우리들 곁을 떠나고 계신다.

 

그곳에서는 더 사랑받으시기를 -

 

"자연법칙이 더 우월한 것은 단지 자연법칙의 일반성이 전기규칙 등 단순한 규칙보다 더 크다는데에 있다. 자연법칙은 아주 많은 종류의 현상들에 적용될 수 있는 관계를 명확하게 개진하고 있다" (182쪽)

 

평균은 통계이다. 그렇지? 에너지보존법칙은 덧셈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분자들의 운동의 평균을 따르므로(?) 통계다. 분자들의 평균속도로 열에너지의 균형을 맞춘다. 평균속도라는 말은, 모든 분자의 운동속도가 같다는 것이 아니라, 빠른 것과 느린것, 평균속도로 움직이는 것등 여러가지 운동속도를 평균할수 있다는 말이다. 개별분자의 속도를 일일이 측정할수는 없다.

 

열의 이동이 일어나는 확률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해야 한다. 운동속도가 빠른 분자가, 느린 분자를 만났을때, 운동에너지를 가져올 확률보다 빼앗길 확률이 더 크다는 이야기다.

 

큰 것을 중심으로 작은 것이 돈다.

큰 열량은 작은 열량과 에너지를 나눈다.

왜 작은 열량이 큰 열량으로 빨려들어가지 않을까?

 

열량이 균형을 이루는 자연법칙과는 달리

왜 부자는 점점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질까?

 

낮은 확률이지만,

관찰과 경험으로 얻어진 귀납법칙이니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생학자 한스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서 자연법칙도 확률이고, 인과법칙이 무엇인지 더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짜릿하다. 내가 생각할수 없었던 다음 단계, 더 깊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이다.

 

"열에너지는 오직 한쪽방향으로만 이동한다는 사실을 에너지보존법칙과는 독립된 법칙으로 명확하게 개진되지 않으면 안된다. (중략) 비가역원리가 통계개념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비엔나의 물리학자 볼츠만(Boltzman)이다. 물체의 열량은 그 물체속의 분자들의 운동에 의해 주어진다. 다시말해서 분자들의 평균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온도는 높아진다.

 

 이진술은 오직 분자들의 평균속도만 언급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개개의 분자들은 매우 다른 속도를 가지고 있을수도 있다. 뜨거운 물체가 찬 물체와 접촉하면, 두물체의 분자들은 충돌할 것이다. 빠른분자와 부딪친 느린분자는 속도를 완전히 상실하고, 빠른분자는 속도가 더욱 빨라지는 경우가 일어날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경우는 예외다. 다시말해서 분자들의 속도는 평균으로는 충돌로인해 동등해질 것이다.

 

 열이동과정이 반대방향으로 진행될 확률은 낮기 때문에, 비가역성 법칙에 대하여 통계해석을 할때 나타나는 실제 결과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이론에 따르는 결과는 대단히 중요하다. 전에는 엄밀한 자연법칙이었던 것이 단지 통계 법칙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자연법칙의 확실성은 고도의 확률성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런 결과로 인해 인과관계에 관한 이론은 인과관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하게 되었다. 모든 자연법칙이 통계법칙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의문이 생겨났고, 그렇다면 엄밀한 인과법칙이란게 도대체 있는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184~6쪽)

 

 신선이나 신이 아니고서는 분자운동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이해할수 없다. 그러므로 인과법칙은 확률로 이해해야한다는 첫번째 견해. 그럴듯하다.

 

두번째 견해는, 관련된 인과요소의 수가 엄청나게 많아서 실제로는 통계법칙인 것을, 거시세계를 이상화하여, 완벽하고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 인과법칙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확률을 인과법칙으로 오해하거나 떠받든다는 것이다.

 

미시세계의 인과법칙을 전부 이해할수 없으니 확률로 이해하자는 주장과

미시세계는 원래 확률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두개의 주장이 대립한다.

 

결론은 뭘까? 원래 확률법칙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편안하다. 미시세계가 반영된 거시세계의 현상에 대해 인과법칙이라는 오해만 걷어내면, 두 세계 모두를 이해하게 되는 장점이 있다. 확실해진다.

 

"(첫번째) 견해는 인과관계를 사람의 지식으로 획득할수 없는것이라고 여길뿐이다. 사람의 지식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확률 법칙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중략 / 두번째 견해는) 우리가 인과의 자연법칙이라고 하는 것이 수많은 원자사건의 소산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엄밀한 인과개념은 우리가 살고있는 거시세계의 규칙성을 이상화시킨 것이라고 생각하는게 좋다고 본다. 다시말해서 인과개념은 관련된 요소과정의 수가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실제로는 통계법칙인 것을, 엄밀한 법칙이라고 간주한 것이다. 이견해에 따르면, 엄밀한 인과개념을 미시영역에까지 적용시킬 자격이 우리에겐 없다. " (186~7쪽)

 

한스는 불확정성의 원리 때문에 미시세계는 확률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인과법칙이 확률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확률은 도대체 어떻게 작동하는가? 확률을 가지고 무엇을 할수 있는가?

 

"우리는 현대의 양자역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개개의 원자사건이 인과개념에 의해 설명될수는 없고 단지 확률법칙의 지배를 받을뿐이라는 것을 안다.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유명한 불확정성 원리에 명확하게 개진되어있는 이런 결론은 앞에서 언급한 두번째 견해가 올바르다는 것, 즉 엄밀한 인과개념은 포기되어야 한다는것, 그래서 전에는 인과법칙이 차지했던 자리를 이제는 확률법칙이 이어받았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187쪽)

  

기하학의 공리와 수학의 공리들, 시간과 공간의 표준측정, 인관법칙의 확률론으로의 변화 등이 스피노자-라이프니츠-칸트의 체계를 붕괴시켰다. 그들 생각의 핵심에는 언제나 인과론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과법칙은 옳다할지라도 이상의 대상들에 대해서만 성립한다. 다시말해서 우리가 다루고있는 실제대상들은 실제대 상들의 인과구조를 모조리 기술할수 없기 때문에 일정한 확률의 한계안에서만 통제될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확률개념의 중요성은 양자역학이 발견되기 이전에 알려졌다. 어떤 생학자도 그가 지식의 구조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확률개념을 피할수 없다. 이점은 양자역학이 발견된후 더 명확해졌다.

  

(중략) 이성주의 철학은 세계가 이성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것을 증명하려고 할때는 언제나 인과개념을 근거로 내세웠다.  

 

한울이 예정되어 있다는 스피노자의 생각은, 인과에 대한 신념이 없으면 상상할 수도 없다.

 

라이프니츠는 논리의 필연성이 물리사건들의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라이프니츠의 이 생각은 모든 현상이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정에 의존하고 있다.

 

칸트는 자연에 관한 지식이 선험종합지식이라고 주장했는데, 칸트의 이런 지식론은 공간과 시간에관한 법칙들과 아울러 인과원리를 선험종합진리의 가장 주요한 실례로 들고있다.

 

칸트가 죽은 이후에 공간과 시간에 관한 문제가 해명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과원리에 관한 문제가 해명되자 선험종합진리에 의거하는 칸트의 지식론은 붕괴되었다. 이성주의의 발판은, 자연에 대하여 수학으로 해석을 할수 있도록 해주어 이성주의를 지지했던, 바로 그 수리물리학에 의해 뒤흔들려 버렸다. 오늘날의 경험주의자는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가장 확실한 논증을 수리물리학을 근거로 삼아 내세우고 있다." (188~9쪽)

 

제11장 원자는 실재하는가?

 

불확실한 지식은 더 확실한 지식을 향해 나아가게 하고, 모순되는 이론은 더나은 이론을 만들어내게 한다.

 

"불확실한 지식이 창조 정신의 소유자에게 완전한 진리로 향하는 길을 가르쳐 주기에 충분한 지표가 될수 있다는것, 또 모순되는 이론들은 그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든 관찰자료를 모순없이 설명할 수있는 더 나은 이론을 드러내는데에만 쓸모있다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197쪽)

 

일단 관찰하지 않은 것은, 한번도 관찰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법칙이 성립하는지를 알수 없다는 말에는, 조금 놀라면서 고끄한다.

 

그리고, 사람이 만물의 척도라고 했던 프로타고라스의 언어도 승인할수 있다. 관찰하지 못하는 것은 사라진다. 내눈앞에서 사라진 것은 없는 것이라는 프로타고라스의 말도, 말이 된다.

 

관찰하고 있는 것과 관찰하고 있지 않은것을 똑같은 것이라고, 즉 사라지지 않으면서 똑같은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가정할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 그렇게 가정하는 말을 지금부터 사용하자. 즉, 관찰하지 않는 것이 관찰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것이라고 가정하자는 말이다. 이 정도의 말이라면, 프로타고라스도 받아들일수 있다.

 

"당신은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우리가 관찰하고 있지 않는 대상을 관찰해 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그런 증거를 전혀 갖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이런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오직 한 가지 길이 남아 있다. 우리는 관찰하고 있지 않는 대상에 관한 진술을 검증 가능한 진술이 아니라, 언어를 크게 단순화시키기 위해 도입한 약정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만일 이런 약정을 도입하면,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을 모순없이 일관성 있게 주장할 수 있다.

 

만일 관찰하고 있지 않는 것과 관찰하고 있는 것을 동일시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관찰하고 있지 않는 대상과 관찰하고 있는 대상 둘 다에 성립하는 물리법칙의 체계를 가질 수 있다. “만일 ~라면" 의 형식을 지닌 뒤의 진술은 사실에 관한 것이고 또 옳다고 검증되었다. 이 점은 관찰하고 있지 않는 대상에 관하여 우리가 늘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승인 가능한 언어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 사용하고 있는 언어만이 승인 가능한 유일한 언어는 아니다. 관찰하고 있지 않는 동안에는 집이 사라진다는 프로타고라스 - 만일 프로타고라스가 관찰하고 있는 대상과 관찰하고 있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 각기 다른 두 가지 물리 법칙 체계를 구성해야 한다는 결론에 기꺼이 동의한다면 - 역시 승인 가능한 언어로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 (203~4쪽)

 

우리가 위와 아래라고 말한다면, 기준이 있다. 내가 서있는 곳을 기준으로 할수도 있고, 저 깊은 땅속의 지구의 중심부를 기준으로 삼을수도 있다. 위와 아래라는 말은, 소통이 가능한 말인데도, 하나하나 따져보면 말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별은 우리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래에도 있다.

