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이야기/음악이야기

살 떨리는, 오케스트라_221112 el doce de noviembre el sábado_двенадцать ноябрь Суббота

10.29 참사로 희생되신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

 

우주신이 남겨 둔 바이올린으로 관 뚜껑 여는 소리를 참아가며 수개월을 버텼다. 지독한 소리에 무뎌질 즈음에 음성 마을 오케스트라가 만들어졌고, 참여했다. 열심히 할 생각이었으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11월 12일이 공연인데, 이틀 전인 10일에도 My Way는 전체 곡의 흐름조차 모른다. 마음이 급해졌다. 총 네 곡인데, 제2바이올린이라는 것이, 우리가 아는 음을 그대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다. 화음을 넣고, 2중주를 만들고, 기다리고, 합주를 하는 등 연주를 주고받는다. 그래서 더 어렵다. 

 

이문세의 '붉은 노을'은 그리미가 좋아하는 곡이라 옆에서 많이 들어 알고 있었지만, 내 취향은 아니어서 세세한 부분은 몰랐다. 작고한 이영훈 님이 작사 작곡한 신나는 노래다.

 

"1980년대 말에 와서는 급기야 가요와 팝의 위대한 역전이 이뤄졌다. 이영훈 선생의 업적 중의 업적은 서러움과 멸시의 굴레에서 허덕이던 가요가 당당하게 대중음악의 주체로 상승하게 된 밑거름을 제공했다는 데 있다. (중략) 이영훈은 정규음악 수업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구축한 독특한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음악을 전공하지는 않았고 바이엘, 체르니를 혼자서 독학했다.

 

(중략 / 이문세와 이영훈) 두 사람은 곧 의기투합해 서울 수유리 자취방에서 밤을 새우며 작업했다. 6개월에 걸쳐 8곡을 완성한 이영훈은 "쉬운 노래를 하나 만들어 보겠다"라고 하더니 30분 만에 한 곡을 만들었다. 그 곡이 바로 '난 아직도 모르잖아요'였다.

 

(중략 / 아들 이정환) 혼수상태에 빠지셨을 때인데, 가끔씩 의식이 돌아오셨었어요. 그럴 때마다 허공에 대고 지휘를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정말 아플 때인데도 옅은 미소를 띠시면서 너무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었다고…. 그때 들은 멜로디 모티브를 노트에 힘겹게 적으셨던 메모가 있어요. 밑에 ‘아름다운 멜로디’라고 쓰셨더라고요."(나무위키 중에서)

이영훈의 글 (출처 : 나무위키 "이영훈(음악가)" 중에서)

노래를 모르는 상태에서, 바이올린조차 잘 다루지 못하니, 연주가 아닌 소음의 바다가 계속된다. 이 힘든 소리를 지휘자 장선생님과 바이올린반 동료들이 참고 들어준다. 뿐만 아니라 틀린 부분을 고쳐주고, 활 표시를 그려주면서 뒤처지지 않도록 잡아준다. 포기하지 않은 큰 힘이었다. 정말 고마웠다.

 

집에서는 그리미와 우주신의 도움을 받아, 박자가 심각하게 틀리는 부분을 바로잡았다. 틀리는 부분을 안다고 해서 연주를 제대로 한 것은 아니다. 종합연습에서는 단 한 번도 정확하게 연주하지 못했다. 물론 천천히 할 때는 된다. 연주 속도를 올리면 엉터리가 된다. 그나마 제일 많이 연습한 곡이라서 익숙하고, 주요 악보는 외우기까지 했다.

 

문제는 활의 오르내림이다. 독주를 하게 되면 문제가 없을 텐데, 제2바이올린은 다섯 명이 함께 연주하다 보니 활질이 맞아야 한다. 어쩔 수 없이 활질도 악보의 지시대로 따라야 했다. 올림 활 - 다시 올림 활 - 이음 줄 소화하고, 내림 활 - 올림 활 - 내림 활 짧게. 

 

아리랑 Korean folk rhapsody은 연주 내내 악보가 연결되어서 따라가기는 좋았다. 중간중간 익숙한 가락이 이어지니 마음의 부담도 덜 했다. 문제는 반음의 차이다. #과 b이 나타났다 사라지는데, 몸은 반응하지 않는다. 연속되는 이음줄도 문제였다. 오른손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이음줄을 보면 천천히 움직여야 하는데, 음표가 달라지면 활 방향이 바뀌는 것에 먼저 반응한다. 왼손의 운지가 바뀌면 오른손의 활질 방향도 자연스럽게 바뀐다. 왼손과 오른손을 따로 놀게 하는데 한참이 걸렸다.

 

그래도 많이 틀리다 보니 틀리지 않는 방법을 깨달았다. 천천히 하면 된다. 악보 여기저기에 '천천히' '천천히'를 써넣었다. 천천히 따라가면 따라갈 수 있는데, 늦었다 싶어 서두르면 맞추지 못한다. 연습을 천천히 했으니, 천천히 하는 것에 익숙한 것이 당연하다. 다른 연주자들의 속도를 의식하다 보면 초조해진다. 초조하면 박자는 빨라지고 운지가 틀어지면서 활질이 빗나간다. 이상한 소리가 나면 당황하고, 당황하는 시점부터 연주는 즐거움이 아니라 살 떨리는 전쟁터가 된다. 천천히, 천천히.

 

이 곡의 작곡자는 미국인 제임스 커노우 James Curnow다. 이분은 도대체 누구시길래, 이 노래를 만드셨을까? 작곡자이자 교육자인 커노우는 1988년 아시아의 소리, 특별히 한국의 소리를 미국 학생들에게 이해시키려고 했다. 아리랑은 전 세계에서 3,600개 이상의 다양한 변주곡이 만들어져 있는데, 자신의 감성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다. Thank you, Curnow!

