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까지 무지하게 내리던 비가 7시가 되자 그쳤다. 비가 확실하게 그친 것을 확인하고, 일단 모두가 달려 들어서 고추를 땄다. 엿새 만에 따는 것이기는 하지만 제법 양이 많았다. 열 명이 투입되어 한 시간 만에 끝냈다. 여자들은 고추를 씻고, 남자들은 참깨 베기를 했다. 아침도 제대로 먹지 않아서 그리미가 식빵과 커피를 가져와서 밭둑에 서서 먹었다.
안전 안전을 외치며 작업을 했다. 참깨 상태는 심각했다. 쓰러진 참깨는 잎들이 썩으며 곤죽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참깨를 베어 말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참깨 알맹이를 찢어 보았더니 통통하지는 않지만 하얀 참깨가 익어가고 있었다. 그래, 되든 안되든 베어서 말려 보자. 1조는 참깨를 베고, 2조는 마음이로 운반해서 반장 댁 하우스로 나르면, 3조가 묶어서 하우스에 널어놓기로 했다. 참 잘 짜인 작업 계획이다. 그러나.
막 작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권씨가 나타났다. 아래 밭 친구인 권 씨가 손짓으로 나를 부른다. 친구인 나를 그는 항상 부른다. 손짓으로 까닥까닥, '어이, 이리 와 봐'.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우리 배수로로 빠져야 할 물이 아래 길로 흘러서 넘쳐 비포장 도로를 망친다는 것이다. 비가 많이 내려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말도 틀리지 않아 보여 내년 봄에는 배수로를 개방하겠다고 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우스 물차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했다. 권 씨는 딱 잡아뗀다. 아무 잘못이 없으니 우리 집 배수로나 똑바로 내란다.
열이 받아서 한 바탕 퍼부어 주고 사과를 했다. 20여 분을 입씨름했다. 그러고 나자 밭둑을 파서 비닐을 묻어 물이 스며 내리지 않도록 하겠단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해결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노력을 해 준다면 나 또한 양보할 수 있다. 서로 사과를 하고 웃는 낯으로 헤어졌다. 원래부터 사과를 할 생각이었지만 천재가 나서서 중재를 해서 더 빨리 마무리가 되었다. 이웃과의 다툼이 없을 수는 없으니, 주먹다짐까지는 가지 말고, 서로 실컷 떠든 다음에, 서로 한 발씩 양보하고, 잘못한 사람이 자기 잘못을 수정하고, 그 자리에서 화해를 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와 나는 용띠 동갑이기까지 하다.
작업 시작 한 시간도 안 되어서 그렇게도 안전을 외치던 내가 낫에 손이 베이고 말았다. 흑.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와 지혈 하고 소독을 했다. 비가 쏟아진다. 밭에서 일하던 사람들 모두 돌아왔고, 고추를 씻던 사람들도 철수했다. 아무래도 1.5cm의 상처라 세 바늘 정도 꼬매야 할 것 같다는 동서의 의견을 쫓아 금왕 권 외과로 갔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소독을 하고, 마취를 하고, 꿰매신다. 인대 손상이 없으니 일주일 정도 치료하면 된다. 약을 받아서 집으로 향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온 김에 마트에 들려 생수 댓병 6병을 사고, 점심에 먹을 고기를 사러 일죽으로 나갔다. 육회 한 근과 삼겹살, 목살을 각각 한 근씩 사 왔다. 그때까지 비가 계속 내려서 농활단은 편하게 휴식을 취했다. 청국장찌개를 끓여서 육회를 비벼 같이 먹었다. 훌륭하다. 어제 골뱅이 소면을 무쳐준 그 처제의 육회 만드는 솜씨 덕분이다.
음성에 다녀오는 동안 비가 그쳐서 농활단이 땀을 뻘뻘 흘리며 참깨를 베어 놓았다. 깜짝 놀랐다. 적은 양이 아닌데 불과 두 시간 만에 베어 놓은 것이다. 그리미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동서는 처제가 손이라도 다치고, 허리라도 분지를까 봐 안절부절 맴을 돈다. 고추를 씻을 때도 비가 내리자 우산을 받쳐 주는 등 여간 챙기는 게 아니다. 농활을 마치고 올라간 처제가 '남편이 이렇게 살뜰하게 보살펴 줄줄 몰랐고, 너무 좋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부부 금슬의 고양을 위해서라도 매주 무일농원 농활을 와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다시 비가 내려서 일단 휴식. 그 사이에 동서 내외가 서울로 출발했다. 이틀 동안 요리와 작업을 모두 책임지고 임무를 완수하고 떠난다. 오후 4시가 되자 비가 그친다. 이 때부터 무려 3시간 동안 참깨를 옮기고 묶고 매다는 작업을 여섯 명이서 함께 했다. 어제와 오늘 새벽, 낮에 이은 네 번째 작업 타임이 너무 길었다. 베어 낸 참깨의 양이 워낙 많다 보니 도무지 속도가 나지를 않는다. 다들 웃으면서 작업을 하지만, 모기와 더위와 피로에 지쳐가고 있다.
7시가 되자 그리미가 작업 중단을 선언했다. 잘했다. 작업을 계속했더라도 끝내지 못했을 것이다. 날이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이미 더위와 피로로 지친 상태라 톡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상황이었다. 작업을 중단하고 씻고 나니 한결 몸과 마음이 홀가분하다. 고기를 구우며 짜장면과 짬뽕을 주문했다. 삼겹살과 한우 곱창을 다 먹었는데도 짜장면이 오지 않는다. 전화를 했더니 배달길이 너무 멀어서 취소했단다. 사과도 없이 적반하장이다. 헐, 금왕 바닥에서 다시는 장사하기 힘들게 해 주려 했는데, 주변에서 말려 참는다.
배달하기에 너무 멀어서 힘들면 미리 연락을 해 줘야 우리가 가서 가지고 올 수 있지 않은가. 내곡 수퍼까지만이라도 배달을 해 주면 서로 좋을 수도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뒤통수 때리기로 밥벌이를 하려고 하다니.
할 수 없이 다시 목살을 굽고 오뚜기 진라면 다섯 개를 끓여서 김치와 함께 맛있게 먹었다. 오늘 하루 사용한 작업복과 수건과 양말들을 빠는 데만도 4시간이 걸렸다. 내일 아침까지는 말라야 할 텐데. 꿰맨 상처는 가벼운 통증은 있지만 특별히 문제는 없다. 농활단이 아니라 내가 다쳐서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조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