 

"이런 긴 논의의 결론은 자연이 사람에게 하나의 특정한 진술만을 받아쓰게 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진리는 하나의 언어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집을 피트(feets)로 측정할 수도 있고 미터(meters)로 측정할 수도 있으며, 온도를 화씨로 측정할 수도 있고 섭씨로 측정할 수도 있다.

 

또한 우리는 제8장에서 밝힌 바와 같이 물리세계를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기술할 수도 있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기술할 수도 있다. 다른 측정 체계나 다른 기하학 체계를 사용할 때, 우리는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지만 동일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관찰하고 있지 않는 대상에 관하여 말할 때는 훨씬 더 복잡한 형태의 기술 방식이 여럿 있을 수 있다. 진리를 말하는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고, 그것들은 논리 의미에서는 모두 동등하다.

 

오류를 말하는 방식 또한 여러 가지다. 예컨대 우리가 섭씨 척도를 사용한다면 얼음이 32도에서 녹는다고 말하는 것은 그르다. 그러므로 철학은 진리와 허위의 차이를 없애는 게 아니다. 그러나 옳은 기술이 여럿 있을 수 있음을 간과하는 것은 얕은 생각일 것이다.

 

물리 실재는 한무리의 동등서술을 인정한다. 우리는 편의상 그중 하나를 선택한다. 그리고 이런 선택은 약정 즉 임의의 결정에 달려 있다. 예컨대 십진법 체계를 사용하면 다른 체계를 사용하는 것보다 측정치를 더 편리하게 서술할 수 있다. 우리가 관찰하고 있지 않는 대상에 관하여 말할 때, 가장 편리한 언어는 상식이 선택하는 언어이다. 상식의 언어에 따르면, 관찰하고 있지 않는 대상이나 동태는, 관찰하고 있는 대상이나 동태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런 언어는 약정에 의거하고 있다." (204~5쪽)

동등서술이란, 똑같은 사실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단위를 달리한다거나 사용하는 언어를 바꾸는 것이 모두 동등서술이다.

 

정상체계란, 관찰하지 않은 것과 관찰한 것이 같은 물리법칙에 지배되는 체계를 말한다. 이 체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분석이 아니라 경험이다. 아직까지 정상체계에 대한 서술이 가능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때문이다. 물건이 지구의 중심으로 떨어진다는 서술이, 정상체계에서 가능한 서술이다. 아직까지 이 서술과 다른 경험을 한 사람은 없었다.

 

아, 브라운 운동. 담배연기가 내려가지 않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은, 기체분자의 충돌로 인한 것임을 아인슈타인이 밝혔다.

 

정상체계의 물리법칙이 관찰하지 않은 것에도 작동한다는 것은, 논리와 분석에 의해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서 축적되고 거부되지 않은 것이다.

 

"동등서술이론의 장점은, 상식의 언어가 명확하게 개진할 수 없는 어떤 진리들을 표현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있다. 나는 앞에서 “만일~라면"이라는 형식을 지닌 진술로 개진된 진리를 언급한 바 있다. 만일는 이 진리에서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학문으로서의 역학은 떨어지는 물체에 관한 법칙을 명확하게 개진하면서 시작되었다.

우리가 관찰하고 있지 않는 대상을 관찰하고 있는 대상과 동일시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모순에 부딪히지 않는다는 - 다시 말해서 물리 세계에 관한 승인 가능한 서술들 중에는 관찰하고 있지 않는 대상을 관찰하고 있는 대상과 동일한 발판 위에 두는 서술이 있다 - 것은 사실이다.

 

나는 그런 기술을 정상 체계라 부른다. 물리 세계를 서술하기 위해 하나의 정상 체계가 인정된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진리들 중의 하나라 하겠다.

 

우리는 언제나 이 진리를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진리를 명확하게 개진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그것이 진리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땅을 향해 떨어지는 물체의 낙하에서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 왜냐하면 이런 관찰은 너무나 흔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마찬가지로 관찰하고 있지 않는 대상이 지닌 문제를 학문으로 이해하는 일은, 관찰하고 있지 않는 대상을 정상 체계에 의해 기술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여기면서 시작한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여러 세대의 사람의 경험이 그것을 증명해 왔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가능성이 논리 법칙에 의해 증명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관찰하고 있는 대상과 관찰하고 있지 않는 대상 사이의 차이가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단순하게 이 세계가 기술될 수 있다는 건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205~6쪽)

 

그렇다. 빛을 포함한 미시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다른 원리가 작용한다. 미시세계의 작용들을 우리가 제어할수 있다는 것이 신비롭다. 관찰하기도 어렵고, 위치와 속도를 모두 측정할수는 없지만 조작할수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우리는 이런 불확정성이 미시의 것들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해야한다. 거시의 것들에는 불확정성이 없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은 플랑크가 발견한 양자의 크기가 너무 작기 때문에 인정될수 있지만, 거시의 것들에 대해선 인정될수 없기 때문이다. 원자전체에 대해서도 불확정성이 무시될수 있다. 왜냐하면 원자는 조금 큰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파동개념을 무시하고 원자를 입자로 취급할수 있다." (212쪽)

 

두개의 극단말고 또하나의 중립의견이 있다. 결정되지 않은 상태. 참과 거짓으로 나뉜 사건들이 또하나의 값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세상만사를 이분법으로만 바라보지 말자는 의견일까? 거시세계는 인과론의 지배를 받고, 위치와 속도를 알수 있으며, 예측까지도 가능하다. 그런 거시세계를 만드는 미시세계는 2개의 극단값이 아니라 결정되지 않는 제3의 값을 갖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우리의 일상언어는 2값논리 즉 '참'과 '거짓'이라는 두개의 진리값을 가진 논리에 바탕을 두고있다. 그러나 '(안결상태)결정되지 않은 상태'라는 중간 진리치를 갖고 있는 3값논리를 구성하는 일이 가능하다. 3값논리에서 진술은 옳거나 그르거나 아니면 안결상태이다. 양자역학은 3값논리의 도움을 받아 일종의 중성언어로 기술될수 있다." (214쪽)

 

 12장 진화

 

 

목적을 가진 행동을 해석하면,

미래가 현재를 결정한다는 말이 된다고

이성주의 생학philosophy은 주장한다.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살고 있다는 말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은 미래라는 말이란다.

 

놀랍다.

 

한번도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현재에 의해서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니까,

인과론으로만,

콩심은데 콩나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이게 인과론이 아니라 목적론이라고 생각한다고?

아리스는 우리의 농사짓던 조상들만도 못한 사람이었다고?

 

한스도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다.

 

"돌이 떨어지는것, 물이 흐르는것, 바람이 부는것 등등과 같은 무기물세계의 움직임에 비하면, 사룸체의 활동은 어떤 목적을 지향하며, 계획에 의해 통제받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무기물세계는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고있다. 무기물세계에서는 과거가 현재를 통해 미래를결정한다.

 

사룸체life의 경우에는 그반대인 것같다. 현재의 사건은 미래의 목적에 기여하도록 조정되어있고, 과거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미래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현재가 미래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는 주장은 목적론(teleology)이라 불린다.

 

(중략) 따라서 목적성은 인과성과 맞먹는 기능을 부여받게 된다. 즉 둘다 똑같이 근본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자연을 원인과 결과만을 가지고 생각하는 물리학자는 직업의 편견 - 자신의 좁은 분야 이외에도 반드시 탐구할 필요가 있는 분야가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편견 - 에 파묻히는 오류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216~7쪽)

 

이 부분은 자신이 없다. 다람쥐가 식량을 저장하는 것은, 본능이겠지만, 추운 겨울을 대비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계획이 아니라 본능일까? 씨앗을 땅에 떨어뜨리거나 바람에 날려버리는 것은, 자손을 남기기 위한 계획이다.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면 이것은 계획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아닌것같다. 비유에 불과하다 할것이다.

 

그리고 목적론에 따라 사룸의 행동을 설명하려는 것은, 원인이 결과 이전에 와야한다는 발생의 시간(순서)를 외면하는 일이다. 어떻게 결과가 원인보다 앞설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목적론의 설명은, 설명이 있어야할 자리에 비유 또는 의인화를 집어넣는, 사이비설명이다.

 

"누구도 쥐가 식량을 저장하는 동안에 어떤 계획을 따라 그런일을 한다고 말할수 없을것이고, 어떤 식물의 씨앗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식물이 종족번식이라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것이다. 사룸의 활동에 대하여 의인론의 생각을 피하면서 표현하려면, 다음과 같이 주의깊게 말해야한다.

 

사룸체의 활동은, 그 유기체가 계획에 따라 행동한다면 나타나게될 그런 행동유형을 보여준다고 말해야 한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해서, 어떤 신비한 방식으로 유기체의 행동을 통제하는 계획이 존재한다고 말하는것은, 유기세계 전체를 사람의 행동과 비슷하게 보려는 비유에 의거해 해석하고 있음을 뜻한다. 즉 설명을 제시해야할 자리를 비유로 대신하고 있음을 뜻한다. 목적론은 모든것을 사람에 비추어 생각하려는 비유이며, 그래서 사이비설명이다." (220~1쪽)

 

다윈의 진화론은, 이성주의 생학의 목적론을 무너뜨린다. 진화에는 어떤 목적과 방향이 없다는 말은, 선택과 우연에 의해서, 환경과 그에 어울리는 돌연변이체의 적응이라는, 원인에 의해서 진화라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사람으로 향하는 진화가, 진화의 목적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비유가 아닌, 독특하고 그럴듯한 설명이다.

 

"원인과 결과로 설명하려는 욕구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같다. 어떻게 목적이 있어 보이는 행동양태를 인과성에의해 설명할 수있을까?

 

(중략) 큰돌멩이와 작은 돌멩이가 동일한 파도에 의해 운반될 때는 항상 작은 돌멩이가 좀더 멀리 운반될 것이다. 이런 선택과 결합된 우연이 질서를 만들어낸다.