 

"제임스 커노우 James Curnow(1943~  )는 켄터키 주 니콜라스빌에 살고 있으며, 애스버리 대학의 작곡가(명예)이다. Curnow Music Press, Inc.의 사장, 작곡가 및 교육 컨설턴트이며, '애틀란타 구세군 Atlanta salvation army' 을 위한 모든 음악 출판물 편집자이기도 하다."(메릴랜드 대학 자료 중에서) .

 

세 번째 곡은 My Way. 트럼펫 소리가 정말 아름다웠다. 전체 음원이 없는 데다가, 한 음으로 반주를 하는 구간이 가장 많아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무리 비슷한 음악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어서 도저히 연습이 불가능했다.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세 박자는 한 번에 세고, 네 박자는 두 번에 나누어 자연스럽게 박자를 세어보니, 연주하면서 박자 세기가 가능했다. 박자는 박자고 연주는 연주인 것이 아니라, 박자가 곧 연주가 되는 상태를 느꼈다.

 

자리도 잘 앉았다. 내 옆에 잘하시는 분이 있어서 그분을 따라 하다 보니 연습 때보다 연주회에서 더 편안하게 연주했다. 세 곡을 마치고 났더니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웃음이 난다.

 

"성공한 영화배우이자 가수로 승승장구하던 프랭크 시내트라는 이 노래를 낼 1969년 당시에는 이혼과 영화 사업 실패로 연예계를 은퇴하려는 생각 (중략 / 원곡은) 프랑스 노래로 폴 앵카가 영어로 가사를 다시 썼다. (중략 / 폴이) 처음 들었을 때 곡은 좋지 않았지만 뭔가 끌리는 게 있었다.

 

(중략 / 저작권을 산 ) 폴은 뉴욕으로 돌아와서 새벽 한 시에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뉴욕에는 비가 오고 있었는데 그 느낌으로 인해 영감을 받았다.  가사를 쓰면서 (중략) 멜로디도 살짝 바꾸었다. 다 쓰고 나자 새벽 5시가 되었고 폴은 프랭크에게 전화를 걸어 프랭크만을 위한 특별한 곡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가사는 죽음을 앞둔 한 남자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는 고백을 담고 있다." (나무위키 중에서)

 

마지막 You raise me up. 이 노래 때문에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끝없이 노력했다. 눈을 감고 호흡을 하고. 연습실에서는 제2바이올린이 들어가는 부분을 찾지 못해서 아예 활질을 하지 못했다. 큰일 났다. 두 차례의 종합연습에서도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정말 잘 아는 노래인데도 말이다. 다행이었던 것은 연주 음원이 있어서 수십 차례 반복해 들으니 조금씩 들어갈 부분이 찾아진다. 제대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이음줄 처리 때문에 활질 방향이 잠깐씩 틀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록 혼자 하는 연습이었지만, 11일에는 대여섯 번 정도 제대로 끼어들기를 해냈다.

 

가사가 정말 좋다.

 

나는 당신과 함께 할 때에야 비로소 강해집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늘 격려해주기 때문이지요.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 You raise me up more than I can be"

 

인간은 관계 속에서 생존하고 발전하다. 인간과 신, 인간과 인간, 심지어는 "나와 적"의 관계조차도 배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를 이끄는 관계라는 것을 명심하고, 사랑하라는 잠언이다.

 

오케스트라는 작은 단체다. 단체를 이끄는 리더는 대체로 '독재와 폭력'의 유혹을 받는다. 그것이 말 많은 인간들을 상대하기 쉬운 방법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재와 폭력의 리더십은, 독재자 자신과 단체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여러 단체들에서 활동한 경험에 비춰봤을 때, 우리 지휘자 선생님의 열린 리더십, 민주주의 리더십은 존경할 만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끈기 있게 기다려 주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음악치료를 통해 변화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많이 봐왔기 때문일 것이다. 오케스트라에 첫 발을 디디면서 장 에스더 선생님을 만난 것은, 내게는 큰 행운이다. 나는 독재와 폭력에 너무 약하고 두렵다. 감사합니다, 장선생님.

 

좋은 지휘자와 동료들이 있었어도 힘들었다. 개인 연습이나 파트별 연습 시간은 평일 저녁이어서 부담이 없었는데, 전체 연습은 늘 주말이었기 때문이다. 연주회 날까지 총 세 번의 주말을 부천에서 음성까지 130km를 왕복해야 했다. 애써 갔는데 연주는 전혀 맞추지 못했으니 돌아오는 길이 암담했다.

 

"오케스트라는 나의 길이 아닌 모양이다. 그냥 독주나 하자. 그런 생각이 늘 들었다."

 

그런데, 연주회 전날 혼자 하루 종일 개인 연습을 하면서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오케스트라의 음원을 들으며 연습을 하니,  내가 '훌륭한 음악'의 한 파트를 담당하고 있다는 즐거운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연주를 즐기며, 내 연주를 덧붙여 완성한다는 즐거움. 좋았다.

 

연습하는 내내 그리고 연주회 날까지 3개월 동안 단 하루도 편안한 날은 없었지만 끝내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다시 하고 싶은 기분이다. 바이올린도 하고, 첼로도 배우고, 플루트 클라리넷 트럼펫 색소폰도 하고.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악기를 다 해 보고 싶다. 어차피 대단한 연주자가 될 수는 없다. 아름다운 소리가 이끄는 데로 함께 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L0n5nolA2jA 

고소현과 충북 청소년 교향악단 : 치고이너바이즌 ‘Zigeunerweisen’ Op.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