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호기심천국/영상과 함께 하는 호기심 천국

괴로움을 이길 수 있는 붓다의 제안_221214 el catorce de diciembre el miercoles_четырнадцать Декабрь Среда

'BC5세기를 전후해 인도 북동부 마가다지역에서 나타나는 고난 수행의 전통을 '슈라마나 śramana (한자로는 사문 沙門)'이라 한다. 이 전통을 이어받아 살아남은 사상은, 자이나교와 불교다'라는 강성용 교수의 강의는 늘 재미있고, 분명하다. 복잡하게 이야기해 봤자,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데, 분명하게 이야기를 정돈해 주니 좋다.

 

슈라마나는 브라만 중심의 제식주의에서 벗어나려는 거대한 수행 운동이었다. 그런데 힌두 전통에 의하면, 평범한 인간도 지독한 고통을 이겨내면 신과 같은 힘을 갖게 되어, 신들조차 인간의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과 결코 배치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브라만 중심의 수행에서, 크샤트리아 이하 계급의 수행이라는 점이 다르지 않을까 추정한다. 브라만교에서는 수행자를 요기 yogi 또는 무니 muni라 했으며, 붓다도 석가모니 즉 석가족의 수행자다.

 

"앙가라파르나는 계속해서 아르주나가 자신과 같은 천상의 존재를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그것은 그대가 금욕의 맹세를 지켰기 때문이다. 영웅아, 그대의 힘은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느니라. 하지만 욕망 따위나 좇는무사는 내 앞에서 절대로 생명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 (마하바라타 중에서)

 

"그들은 강요된 계급주의(Ashramadharma)의 굴레와 신과 사제들의 권능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종교체계(Brahmanism)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희생제를 올리는 제식을 비판하였으며, 조물주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힘을 신뢰하였다.

 

반면 자신의 노력 없이 부모로부터 세습된 사제계급의 지위, 응당 소유해야 할 아내와 자식, 그리고 세습된 부와 권세 등 자신의 종교가 보장한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브라만 사제계급은 그들의 기득권을 철옹성처럼 지키려 하였다.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성취하려는 자와 세습으로 모든 것을 구비한 자는 당연히 갈등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행주의는 베다적 전통에 합당하지 않다는 빤데(Pande)등의 주장을 고려할 때, 요가가 주로 베다 전통 안에서 환영 받은 반면, 고행주의는 자이나와 아지비까 등에서 성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략) 부처님 당시에 슈라마나로의 출가행이 성행하게 된 요인이 사회적 불균형과 경제적 빈곤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중략) 슈라마나들은 신을 비난했지만 탓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까르마(karma, 業)는 자신이 개척한다는 믿음에서 독립적인 수행의 길을 나섰던 것이다." ('인도 고대 탈권위주의 자유사상(Shramanism)의 정체와 의미' 중에서 / 최경아)

 

자이나교와 불교는 공통으로 아힘사 즉 불살생을 중요한 교리로 삼고 있다. 아힘사는, 특히 자이나교도들이 가장 중요하게 지키는 규율로서 동물이나 벌레는 물론이고, 뿌리 채소조차도 먹지 않는다고 한다. 뿌리를 먹으면 식물이 죽게 되니까.

 

아힘사와 함께 자이나교에는 살레카나라는 전통이 있다. 단식을 통해 고통을 견디며 죽음을 맞이하거나, 암치료를 거부하고 단식으로 죽어가기도 한다. 인권유린이라며 시민단체에서 법으로 규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하는데, 결과는 알 수 없다.

 

"인권운동가 소니 니킬(Soni Nikhil)이 2006년에 살레카나를 자살 및 자살교사죄로 기소 (중략) 살레카나를 최근 2015년 8월10일 라자스탄 고등법원에서 자살로 판결하자 이에 강하게 반발하는 자이나교도들의 대규모 집회가 이어졌고, 8월 31일에 대법원에서 이 판결을 유예시켰다." ('각성된 죽음, 자이나교의 살레카나' 중에서 /  양영순 / 동국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던져진 '나의 삶'은 고통스럽다. 인간이기에 삶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인간만이 자기 삶의 선택권을 갖는다. 삶은 고통스럽기 보다는 즐겁다는 것을 옛 현인들은 잘 몰랐던 모양이다. 한국은 확실히 삶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 사철가를 보더라도 '사후에 만반진수는 생전에 한잔 술 보다 못하다'라고 하지 않던가. 즐거운 삶을 살다가 기왕이면 고통없이 조용한 죽음을 맞이하기를 바란다. 그 방법으로 살레카나가 가능한 것일까.

 

살레카나는 생명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임으로써 불살생에 기여하는 아힘사 정신에 기반했다고 한다. 어쨌든 죽음에 대해서 너무 심각하게 공부하고 연구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크라테스처럼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죽음의 저편에서 돌아온 사람이 없으니 다들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가 아닌가 싶다.

 

"삶의 부조리에 굴복한 자살과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한 수행의 일환이자 완성인 살레카나는 정반대에 위치해 있다. 그들은 살아있는 동안에 죽음을 선취(先取)하는 수행을 통해 죽음을 주체적으로 직면하고 극복한다. (중략) 현 인도에서 연간 300-400명이 살레카나로 삶을 마감하고 있을 정도로 살아있는 전통이다. (중략) 활동적 실체(dravya)인 영혼과 물질의 이원론에 기반하여, 물질로부터 영혼이 해방되는 정화의 길을 추구하는 해탈 수행론이 골격이다. 순수한 영혼에 오염된 감정을 매개로 하여 부착된 물질은 카르마의 장(業障, karamāvaraṇa)을 형성하며 영혼을 속박하여 윤회하도록 한다. 탐진치 등으로 오염된 마음을 단식과 명상 등의 수행으로 정화하여 영혼만이 독존(獨存, kevala)하게 되는 경지가 해탈이다."  ('각성된 죽음, 자이나교의 살레카나' 중에서 /  양영순 / 동국대)

 

인간의 지바 : 생명 : 아트만이라고도 한다. 아트만에 좋고 나쁜 카르마가 붙는다. 행동 또는 말, 생각으로 카르마가 나의 아트만에 붙는다. 나쁜 카르마를 정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고통을 받고 이겨내는 것이다. 붓다도 카르마도 이렇게 생각했다고 본다. 붓다 고행상이 있는 이유다. 고행을 넘어서 순수하고 선한 아트만을 갖게 되어야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붓다는 사회의 인정을 받았다. 붓다는 전쟁 회피를 목적으로 출가하는 사람은 제자로 받지 않았고, 병자가 출가를 원한다면, 병을 고치고 오라고 했다. 율장에 이러한 기록들이 있다. 붓다의 규범 체계가 다르마였다. 고생을 해야 한다는 전제를 벗어버리고 해탈을 추구한다. 디아나. 생각한다는 말이다. 고행도 쾌락도 아닌 중도가 중요하다. 사성제. 

 

출가는 사회로부터 죽은 자이다. 죽은 자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베다 전통에 의하면 정화는 불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붓다는 이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전통, 불을 꺼버리는 전통, 아그니를 확립한다. 인생의 괴로움을 꺼트리는 것의 상징이다.  장작을 넣지 않으면 번민의 불이 꺼진다.

 

장작을 넣지 않으면 번민의 불이 꺼진다.

(to be continued like reading a testament)

 

https://www.youtube.com/watch?v=HHAkjqKJBjk&list=RDCMUCY0c16JUbU4Um3IM9q0VowA&index=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