 

(중략) 다윈은 공존하고있는 종들에 관한 질서체계가 종들의 발생에 관한 역사의 질서를 나타낸다고 추리 (중략) 진화의 기간에 비하면 가장 오래산 사람의 인생은 하루살이의 하루보다 훨씬 더 짧다. 우리가 진화변화를 실제로 관찰할수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진화변화의 경우에는 사람의 역사가 기록된 6000년조차도 지극히 짧은기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체계속에서 역사의 질서를 알아내는 추리, 달리 말해서 현재의 것들이 보여주는 체계속에서 시간의 질서를 읽어내는 추리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중략) 다윈은 진화의 과정이 인과성에 의해서만 설명될수 있지, 어떤 목적론 개념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221~4쪽)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불가지론의 입장에 서게되면, 커미cosmos 138억년의 역사를 부정할수 있을까? 아무리 노력해도 알수 없는 것도 있을 것이다. 알수 없다고 해서 지금까지 밝혀진 한울universe의 역사를 부정하고, 창조론이 옳을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아갈수 있을까? 나도 현대세마를 완전히 믿지는 못한다. 의심하고 있다. 적외선 카메라 또는 전자현미경으로 찍은 사진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화면이라면, 그것이 과연 실제인 것일까? 그러나, 적어도 무엇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는 알지만, 거짓주장의 엉터리 근거는 이해할수 있지 않을까? 하기는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이 거짓에 동조하는 것을 보면, 그럴수도 있겠다. 그또한 불가지론이라는 신이다.

 

"사변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세마science대신 허구로 대치시킨 우주창조설을 꾸며내어 이물음에 답하거나, 무에서 물질을 창조하는 행위를 조작해냈다. 다시말해서 '우리는모른다'는 것을 서툴게 감추고 있는 것에 불과한 답을 제시했다. 더욱이 한걸음 더나아가 이답의 근거를 '우리는 결코 알수 없을 것이다'는 것에 두는 것은, 겸손이라는 가면아래서 미래의 세마발달을 예견하는 능력이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꾸며대는 것이다." (232쪽)

 

생학자는 지성과 이성을 무기로 하여 귀납 사실들을 잘 꿰어내어 의미를 드러내야 한다. 드러낸 의미를 확장하여 사람과 세계를 설명하고 나아갈 바를 제시해야 한다. 대신에 드러나지 않은 사실들에 대해서는 기다릴줄 알아야 한다. 왜 이렇게 영역이 갈라지게 되었을까? 세마기술에 의해 밝혀지는 귀납사실들이 깊고 넓고 비싸게 발전해서, 자연생학 natural philosophy의 시대나 르네상스, 계몽시대처럼 한두사람에 의해 밝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2,500년전의 생학자들에 비해 지금의 생학자들은 훨씬 부지런해야 한다. 검토해야할 귀납 사실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게으른 사람은 결코 생학자가 될수 없는 시대가 된듯하다.

 

 

 

"현대 생학자philosopher는 다른 태도를 취한다. 그는 세마학자가 해야할 명확한 답을 그가 대신해서 제시하려 하지않는다. 생학자가 할수있는 일은 - 어떤 답이 옳은가는 훗날의 세마학자에게 맡겨 - 두고 의미있게 물을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밝히고, 가능한 몇몇답의 윤곽을 그리는일이다. 실제로 현대물리학은 이러한 논리작업에 필요한 많은 자료를 제공하였고, 또 현재 알려진 가능한 답이 불충분하다고 판명되면 그이상의 해결책을 발견할수 있을 것이다." (232쪽)

 

호킹은, 빅뱅이전에 무엇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것이 처음이라며, 답답하다고 화를 냈다.

 

한스 라이헨바하는, 모든 사건에는 이전의 사건이 있고, 최초의 사건이 있어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근거는, 수체계를 검토하는 것만으로도 알수 있다는 것이다. 의미없는 질문에 매달리지 말라고 말한다.

 

시간은, 처음이 없이 무한히 존재한다고 생각해도 모순을 만들어내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억지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우리는 연역 아니면 귀납의 방법 말고는 생각하거나 검증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모순되지 않게 잘 정리하고 있는 것이 필요하다. 언젠가는 밝혀질수 있기 때문이다. 빛이나 양자, 전자의 세계가 입자이면서 파동이라는 것을 받아들여도, 세마를 다루는데 문제가 없다는 양자역학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놀라운 자신감, 이 짧은 문장을 쓸수 있다는 것이 너무 부럽다.

 

"물질이 어떻게 무에서 생겨났는가를 묻거나 최초사건의 원인(또는 전체로서의 커미universe의 원인)이라는 의미에서 제1원인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의미있는 물음이 안된다. 원인을 가지고 설명한다는 것은, 나중의 사건과 일반법칙에 의해 결합되어있는, 이전의 사건을 지적한다는 뜻이다.

 

만일 최초의 사건이 있다면, 이 최초의 사건은 원인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설명을 요구하는 일 역시무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최초의 사건이 꼭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다시말해서 우리는 모든 사건에는 이전의 사건이 있고, 시간에는 시초가 없다고 상상할 수있다. 양쪽방향으로 끝없이 뻗어나가는 시간의 무한성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떤 어려움도 없다.

 

우리는 수의 계열이 끝이 없다는것, 즉 모든 수는 그보다 큰 수를 가진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수의 계열에 음수를 포함시키면 수의계열은 시작도 없다. 다시말해서 모든수는 그보다 작은수를 가진다.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계열을 수학에서 다루는데 성공한다.

 

다시말해서 무한계열에서 아무런 역설도 일어나지 않는다. 최초의 사건 즉 시간의 시작이 있어야 한다고 반박하는 것은 문외한이나 취할 태도이다. 논리학은 시간의 구조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는게 없다.

 

논리학은 시작이있는 유한계열 뿐만아니라 시작이없는 무한계열을 다루는 수단을 제공한다. 만일 세마의 증거가 무한에서 와서 무한으로 가는 무한한 시간을 지지한다면, 논리학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을 것이다." (233쪽)

 

잘 나가다가 여기에서 한스와 충돌한다. 설명할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게, 어째서 세마의 자세가 아닌가? 설명은 어디에선가 끝이나지 않는가? 

 

“설명이란 어디에선가는 끝이나야하고, 대답할수 없는 물음이 언제나 남아있는 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마를 반대하는 생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논증이었다. 그러나 대답할수 없는 물음은, 언어를 잘못사용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다. (중략) 전체로서의 커미는 원인을 갖지않는다. 왜냐하면 '정의에 의해서' 전체로서의 커미universe 이외에 그 한울의 원인이 될수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의 물음은 생학논증이라기보다는 텅비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233~4쪽)

 

이 책은, 생학philosophy도 세마science가 될수 있다는 라이헨바하의 주장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세마학자는 존재의 현재 상태의 원인을 해명하는 일이지, 존재의 원인을 해명하는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세마는 존재를 종합하는 통찰을 할수 없다는 말인가? 생학은 존재를 생각하는 학문이다. 존재에 대한 종합통찰이 세마로 불가능하다면 생학은 세마가 될수 없다는 말 아닌가? 세마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생학은 얼마든지 상상하고 망상할수 있게 되지 않는가?

 

“세마학자는 한울universe의 원인을 묻는것 대신에 커미universe의 현재 상태의 원인을 물을수 있을뿐이다. 그리고 세마학자가 해야할 일은 커미를 자연법칙에 의거해 설명할 수 있는 연대까지 계속해서 소급해 올라가는 일이다.” (234쪽)

 

제13장 현대논리학

 

아리스의 논리학을 극복한 현대의 기호논리학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런데, 아리스의 논리학도 무엇인지 모르겠다.

삼단논법이란다.

 

그런데, 집합의 원소에 관한 추리가 삼단논법이라고?

처음듣는 이야기다.

 

집합의 원소에 대한 성질을 묘사하는 것을 연결해서

삼단논법을 만든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라는 집합의 한원소이다.

  집합의 원소에 관한 추리는 삼단논법이라 불린다. 

 

예컨대 "모든 사람은 죽는다"와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라는 두전제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결론을 추리한다." (242쪽)

 

여기까지는 언제나 우리가 들어왔던 소리라서, 왜 삼단논법을 집합의 원소에 관한 추리라고 했는지를 이해하겠다. 실제로 벤이라는 사람이 삼단논법의 주장을 합당한 주장인지 구별하기 위해 만든 것이 벤다이어그램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삼단논법으로는 이삭이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할수 없다는 뜻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예컨대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버지라면,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할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이런 추리 형식을 표현하는 수단을 갖추고 있지 않다. (중략) 논리학의 역사는 한 학문의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2000년 이상동안 그 창시자가 남긴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243쪽)

 

라이프니츠가 논리학을 기호로 설명하려는 노력을 처음으로 한데 이어 많은 수학자들이 논리학에 수학기호를 도입하면서 2천년동안 정체되어 있던 논리학이라는 학문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기호논리학. 

 

"논리학의 역사에서 전환점은 불(Boole)이나 드 모르간(de Morgan)과 같은 수학자들이 수학표기법과 같은 성격의 기호언어로 논리학의 원리를 표현하려고 시도한 때인 19세기중엽이었다. 기호논리학을 구성하는 일은 페아노(G. Peano), 퍼스 (C.S.Peirce), 슈뢰더(E. Schroder), 프레게(G. Frege). 러셀(B. Russell)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이들과 함께 새로운 유형의 철학자 즉 수학 논리학자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245쪽)

 

생각을 문장으로 표현하고, 그 문장을 다시 기호로 바꿈으로써, 생각을 정돈해서 볼수 있다. 정돈된 생각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알게 하고, 올바른 이야기인지도 구별할수 있게 한다. 그런데, 기호를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수학과 논리학은 매우 닮아있다.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수학은, 양을 다루는 학문으로, 논리학의 한 분야라는 것을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증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러셀은, 수학은 텅빈 동어반복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기호논리학이 구성됨으로써 논리학과 수학간의 관계를 새로운 각도에서 탐구할수 있게 되었다. 왜 우리는 사고의 산물들을 다루는 추상 학문을 두개씩이나 가지고 있는가? 이 물음은 버트런드러셀과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이들은 수학과 논리학이 궁극으로는 동일하며, 수학은 특별히 양의 적용과 관련해서 발전된 논리학의 한분야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중략) 러셀은 정수, 예컨대 1, 2, 3 등등은 논리학의 기초개념만으로도 정의될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러한 증명이 기호표기법의 도움없이는 결코 주어질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248쪽)

 

1907년 당시 30대의 버트런드 러셀은 수학의 영광을 찬사하는 글을 쏟아냈다. 러셀은 이렇게 썼다. 

