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한동훈의 모습에 반했다. "일개 장관"이라고 툭 내뱉을 만큼 기개가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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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 대통령"이라고까지 말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역시 검찰 엘리트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한계를 분명히 잘 안다. 뽀샵질을. 감히. 사법부 적폐도 처리 못하고, 빙빙 여론에 끌려 다니는 한심한 문재인 정부. 이제 2년 남았는데, 도대체 무엇을 할지 답답하다. 전문가 말 잘 듣고, 제 목숨 소중한 것을 너무도 잘 아는 국민들이 코로나에 잘 대응한 것이지 정부가 잘한 일은 별로 없다. 아베나 트럼프와 비교하고 싶으면 그러시던가. 한동훈이 저렇게 열심히 잘해 주는데도 받아먹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검찰 개혁과 사법부 개혁은 물 건너가고, 민주당 정치인들의 권력과 명예와 돈과 사랑놀음들이 만발할 것이다. 이제는 민주당 말고는 대안도 없으니. 공수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은 물론이고, 비리와 욕보이기는 민주당 내부에서 나올 가능성이 열 배는 더 높다. 그래도 참 좋은 세상이다. 이 좋은 세상을 왜 꼭 지옥처럼 살아가는 것일까. 이해가 되면서도 안타깝다. 비가 와서 하루 잘 놀았다. 무안 92.
1. 장미의 이름 하 :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전자책 장미의 이름 상권은 빌리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하권은 너무나도 쉽다. 더 읽지 않는다는 뜻이다. 원문은 어쩔 수 없으니 새로운 언어로 시대 흐름에 맞는 번역이 필요하다. '까마득한 노대' '산협이 문득' '여상스럽게 견디다' '동도의 도반들' '검은 머리가 모시 바구니 될 지경' 등등 (이상 하권 14%) 너무 많아서 일일이 지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번역에 쓴 단어들이 오래되고 거슬린다. 감동을 줄 수 있는 멋진 단어와 문장들로 바꿔야 한다.
검은 머리 이야기가 기가 막혀서 검색을 해 봤더니 옛날이야기에 하룻밤 사이에 모시 바구니가 될 지경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 이야기의 말미에 "꿈은 개인의 신화이고, 신화는 집단의 꿈이다"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용이 있어서 옮겨둔다(다음 블로그 '혼자 가는 길'에서 재인용).
에코는 가톨릭의 마녀사냥과 면죄부 판매의 생생한 현장을 전하고 싶어서 이 소설을 쓴 것일까. 너무도 적나라하다. 상권으로 거슬러 올라 가 만 권의 책으로부터 뽑아낸 마녀사냥의 처참한 모습을 다시 옮겨놓고 싶다. 가톨릭 신자라는 게 부끄러울 지경이다. 가톨릭은 이 죄악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구원했을까. 자신의 신도들과 형제들에게 저지른 이 죄악들을 스스로 용서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아비뇽에 가면, 한 손은 십자가에 못 박혀 있고, 한 손은 허리에 찬 지갑에 손을 대고 있는 그리스도상을 구경할 수 있을 겁니다. 돈이 좋은 목적에 쓰여야 하는 걸 상징한다나 (중략) 그거야말로 독신 아닙니까?" (하권 17%)
종교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협박. 인간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겁을 먹고 악행을 멀리 해야 하는 것이 맞다. 교회 사람들이 호의호식하기 위한 수단으로는 쓰이면 안 된다. 언제나 이런 당위는 부정되기는 하지만. 그리고, 아무리 선한 동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면 안 된다. 사기를 치다 보니 진짜 사기를 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웬만하면 선한 동기를 가지고, 선한 과정을 거쳐야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아이고 예수님, 저희를 도우소서! 악행을 일삼다가 죽으면 바로 지옥 간다는 위협도 못 하고서야 앞으로 죄인 대중을 무슨 수로 가르칠꼬!" (하권 17%)
갑자기 "이유가 나변에 있겠어요?(하권 17%)"가 튀어나온다. 사전을 찾아봤더니 "어느 곳"이란다. 이것 참, 한자어도 좋기는 하지만 좀 심하다. 이윤기가 번역한 그리스 로마 신화가 왜 이렇게 읽히지 않을까 생각했더니 이런 것이 걸렸나 보다. 다시 읽어봐야겠다.