  

“누가 보더라도 수학은 진리만이 아니라 지고한 아름다움까지 지니고 있다. 

  차갑고 위엄있는 이 아름다움은,

  조각상의 아름다움처럼 우리의 나약한 본성에 호소하지 않고,

  미술이나 음악의 번지르르한 외관을 갖지 않으면서 숭고하게 순수하며,

  아울러 가장 위대한 예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엄격한 완벽성을 지닐 수 있다.” (출처를 모르겠다, 찾아보자)

 

수학의 초월 이미지를 강조하는 이런 노선은,

 수학에 관한 대중교양서에서 흔히 나타난다. 

 하지만 그런 책에서 좀처럼 목격할 수 없는 것은,

 러셀이 80세 후반에 표현했던 상이한 견해다.

 

그 무렵 러셀은 젊은 시절에 열정에 휩쌓여 쓴 글을,

‘대체로 헛소리’로 치부했다.

 

늙은 러셀이 쓴 바에 의하면, 수학은,

 

“내용 면에서 더 이상 사람을 초월한 어떤 것이 아니다.

  대단히 내키지는 않지만,

  나는 수학이 동어반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게 되었다.

  

 두려운 말이긴 하지만,

  지성을 충분히 갖춘 사람이 보기에 수학 전체는,

  ‘네발동물은 동물이다’라는 진술만큼이나 하찮은 것 같다” (출처를 모르겠다, 찾아보자)

  

그러니 러셀은 살아가면서 수학에 관한 생각에 일대 전환을 겪은 셈이다.

 

한스는, 수학은 논리학이고, 논리학은 공허하다고 말한다. 러셀이 늙어서 깨달은 텅비를 한스는 러셀을 통해서 배웠고, 고끄한다. 답답한 것은, 러셀의 증명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러셀은, 수학을 논리학으로 환원시킴으로써, 기하학의 발전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앞에서 선험종합진리의 붕괴라고기술했던 진화과정을 완결시켰다. 칸트는 기하학 뿐만아니라 산술학 역시 선험종합의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믿었다. 러셀은 산술학의 원리들을 순수논리학에서 연역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수학의 필연성이 분석의 성격을 지닌것임을 밝혀냈다. 수학에 선험종합진리는 없다고 밝혀진 것이다." (248쪽)

 

* 텅비 : 공허 ; 텅 비어있음

* 고끄 : 共感 = 同意 = agreement : 고개를 끄덕임

 

 세계속에 있는 모든 것이 자기자신과 같다.

 세계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라는 의미인가?

 

세계의 일반속성은 무엇인가?

부분에 전체의 속성이 들어있다라는 말로 세계의 일반속성을 표현할수 있는가?

  

굉장히 길게 설명하고 있는데도, 모르겠다.

 

결론만을 기억한다면,

 논리학으로는 새로운 진리를 발견할수 없고, 세계에 대한 일반속성을 논리학으로 알아낼수는 없다. 

 

"만일 논리학이 분석하는 것이라면 논리학은 텅비하다. 즉 논리학은 물리대상의 속성을 표현하지 못한다. 이성주의 생학자들은 논리학을 세계가 지닌 어떤 일반 속성을 기술하는 학문, 즉 존재에 관한 학문 또는 존재론(ontology)이라고 간주하려는 시도를 되풀이 해왔다. 그들은 "세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자기자신과 같다"는 원리와 같은 것이 사물들이 지닌 속성에 관한 정보를 전달해 준다고 믿었다.

 

그들은 그런 문장이 제공하는 모든 정보가 '같다'란 낱말의 사용을 규정하는 정의속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으며, 우리가 그런 문장에 대해 아는 것은 사물들의 속성이 아니라 언어 사용의 규칙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논리학은 언어사용의 규칙을 명확하게 표현한다. 논리학이, 분석하는 것이고 텅비한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248쪽)

  

수학과 논리학의 관계도 몰랐지만, 논리학이 공허하다는 선언도 무슨 이야기인지 알수가 없었다. 그럴줄 알고 한스가 설명을 해준다. 한스의 설명을 읽으니, 논리학이 공허하다는 것은 알겠다. 그렇다면 정말로 큰 문제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논리에 맞게 처리되면 모두가 와아해질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는 텅비하다는 말인가?

 

 논리에 맞다는 말은, 말의 앞뒤가 맞다는 것이지, 말하는 것이 진리나 사실이라는 것은 아니다. 논리에 맞다라는 말과 항진명제라는 말도, 서로 다른 말이다.

 

우리는 또 이치에 맞는, 언제나 참인 이야기와 행동을 좋아한다. 그런데, 이런 항진 진술은 텅비하다? 정말 그런가?

  

정보가 없는 것을 텅비하다고 말한다면, 고끄할수 있다. 항진명제는 정보가 없다기보다는, 새로운 정보나 지식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에 대해 진술하는 것, 즉 새로운 정보가 없다는 말로 이해할수 있다. 

  

"나는 논리학의 분석의 성격, 즉 논리학이 텅비하다고 말할수 있는 이유를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논리학은, 결합된 문장 전체가 개별문장들의 진리성과는 무관하게 참이되는 방식으로, 문장들을 결합시킨다. 예를들어 "만일 나폴레옹과 시저가 둘다 예순살까지 살지 못했다면, 나폴레옹은 예순살까지 살지못했다"라는 결합문장은, 나폴레옹이나 시저가 예순살 전에 죽었든 죽지않았든 상관없이 옳다. 그러므로 이런 결합문장은 언급된 사람들이 몇살까지 살았는가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논리학이 텅비하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위의 예는 어째서 논리관계가 필연으로 옳은가를 보여준다. 논리관계는 필연으로 옳다. 왜냐하면 어떤 경험의 관찰도 논리관계를 그르다고 증명할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나폴레옹에 관한 책을 보고나서 나폴레옹이 쉰네 살에 죽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할지라도, 앞에서 든 결합문장이 그르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할것이다. 또한 어떤사람이 나폴레옹은 예순다섯살에 죽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이것 역시그 결합문장이 그르다는것을 증명하지는 못할것이다. 논리의 필연성과 텅비성은 공존하는것이며, 논리학의 분석 또는 항진의 성격을 이루는 것이다.

 

순전히 논리에 따르는 진술은 모두 앞에서 든 예와 마찬가지로 항진진술이다. 항진진술은 아무런 정보내용도 갖고있지 않으며, 따라서 "내일 비가 오거나, 내일 비가 오지않을것이다" 와 같은 항진 진술은 정보를 전달하는게 없다." (249쪽)

  

항진진술은 텅비하지만, 결코 공허하지 않다. 수학이든 논리학이든 분석해서, 참과 거짓을 구분할수 있다면, 믿을만한 도구가 될수 있다. 항진인 것은 텅비지만, 텅빈 것은 거짓이 섞일수 없어서 믿을만하다. 모든 일이 분석하기 어렵기 때문에 제대로 분석해서 항진여부를 판단할수 있다면, 수학이든 논리학이든 역할을 충분히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수학과 논리학만을 가지고는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알수 없다는 것을 마음에 꼭 새겨두어야 한다. 경험과 관찰로 증명되지 않으면 새로운 정보나 지식이라 할수 없기 때문이다.

 

"수학을 분석하는 것이라고 한다고 해서 수학의 사고를 경시하는게 아니다. 수학사고의 유용성은, 바로 수학이 지닌 분석의 성격으로부터 나온다. 다시말해서 수학의 정리가 텅비하다는 바로 그 이유때문에, 수학의 정리는 절대로 믿을수 있는 것이고, 자연세마natural science에서 사용해도 무방한것이다.

 

 수학만 가지고서는 결코 세마의 결론을 반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학은 입증되지 않은채 숨겨져있는 어떤 내용을 세마에 도입할수 없기때문이다. 하지만 수학의 관계가 텅비하다고 말하는 것은, 수학의 관계가 쉽게 발견된다는 뜻이 아니다. 앞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텅비한 관계를 발견하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일일수 있다 . 그리고 수학에 쏟는 노력과 천재성의 총량은 수학의 탐구가 굉장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250쪽)

 

제14장 지식의 예측

 

어떤 지식을 예측하려면 이론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의 경험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지식을 만들고, 지식을 바탕으로 이론을 세워야 한다. 우리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지식과 이론에 의해서 예측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건희중심 밀정검찰독재는 과연 언제 무너질까? 박근혜가 무너질때보다 훨씬 더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들의 힘이 아직도 튼튼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일들이 더 일어나야 그들을 둘러싼 단단한 껍질이 깨어질까?

 

"관찰자료들이 주어지면 이 관찰자료들을 가지고 지식이 정립되고, 이 정립된 지식에 의거해 이론이 정당화된다. (중략) 추측을 통해 이론을 발견한 세마학자scientist가 이론을 다른사람에게 제시할때는, 그의 추측이 사실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것을 안 다음이라는 사실이다. 세마학자는 이론을 정당화할 때 귀납추리를 한다. 왜냐하면 세마학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사실이 이론에서 연역된다는 것뿐만이 아니고, (사실을 근거로) 이론이 옳을 확률이 높다는것도 보증하는 것이며, 또 이론에 의거하여 또다른 관찰사실들을 예측하도록 권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귀납추리는 이론을 발견하는데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된 이론을 관찰자료들에 의해 정당화하는데 사용된다." (257~8쪽)

 

계속 확률이 나온다. 예외없는 법칙이 제일 좋겠지만, 우리터에 절대법칙은 없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실들을 바탕으로 해서 이러이러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추정이다. 그 추정은 한가지가 아니라 여러가지이고 가설이라고 한다. 추정한 여러가지 가설들 중에서, 사실을 연역하거나 귀납추리할수 있다는 것이 여러사람에 의해 확인된 가설이, 새로운 이론이 된다. 가설을 세우는 과정이나 추정하는 과정에 참여해보지 않았다면, 이론이 세워지는 과정도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귀납추리에 관한 연구는 확률론에 속한다. 왜냐하면 관찰사실들에 의거해서 만들 수 있는 이론은 단지 거그probability라는 것이지 절대로 확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귀납을 확률론속에 통합시키는 일이 인정될 때조차도 새로운 형태의 오해가 발생한다." (259쪽)

 

* 거그 = probability ; 거의 그렇다 ; 개연 蓋然

* 거그한 = probable = 거의 그러한

 

오해는, 사실을 바탕으로 귀납추리를 통해 이론을 만들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실들을 안다고 해서 이론을 만들어낼수는 없다. 브라헤의 관측자료로 행성운동의 법칙을 발견한 것은, 케플러였다. 직접 자료를 모으고 수십년동안 관찰해왔던 브라헤는, 이론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사실을 토대로 귀납추리를 거쳐 이론을 만들수 있다는 생각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다. 사실이 없다면 이론을 만들수 없겠지만, 사실들이 주어졌다고 해서 이론이 귀납되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론을 발견하는 과정은 귀납추리와는 다르다.

 

"사실에 의해 이론들을 확증할 때, 확률 추리가 지닌 논리구조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일부 논리학자는 확증을 연역추리의 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어왔다. 다시말해서 일부 논리학자는, 우리가 이론에서 사실을 연역하여 도출해 낼 수 있다면, 사실에서 이론을 귀납으로 도출해낼수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과도하게 단순화된 것이다. 귀납추리를 하기 위해서는, 이론에서 사실을 도출하는 연역관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258~9쪽)

 

'귀납지식 = 예측지식 = 확률을 바탕으로한 미말지식'의 한계도 분명히 기억해 둘 일이다. 개별사건은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건이 일어날지를 미말할때, 75%의 확률로 사건이 일어날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맞거나 틀릴 것이다. 개별사건은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맞았다고 해서 미말 확률이 진리라고 말할수 없고, 틀렸다고 해서 미말 확률이 거짓이라고 말할수도 없다.

 

그렇지만, 미말은 삶의 기준으로 삼을수 있고, 확률을 바탕으로 한 예측진술도 쓸모가 많다.

 

"M씨가 병에서 살아났다고 가정하자. 이 사실이 75 %라는 확률을 언급하는 미말진술을 검증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는건 분명하다. 왜냐하면 75%라는 확률은 그사건의 발생과 양립가능할 뿐만아니라, 그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것과도 양립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많은 수의 사건을 고려한다면 75%라는 표현이 가능하고, 따라서 그렇게 표현된 확률진술은 관찰에 의해 시험될 수 있다. 그러나 개별 사건의 발생에는 정도 문제가 있을 수 없다. 단일사건에 관한 확률진술은 무의미하다." (265쪽)

 

 

 

이성주의에 바탕을 두고 말하면, 진리는 진리여야한다. 사실이 아닌것이 포함된 진리는, 불안한 진리다. 이성주의는 옳은 전제에 의해 연역된 모든 사실들이 참이기 때문에, 진리에 대해 이렇게 말할수 있다. 그러나 귀납지식은 언제나 귀납지식과는 다른 사실이 드러날수 있다. 그래서 흄은 경험주의로는 진리를 발견할수 없다고 생각했고, 우리도 예외없는 법칙은 없다라는 말로 참이 아닌 사실을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다.

 

그런데 한스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한다. 미래에 발견될지도 모르는 검은 새힌은, 예측진술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다고 해서 새힌은 하얗다라는 예측진술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거그한 진술인 귀납지식은, 거의 모든 새힌은 흰색이라고 미말predict한다. 이런 미말은 절대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의 추정이며, 확률을 바탕으로 한 미말이다. 어떤 새힌swan이 발견된다면, 그 새힌의 색은 대체로 흴것이라고 미말하는 것이다. 귀납지식으로 결과를 미말하는 것이므로 진리여부를 판단할 필요가 없다.

 

 

 

미말 진술이 훌륭하다는 것은, 관측한 사실들과 미말 진술이 논리에 맞고, 진술의 근거가 충분하다는 말이다.

 

 

 

* 미말 = predict = 예측 豫測 ; 미리 말하다

 

* 새힌 = swan = 白鳥 ; 흰새 -> 새흰 -> 새힌

 

 

 

"미말진술을 추정진술로 해석하면, 경험주의자의 지식개념에 남아 있던 마지막 문제 즉 귀납문제가 해결된다. 경험주의는 귀납에 대한 흄의 비판에 의해 붕괴되었다. 왜냐하면 경험주의는, 이성주의가 근본으로 삼고있는 공준, 즉 모든 지식은 옳은것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공준에서 벗어날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성주의자의 이 공준을 인정하는 한 귀납의 방법은 정당화될수 없다. 왜냐하면 귀납의 방법을 사용하면 옳은 결론에 도달할거라는 것이 증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말결론이 추정진술로 간주될때는 사정이 다르다. 미말한predicted 결론을 추정한 진술로 해석하면, 미말결론이 옳다는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서 예측결론이 훌륭한 추정진술이라는 것만 증명하면 그만이다. 미말결론이 훌륭한 추정진술이라는 것은 증명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귀납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269쪽)

 

 

 

제15장 막간극 - 햄릿의 독백

 

 

'to be or not to be'를 결정하는 것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동어반복이라고? 

 

많이 공부하고 힘들여 생각을 한 사람의 넓은 생각을 따라가는 것은 정말 어렵다. 60년을 살았지만, 먼지처럼 살았지 제대로 산것이라고 할수 있을까? 생각의 끝을 잡지 못하고, 엉켜진 실타래를 이리저리 잡아당기며 우연히 풀려지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그러다가 가위로 싹둑 잘라서 일부는 버리고 일부만 쓰는 어리석은 짓을 계속해왔다. 실타래의 끝을 잡아 문제를 뚜렷하게 드러내며 살았다면, 생각을 그렇게 해왔다면, 지금처럼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다. 

 

동어반복이란 무엇인가?

똑같은 말을 달리 말하는 것이다.

= 로 연결되는 수학식이다.

 

지금처럼 살것이냐 지금과 다르게 살것이냐?

to be or not to be?

 

이 말이 어째서 동어반복이지?

 

중요한 것은,

의미있는 것은,

 

복수를 실행할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다.

복수를 한다는 것은, 

실행한다는 것이고,

현재의 정보와 지식으로 지금의 행동과 미래의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떤 정보와 지식이 지금의 행동과 미래의 상태를 결정할수 있다면,

그것들은 대단한 것이다.  

 

"to be or not to be. 

이것은 문제가 아니라 동어반복이다.

나는 공허한 진술에는 흥미없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종합진술의 진리성이다. 

나는 "내가 과연 할것인지 못할것인지" 

바로 이걸 알고 싶다. 

 

나는 정말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용기를 낼 것인가 아니면 못내고 말것인가." (278쪽) 

 

알듯도 하다.

'to be or not to be = 지금 이대로 이거나 지금 이대로가 아니거나

'는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는다'와 같은 종류의 문장이다.

 

즉, 아무런 정보나 지식,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이 문장은,

아무런 결정을 내릴수가 없는, 항진명제이다.

항진명제는 동어반복이다.

 

햄릿의 고민은, 자신의 확신보다 다수의 고끄였을까? 나에게는 분명한 사실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방법이 없고, 햄릿 스스로도 아버지의 죽음의 이유를 확신하지 못했다. 

 

"그자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게 할 수있다면, 모두 내편을 들것이다. 그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게 할 수 있어야 하다니. 나에겐 이처럼 명명백백한데도 말이다. (중략) 그러나 그런 사실들은 단지 간접증거에 불과하다. 나는 단지 확률에 지나지 않는것을 믿어도 괜찮을까? 내가 용기를 내지못하는 것은 바로 이점 때문이다. 나는 현재의 왕을 두려워하고 있는게 아니다. 나는 단지 확률에 지나지 않는것을 근거로 삼아 행동하는 것이 두렵다." (278~9쪽) 

 

과감하게 추정하고 미말하라. 누구나 그렇게 살아간다. 주의할 것은, 추정의 기술과 미말의 세마를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나의 미말은, 삶이 10년 내에 끝나지 않을 것이니, 더 열심히 즐겁게 살라는 것이다. 그렇게 용기를 내어 행동해야 한다. 

 

"나는 올바른 결과들을 보증하는 더 큰 백분율에 의지할수 있다. 내가 확보할 수 있는것은 이것이 전부다. 내가 내세울수 있는 진술은 추정진술밖에 없다. 나는 물론 확실성을 원하지만, 논리학자가 나에게 주는 충고는 과감하게 추정하라는 것뿐이다." (280쪽) 

 

제16장 기능지식 

 

모르는 것은 건너뛰어 가면서 지금까지 잘 따라왔다. 거의 막바지에 도달한 모양이다. 생학은 미말이 가능한 기능지식이어야 한다. 모든 학문이 그렇다. 단순히 즐기는 것에서부터 삶의 곳곳에서 쓰여질수 있는 학문들이 현재까지 살아남아있는 학문들이다. 한문이 잊혀지고 있는 것은, 더이상 현대사회의 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하는 기능을 할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아름다운 예술로는 남아있을만 하다. 의미를 가진 멋진 예술이다. 

 

"학문으로서의 생학이 제시하는 지식은 기능(functional)지식이다. 기능지식에 따르면, 지식을 미말의 도구로 간주하며, 또 공허하지 않은 진리 즉 종합진리를 판별할수 있는 유일한 기준을 감각관찰이라고 본다." (281쪽) 

 

기능지식과 대비되는 초월지식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의해 그려지는, 그림자를 중심으로 한 지식이다. 비유로서는 그럴싸하지만, 사슬에 묶여 동굴속에서 그림자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바보들은 존재할수 없다. 세마학자들은 이미 지각 16km 두께의 모든 암석들을 분석했다. 하나하나 뚫어서 일일이 성분을 분석했다. 100년 이상 걸리는 작업이었다. 바다속에도 들어가 보았다. 사람은 결코 사슬에 묶여 동굴에 갇힌채 그림자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그림자가 실제의 사물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동굴밖 세계가 있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오직 동굴밖 세계의 그림자만 본다. 플라톤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물리세계에 대한 지식은 이런 종류의 지식이라고 보았다. 지각할수 있는 세계란 동굴벽에 나타난 그림자와 같은것이다. 사고만이 더 차원높은 실재의 실존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준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들은 단지 실재의 빈약한 영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동굴의 비유는 2000년동안 사변생학자의 태도를 상징했다. (중략) 이 동굴의 비유에 의하면, 경험지식은 수학자나 생학자가 통찰에 의해서 획득하여 확보하고 있는 더 훌륭한 지식에 대한, 빈약한 대용물에 지나지 않는다. 동굴의 비유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초월주의이다. " (282쪽) 

 

이성주의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세상을 온전하게 바라볼수 있다. 즉, 현상과 물자체라는 이분법으로 집대성되어있는 칸트철학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관찰과 미말의 성공을 경험하면, 물자체라는 환상에서 벗어날수 있다는 것이다. 

 

이분법에서 벗어나려면, 정신분석학자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은, 일단 갈무리해 두자. 

 

"온갖 소원이 이루어지는 마취 상태의 꿈을 깨기란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현상의 배후에서 암약하고 있는 관찰 불가능한 물자체에 대한 이성주의의 신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있다. 그것은 정서 상태를 재조명하는 일인데, 이런 일은 종종 실증세마를 연구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관찰 가능한 사물들을 통제하고, 그것들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오는, 정서의 만족감을 경험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종종 정신분석학자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284쪽) 

 

세계를 이분법으로 구분하여 묘사하는 초월지식과 달리, 논리경험주의의 기능지식은, 세계를 묘사하고, 미래를 미말predict한다. 

 

"지식을 획득하는 데 필요한 도구라는 것, 다시 말해서 수학의 분석은 지식의 도구일 뿐이지 진리의 원천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런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19세기와 20세기는 이성주의를 공격할 뿐만 아니라, 이성주의를 물리칠 수 있는 수단도 갖게 된 새로운 경험주의의 요람기가 되었다. 새로운 경험주의는 지식을 분석하기 위해 기호논리학의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논리경험주의라고도 불린다.

 

이 새로운 경험주의 생학의 지식 개념을 초월지식과 구별해, 기능지식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기능지식 개념에서 지식은 또 하나의 세계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사물들을 묘사함으로써 미래 예측이라는 목적에 기여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284쪽) 

 

이준석과 천하람이 칠불사에서 새벽 4시에 홍매화를 심었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웃는다. 비웃는다. 왜? 

 

이준석과 천하람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인데, 왜 사람들이 비웃을까? 혹시 90%의 사람들은 비웃지 않는데, 10%의 사람들만이 비웃는 것은 아닐까? 미신을 믿지 않아도, 절-성당-교회-모스크에 들어가서 언제나 기도를 한다. 간절할 때는 복전도 낸다. 비웃을 일인가? 국회의원 당선을 위해서 새벽 4시에 일어나 홍매화를 심는 기복행위가 못난 짓인가? 

 

만일 30%의 사람들만이라도 이준석과 천하람을, 미신의 지배를 받는 한심한 젊은 정치인들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나라는 정말 대단한 나라이다. 세마science의 세계를 아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가 되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신은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의 진심을 전하고 다지기 위해서, 기도하는 마음 - 기도는 꼭 필요하다.

산채로 가죽을 벗겨낸 소를, 희생제물로 삼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문장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배우고 있다. 

 

문자는, 기호이고 물리현상이며, 다른 물리현상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문장은, 기호의 조합이다. 

의미있는 문장은, 옳고 그름을 결정할수 있는 문장이다. 

문장의 옳고 그름은, 관찰에 의해서 결정할 수 있다. 

 

"기호는, 종이 위의 잉크 자국이나 음파와 같은 일종의 물리 현상인데, 다른 물리 현상들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기호와 그것이 나타내는 것 사이의 대응 관계는 어떤 유사성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약정에 기초를 두고 있다. 예컨대 '집'이란 낱말은 실제의 집과 대응하고, '붉다'란 낱말은 붉음이란 속성과 대응한다. 

 

기호들은 물리세계의 상황과 대응할 수 있는 방식으로 결합되는데, 이런 기호 조합을 문장이라 한다. 상황과 대응 관계에 있는 기호 조합은 옳다. 예를 들어 “그 집은 붉다"란 문장이 실제 상황과 대응하면 옳다. '아니다'라는 표시를 사용해서 옳은 문장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기호 조합은 그른 문장이다. 옳다든가 그르다고 밝혀질 수 있는 기호 조합은, 의미있는 문장이다.

 

검증 가능성은, 의미 이론에서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요소이다. 진리를 관찰에 의해서 결정할 수 없는 문장은 무의미하다. 

 

이성주의자들은 의미 자체라는 것이 있다고 믿어 왔지만, 경험주의자들은 의미란 언제나 검증 가능성에 의존한다고 주장해 왔다. 현대 세마는 경험주의자의 이런 견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앞에서 말한 공간, 시간, 인과성, 양자역학에 대한 분석에서 의미가 검증 가능성에 의존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이런 견해를 고수하지 않고서는 현대 물리학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검증기능성 의미 이론은 학문으로서의 생학에서 필수 불가결한 부분이다." (285~6쪽) 

 

1) 이 문장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2) 이 문장은 의미가 있다 

 

위 두 문장의 차이가 뭘까? 

 

두 문장의 차이를 구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자. 

 

옳은 문장과 의미있는 문장을 구분해 보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나? 이 말은 맞네(틀리네). 이 말은 의미가 있네, 즉 생각해 볼 가치가 있네. 이 정도의 생각은 해왔다. 일단 이 정도로만 정리해놓고 넘어가자.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  

 

1) 옳은 문장 : 문법에 맞는 문장. 논리의 모순이 없는 문장. 사실 또는 진리를 말하는 문장 

2) 의미있는 문장 : 관찰을 통해 검증이 되는 문장.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문장.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문장. 

 

의미는 기호의 속성이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기호는 물리 형태이고, 문자(기호)는 물리세계와 연결시켜 물리세계를 나타낸다. (문자)기호를 조합한 것이 문장이며, 문장에는 의미가 있을수 있다. 의미는, 문장이 관측을 통해 검증된다는 것을 뜻한다. 의미있는 문장이란, 관측으로 옳고 그름을 결정할수 있는 기호조합을 말한다. 의미있는 문장은, 검증 가능한 기호조합이다. 

 

여기에서 의미가 기호의 속성이라고 말할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의미있는 기호조합은, 의미있는 문장이다. 의미있는 문장으로, 미래의 사건을 말할수 있다. 

문자는 언어를 표현하는 물리형태이다. 문자는 말을 다른 물리형태로 만든 것이다. 

 

도저히 안되겠다. 그냥 넘어가자. 

 

“이 문장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대신에 “이 문장은 유의미하다"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이런 변형된 표현은 의미가 기호의 속성이지, 기호에 덧붙여진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유의미한 기호 조합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지 않은 사건들, 특히 미래의 사건을 유의미한 기호 조합을 가지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옳은 문장만이 아니라 유의미한 문장에까지 확장해 사용하면, 언어를 이론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런 확장은 기호 사용자로 하여금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사건을 기술할 수 있게 하고, 또 기호 사용자가 진술한 것들 중에서 옳은 것으로 간주하기에 가장 권장할 만한 것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한다." (286쪽) 

 

문장을 검증하는 방법 

 

1) 직접 관찰을 통한 직접 검증 : 관찰과 기록에 의한 검증

2) 직접 관찰을 근거로 하는 귀납추리의 도움을 받은 간접 검증 : 확률에 의한 검증

 

2,400년 전에 직접 관찰자가 맨해튼 섬에 눈이 왔다는 것을 보고, 기록을 해둘수도 있다는 말이겠지. 공룡을 본 사람이 있었겠지만, 관찰기록은 없다. 원자는 왜 관찰이 안되는 것일까? 양자 세계의 전자와 중성자와 핵을 관찰해야 원자의 모습을 봤다고 할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원자가 아닌 것들로 이루어진 물질이 있을수 있기 때문일까? 원자가 아닌 것들로 이루어진 물질?

 

한스는, 기호의 조합인 문장이 의미가 있다라는 말을 이렇게 정의한다. 관찰에 의해 참과 거짓을 구별할수 있다면, 그 문장은, 그 기호조합은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문장은, 말과 글로 표현된 것을 말한다.

 

"예컨데 “서기 4년 11월 28일 맨해튼 섬에 눈이 왔다"는 문장은 검증 가능하고, 그래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관찰자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문장들은 직접 검증될 수 없다.

 

지구에 공룡이 살았다든가, 뭇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다든가, 물질이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직접 관찰을 근거로 하는 귀납 추리의 도움을 받아 간접적으로 검증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문장들은 간접검증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이런 종류의 검증을 하는 데 필요한 규칙은, 확률 계산에 의해 주어진다. 따라서 검증된 문장은 추정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 문장이 미래에 관한 것이라면 행동 지침으로 사용해도 좋을 것이다.

 

의미에 대한 이런 정의에 바탕을 두고 세워진 기호 체계는 예측의 도구로 (중략) 사용될 수 있게 고안되었다. 기호 체계가 이런 목적에 기여한다면, 그 기호 체계는 지식이라 불린다." (286~7쪽)

 

나의 행동은 언제나 미래로 향하는 것일까? 밥을 먹는다. 에너지를 보충해서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다. 미래를 위한 행동이다. 책을 읽는다. 무엇을 알고, 고끄하고, 즐거움을 느끼기 위한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쉰다. 지난 일과 놀이로 지친 몸을 달래어, 다시 어떤 놀이와 일을 하기 위해서다. 나의 행동은 언제나, 나의 삶이 있는 미래로 향하고 있다.

 

의미가 주관의 성격을 갖더라도, 결국에는 문장으로 정리되어 공개됨으로써 소통의 도구가 된다. 의미는, 어떤 행동과 어떤 경험으로 연결될수밖에 없다. 어떤 행동이나 경험은, 관찰할수 있다. 관찰할수 있다면, 의미와 비교해서 참과 거짓으로 구별할수 있다. 

 

"의미란 주관의 성격을 지닌 것이며, 어떤 사람도 그가 의미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고, 사람마다 자기가 적절하다고 여기는 의미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반박이 제기된 적이 있다. 이 반박에 따르면, "검증 불가능한 문장들은 제거되어야 한다든가, 검증이란 언제나 귀납 추리나 연역 추리가 결합된 감각 관찰에 의거해야 한다"는 학문으로서의 생학philosophy을 하는 사람의 주장은, 언어 사용에 부당한 짐을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반박은 검증가능의미이론이 지닌 논리를 오해한 데서 나온 것이다.

 

검증가능의미이론은 어떤 도덕 명령을 만들고 있지 않다. 학문으로서의 생학을 하는 사람에게는 관용이 있다. 다시 말해서 학문으로서의 생학을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당신이 검증 불가능한 의미로 말한다면, 그 말은 당신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다. 당신이 하는 행동은 언제나 미래로 향한다. 그리고 미래에 관한 진술들은 오직 검증이 가능할 때만 가능한 경험으로 해석될 수 있다.

 

경험주의자의 의미 이론은 어떤 사람의 주관의 의미를 기술하고 있지 않다. 경험주의자의 의미 이론은 언어의 형식을 위해 제안된 규칙이므로, 훌륭한 이유들을 근거로 해서 권장할 만한 것이다.

 

좀더 부연하면 경험주의자의 의미 이론은 누군가가 의미 있는 말이라 생각해서 발언했다면, 그 발언이 그 자신의 행동과 양립할 수 있도록 의미를 정의한다. 어떤 의미 이론에 대하여 논리에 맞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 검증가능의미 기준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과 들어맞는 언어로 말한다. 그들에게 언어는 활동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도구이지, 경험의 세계와 무관한 텅비한 체계가 아니다." (287~8쪽)

 

한스의 주장을 가지고 몇시간을 이야기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분명히 뭔가 얻은 것이 있는데, 체계를 갖추어 전달하기가 힘들다. 

 

귀납추리와 귀납지식은, 연역과는 달리 필연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확실한 지식이 될수 없다. 귀납추리와 귀납지식에 힘을 불어넣는 것은 확률의 개념이다. 양자세계가 확률에 의해서 움직이듯이, 미래를 미말하는 지식은, 확률로 이야기할수밖에 없다. 추정할수 밖에 없다. 귀납으로 미말한 지식이 높은 확률로 사실이라고 관측된다면, 귀납지식은 이제 기능지식이 될수 있고, 귀납지식으로 미래를 이야기할수 있다. 

 

"기능지식 개념은, 이성주의가 2000년 동안 지식에 끌어들인 신비한 것들을 지식에서 모조리 제거한다. 기능지식 개념은 지식의 성격을 아주 단순화한다. (중략) 지식론이 지식을 기능하는 것이라고 명료하게 진술할 수 있으려면, 먼저 선험종합지식이라는 무거운 짐(중략)을 벗어 버려야 한다. 

 

따라서 지식이 기능을 한다는 것, 즉 지식이 예측을 위한 최상의 도구임을 증명하는 일은, 확률에 대한 만족스런 해석을 발견하기 전에는 이뤄질 수 없었다. 경험주의가 귀납 추리와 확률의 사용을 설명할 수 없는 동안에는, 그런 증명은 단지 계획일 뿐 생학이론이 아니었다. 경험주의의 계획 - 즉 모든 종합진리가 관찰에 의해 얻어진다는 원리와 이성이 지식에 기여하는 것은 오직 분석하는 것뿐이라는 원리 - 은 19세기와 20세기의 세마가 그것에 필요한 수단들을 마련하기 전에는 성취될 수 없었다. 우리 시대에 와서야 정합한 경험주의를 보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288쪽) 

 

* 미말 prediction 預測 ; 미리 말함 

 

관찰한 모든 것을 비판없이 추리하지도 않고 기록할 때, 그 기록은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근거가 될수 있다. 그런데,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한다면, 관찰한 모든 것을 비판없이 추리하지도 않고 기록한다하더라도, 지식을 만들어내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실재 문제 즉 세계가 실재하는지 여부를 묻는 물음은, 꿈과 현실의 구별이라는 심리 경험에서 제기된다. 물론 꿈과 현실을 구별하는 일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생학자들이 꿈과 현실의 구별에서 끌어낸, 많은 그릇된 결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꿈과 현실을 구별한다는 것이 무슨 뜻을 갖는지, 또 꿈과 현실의 구별 근거가 무엇인지를 좀더 명확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꿈과 현실의 차이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관찰한 모든 것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다고 상상해 보자. 그런 사람은 “한 마리의 개가 있다". "피터가 나를 만나러 왔다", "그 차는 출발하지 않았다", "마리온이라는 고양이가 토마토 스프 속에 서 있었다" 등과 같은 문장을 작성할 것이다.

 

마지막 보고서 문장은 분명히 우리가 '꿈'이라 부르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일기에는 그것이 꿈이라는 것이 명확히 표시되어 있지 않다. 꿈을 꾸고 있는 동안의 꿈이란 현상은, 실제 관찰과 본질로는 다르지 않기 때문에, 달리 말해서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어느 누구도 자기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표시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작성된 완벽한 일기는 사람이 관찰하는 것 전부에 대한 보고문들을 모아 놓은 셈이 될 테지만, 비판없이 그런 일을 하고 있고 또 실제로 경험한 것을 넘어서는 추리를 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는 사람 지식의 논리 토대라고 생각해도 될것이다." (289쪽)

 

"꿈과 현실의 차이는, 검증가능한 관계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차이이다. 꿈은 우리에게 다른 경험을 미말prediction할 수 있는 관찰을 제공하지 못한다. 이리하여 보고서 문장은 객관으로 옳은 보고서 문장과 단지 주관으로 옳은 보고서 문장으로 분류된다.

 

이렇게 분류되기 전의 모든 보고서 문장에 대해서는, 직접으로 옳은 보고서 문장이라 부르겠다. 이는 직접으로 옳은 보고서 문장들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직접으로 옳은 보고서 문장은, 문장속에서 질서를 부여하는 과정 즉 완벽한 일기 속에 기록되어 있는 문장들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고 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객관 진리와 주관 진리로 갈라진다." (289쪽)

 

실재하는 대상에 대해 관측한 것을 말한다면, 객관 대상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주관대상은 무엇인가? 객관대상을 관측할때도 나의 신체를 이용하는 것이지만, 주관대상을 관측할때도 나의 신체를 이용한다. 그런데, 중요한 차이는 나의 신체가 객관대상이 있을 때는 그것의 영향을 받아 어떤 상태가 되지만, 객관대상이 없을 때도 어떤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때, 주관대상은 나의 신체이며, 나의 신체상태의 영향을 받아 나의 신체가 어떤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이제 문장에서 사물로 나아가 보자. 객관으로 옳은 보고서 문장은 객관 대상에 관해 말하고, 단지 주관으로 옳은 보고서 문장은 주관 대상에 관해 말한다. 그러므로 두 종류의 대상이 있는 셈이다. 대상들 전체는 직접적인 것들이다. 하지만 오직 첫번째 것만이 객관 대상이거나 실재 대상이다. 그러면 두번째 것 즉 주관 대상은 무엇인가?

 

우리는 주관 대상을 다루기 위해 '나의 신체'라는 개념을 고안해낸다. 물리 대상들 중에는 '나의 신체'라고 불리는 것이 있는데, 나의 신체는 다른 물리 사물들에 의해 인과의 영향을 받고 있고, 따라서 어떤 생리 상태가 된다. 일기 속에, 보고된 객관 대상이 있을 때는, 언제나 나의 신체는 어떤 상태에 있다. 그러나 나의 신체는, 객관 대상이 없을 때에도, 어떤 상태에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주관 대상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 대상은 실재하는 건 아니지만, 또 다른 종류의 실재물을 가리킨다. 주관 대상은 나의 신체 상태를 가리킨다." (291쪽)   

 

어렵다. 객관대상과 객관대상을 관찰한 기록은 분명하고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주관 진술은 분명히 무엇인가를 관찰해서 얻은 것이다. 무엇인가가 실재하기 때문에, 객관진술은 아니지만, 주관진술이 가능하다. 오감으로 느낄수 있는 객관대상이 없다면, 남아있는 것은, 내 감각으로 들어올수 있는 것은, 나의 신체상태뿐이다. 나의 신체상태가 스스로 작동해서, 감각기관을 통해 무엇인가를 관찰하게 한 것이다. 나의 신체상태가 주관의 실재성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맞는지 알수 없다.

 

 "주관 대상은 나의 신체 상태를 가리킨다" 라는 진술은 논리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실재하지 않는 것이 실재하는 것을 가리킨다면, 실재하지 않는 그것 역시 실재해야 한다. 이런 역설을 극복하려면, 추리 과정을 말로 표현할 때 좀더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일기의 문장으로 되돌아가 보자. 우리는 일기 속의 문장이 모두 객관으로 옳은 문장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가 지금 발견한 것은, 만일 하나의 보고서 문장이 객관으로 옳지 않다면, 그 보고서 문장에 대응하는 물리 대상이 있다고 추리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서 문장에 대응하는 물리 대상이 있다면 그에 따라 일어날 우리의 신체 상태가 있다고 추리할 거라는 것이다.

 

우리는 문장에 관하여 말함으로써 '주관 대상'과 같은 용어를 피한다. 반대로 문장들에 관하여 말하는 언어로 이처럼 바꾸는 일이 가능하므로, 이런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관 대상이 주관의 실재성을 갖는다고 말해도 될 것이고, 이리하여 우리는 허구의 실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표현들은 허구의 실재가 제거될 수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허용될 수 있다." (291~2쪽)


사람의 뇌는, 몸의 생리상태를 바탕으로, 스스로 관찰하여 주관 진술을 할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맥락에 맞지 않는 진술을 연결하여, 객관진술로 만들려는 방법들을 개발한다. 이런 노력을 통해, 꿈에서 만들어진 문장이 삶에 있어서 '섬'처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통합된다. 다만, 그 문장들은 객관 진술과는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

 

"객관으로 옳지 않은 보고서 문장들을 물리 세계에 관한 정합 진술 체계에 통합시키기 위해서, 리는 사람이란 관찰자의 신체가, 객관 대상이 없어도 관찰 문장으로 진술될 수 있다는 가정을 도입한다. 따라서 꿈에 관한 문장들은 순서 관계에 의해 생시 상태에 관한 문장들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꿈을 설명하는 생리학 법칙을 구성할 수 있고, 정신분석학자는 꿈의 경험을 이전의 생시의 경험과 인과로 연결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따라서 꿈을 바탕으로 한 문장 집단은, 섬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고 전체 체계속에 통합된다. 하지만 꿈에 관한 문장들에 대한 이런 해석은 생시 상태에 관한 문장들에 대한 해석과는판이하게 다르다." (292~3쪽)

 

주관 진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한참이나 돌아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체상태를 추리해야 주관 진술의 옳고 그름을, 의미를 파악할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부'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예컨대 전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선을 통해 흐르거나 빈 공간을 파동으로 이동하는 전기라 불리는 물리 현상이 있다는 가정을 도입한다.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침의 기울어짐이나 라디오의 수신기에서 들려오는 음악과 같은 현상이다.

 

전기는 결코 직접 관찰되지 않는다. 나는 이런 물리현상에 대하여 '추리된 것'이란 뜻의 추리물 (illata)이라 부르겠다.

 

추리물은 관찰 가능한 사물들의 세계를 이루는 구체물(concreta)과 구별된다.

 

추리물은 또한 추상물 (abstracta) 과도 구별되는데, 추상물은 구체물들의 조합이며 전체를 포괄하기 때문에 직접 관찰될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부'라는 말은 관찰 가능한 현상 즉 구체물 전체를 언급하며, 이 관찰 가능한 것들 모두를 연관 관계로 총괄하는 약어이다.

 

추리물은 구체물들의 조합이 아니라 구체물들에서 추리된 별개의 것이다. 추리물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구체물을 근거로 하여 추리된 거그한 것일 뿐이다." (293쪽)

 

* 거그한 = probable = 蓋然의 ; 거의 그러한

 

한스의 시대에는 사람 몸속의 상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장치들이 없었다. 지금은 몸속 상태뿐만아니라 세포의 움직임까지도 직접 관찰할수 있다. 생리학의 방법이 정신분석의 방법보다 신뢰를 얻는 이유일 것이다.

 

자극언어. 우리 몸이 반응하게 만드는 자극과 우리 몸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 자극과 몸상태를 아우르는 말. 중요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자극언어라는 단어는 나중에 이해할수 있도록 하고, 관찰할수 없는 것들을 간접진술하는 방법에만 집중하자. 객관 대상이 없는데도 우리 몸속에 어떤 상태가 만들어지는 것. 마치 자동차에서 떼어낸 속도계가 다른 방법으로 60km/h의 상태를 나타낼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처럼.

 

"사람 몸속의 상태는 추리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몸의 반응만을 관찰할수 있지, 뇌의 상태를 포함한 몸의 내부조건들을 관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 몸속의 상태를 묘사하는 데에는 간접화법이 사용된다. 예컨대 우리는 '그사람이 어떤 개를 보았다면, 일어나는상태'라고 말한다. 이런 간접화법은 자극언어(stimulus language)라고 불리어왔다. 우리는 이런 상태를 일으킬 자극의 종류를 기술함으로써 신체의 상태를 묘사한다." (293~4쪽)  

 

자동차에 달린 속도계를 보면서, 관찰자는 60으로 달리는 자동차가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런데, 자동차에서 떼어낸, 즉 객관대상으로부터 분리된 속도계도, 60의 속도 상태에 있는 것처럼 만들어질수 있다. 그때, 속도계만 보는 관찰자가 있다면, 자동차가 있는 것으로 생각할수밖에 없지 않는가? 대체로 속도계만 찍은 동영상을 보는 관찰자는, 속도계가 자동차에 연결되어 있다고, 즉 객관 대상이, 즉 세계가 실재한다고 착각할수 밖에 없다. 실제로는 자동차는 없고, 속도계만 있는데 말이다. 이렇게 되면, 세계는 실재하지 않는다.

 

관측과 관측에 의한 몸 상태로 세계가 실재한다고 우리는 믿고 있지만, 실재로 관측하지 않고 꿈을 꾸고 있어도, 관찰자는 똑같은 몸 상태가 될수 있다.

 

"세계가 실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란 물음이 지닌 의미를 명료하게 알수 있다. 이 물음은 다음과 같은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해 볼수 있다. 우리는 지금 깨어있는 상태에 있는가, 아니면 꿈속에있는가?" (295쪽)

 

모든 관찰을 기록하는 일기장에서,


꿈의 기록은 마치 대륙에서 떨어진 섬처럼, 
인과관계를 갖춘 
다른 많은 깨어있을 때의 기록들과는 다르다. 


그런데, 더 많은 기록들을 검토하면, 
인과관계가 다른 더 큰 섬이 나타날수도 있다.


오래된 일기장을 한번 들춰보라. 


그래서 우리는 깨어있었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 


우리가 깨어있을 확률은 높지만 
꿈을 꾸고 있을 확률도 배제할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깨어있다고 믿는 상태에서의 
객관 대상에 대한 관찰과 경험을 
소중하게 다루면 된다. 


그것은 예측할수 있는 지식을 우리에게 주고, 
우리가 그 지식을 바탕으로 행동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확률이 높다. 


그러면 된다. 


깨어있는지 여부를 100% 확신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세계가 실재하는가에 대한 
확실한 답을 구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질서있는 경험이라는 실타래가 끊어진다면, 
그리고 새로운 실타래가 만들어지긴 하지만 
언제나 다시 끊어진다면, 
우리는 객관의 물리 실재를 주장할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객관의 물리세계가 있다는 진술은 
옳을 확률이 높은 진술이라고 주장될수 있을뿐이지, 
절대로 확실한 진술이라고 주장될수 없다."  (296쪽)

 

말과 글에서 동등성 규칙이란, 관찰 가능한 것과 관찰 불가능한 것을 동등한 것으로 보고, 동일한 말과 글로 서술할수 있다는 규칙을 말한다. 관찰 가능한 것만 표현할수 있는 말글이, 관찰 불가능한 것까지도 진술할수 있게 된것은, 말글의 확장이다.  "물리 세계에 관하여 말하는 언어가, 관찰에 의하여 홀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것은 제11장에서 상상의 프로타고라스를 언급할 때 논의했던 애매성에 빠진다. 여러 개의 동등기술이 있고, 우리가 물리 세계를 기술하는 데 사용하는 일상의 실재주의 언어는 단지 이런 동등 기술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내가 정상 체계라 불렀던 것이다.

 

관찰 가능한 것과 관찰 불가능한 것을 동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동등성 법칙이라는 규칙이 정해진 후에만, 귀납 추리는 외부 세계에 관한 진술들의 일상 형식을 정립할 수 있다. 동등성 법칙이라는 이 규칙은 언어의 형식을 결정하는 정의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규칙은 언어의 확장 규칙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규칙은 관찰 불가능한 대상들을 포함하는 훨씬 더 넓은 대상 영역까지 언어의 적용 영역을 확장하는 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규칙이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 즉 일상의 물리 세계를 기술하기 위한 하나의 정상 체계가 있다는 것은 경험 사실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 사실은 귀납 추리에 의해 도출된다. 이런 의미에서 물리 세계가 실재한다는 것은 귀납으로 잘 확증된 가설이다.

달리 말해서 "물리 세계가 실재한다”는 진술은 “물리 세계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진술과 잘 구별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의 진술을 옳을 확률이 높은 것으로 만들고, 다른 진술을 옳을 확률이 낮은 것으로 만드는 경험을 서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진술은 그것들의 예측 내용이 다르다. 기능지식 개념은 물리 세계에 대한 가설에, 검증 가능한 의미를 부여한다." (296~7쪽)

 

우리의 경험은, 객관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것이 solipsism이라고 한다.

 

"유아주의(solipsism 唯我論)라는 생학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경험한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누구도 결코 이 주장을 넘어서서 객관 실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중략) 유아주의 이론은 완전히 불합리하긴 하지만, 우리가 그 이론에 대하여 반대하는 논증을 논리에 맞게 펼수는 없다고 주장된 적이 가끔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이 증명하는 것은 우리가 경험한다는 것뿐이지, 물리 세계가 실재한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97~8쪽)

 

나를 발견할수 있다는 주장은, 데카르트의 회의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할수 없다는 말과 같은 말처럼 보인다. 한스는 이것이 solipsism의 잘못이라고 본다.

 

"유아주의자는 근본 잘못을 범하고 있다. 유아주의자는 그자신의 인격이 있음을 증명할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아(ego) 즉 관찰자의 인격을 발견하는 일은, 외부세계를 발견하는 일과 똑같은 종류의 추리에 의거하고 있다." (298쪽)

 

높은 확률로 추리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물리세계와 나의 실재를 추정한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주의자로서의 자신있는 주장이다.

 

"우리는 물리 세계가 실재한다는데 대한 뚜렷한 증거를 갖고 있지 않으며, 또한 우리가 실재한다는데 대한 뚜렷한 증거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가정에 대한 훌륭한 귀납 증거를 갖고 있다. (중략) 우리는 우리의 인격뿐만 아니라 외부 세계가 실재한다고 추정하는데 대한 훌륭한 이유를 갖고 있다 - 즉 우리의 지식은 모두 추정이다. 그러므로 가장 일반 지식인 물리 세계가 실재한다는 것과 그 물리 세계 속의 사람이 실재한다는 것 - 도 하나의 추정이다." (298~9쪽)

 

dk

 

( to be continued like reading a testamen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