진리와 진실을 깨닫는 순간. 그 순간을 위해서 여러 가지 상상을 하고 추론을 해 봐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열심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확 드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다. 유전자 탓인지 훈련 부족인지는 알 수 없다. 오래전에 산수 문제를 풀 때, 끊임없이 고민했던 경험은 있다. 인생의 모든 문제에 관하여 그런 고민을 할 수 있을까. 이제부터라도.
"나는, 사부님이 만물과 지성의 다리 노릇을 하는 진리에는 통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오히려 얼마나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 낼 수 있는지를 상상하는 편을 더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하권 21%)
2. 중국인이야기 6 : 김명호 지음 / 한길사
김명호가 정리한 타이완의 근현대사를 다시 요약해 본다. 김명호가 이야기 한 관료들의 자부심과 특권의식. 거기에 더불어 역사의식 없는 부패한 관료와 공권력(군인과 경찰)이 타이완의 전후 비극을 만들었고, 핵심에 일본 육사 출신의 친일파 천이가 있다.
"50년에 걸친 일제의 타이완 통치 후반기는 수탈과 거리가 멀었다. 타이완을 남진 거점으로 삼기 위해 공업 전력 교통 항만시설 건설에 적극적이었다. (중략 /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 후) 장제스는 귀국과 동시에 타이완 접수 준비를 서둘렀다. (중략) 타이완은 고산족을 제외하면 푸젠 사람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타이완을 잘 모르고, 타이완도 중국을 잘 모른다. 천이가 적격이다. (중략)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하고 (중략) 일본 고위 관리나 기업인들과 친분이 두텁다. 이들의 잇속을 챙겨주며 자신도 치부했다. 부인은 일본 게이샤 출신이다. 부인과 사별했다는 말에 속아서 천이와 결혼했다고 한다. (중략) 루어우차오 사변 이후에도 푸젠 성의 반일운동을 진압하며 일본과의 왕래를 그치지 않았다.
(중략 / 1946년 6월) 중국은 내전에 휩싸였다. (중략 / 타이완이 정토라는 말에 행정장관 천이가 화답하여) 깨끗한 섬에 걸맞는 문민 통치를 펴겠다며 대륙에서 파견한 군인들을 철수시켰다. 천이는 여자는 가까이했지만 술과 담배라면 질색이었다. 부하들에게 술 마시고 담배 연기 내뿜을 시간 있으면 여자와 놀러 다니라고 권할 정도였다. (중략) 국공내전이 발발하자 국민당은 일본이 타이완에 비축해놓은 물자들을 대륙으로 이전했다. (중략) 천이 본인만 청렴했지 관원들의 부패는 일본 통치 시절보다 더했다. 타이베이를 비롯한 대도시의 물가가 폭등했다.
학생들도 불만이 많았다. 대륙에서 온 교사들은 중국어를 못 하는 학생들을 개 돼지 취급했다. 온종일 모아놓고 국가만 부르게 했다. 발음이 조금만 틀려도 두들겨 팼다. (중략) 우리는 조국을 잊은 적이 없었다. 조국인지 뭔지는 어디에 있는지 사방을 둘러봐도 찾을 길 없다. 대륙과 타이완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바다 건너온 사람을 '외성인'이라 부르며 저주했다.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중략 / 1947년 2월 27일) 외제 담배 가판상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린장마이라는 여인이 현장에서 붙잡혔다. (중략)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단속원은 린장마이의 어깻죽지를 곤봉으로 후려갈겼다. (중략 / 2월 28일) 시위 행렬은 행정장관공서를 조준했다. (중략) 평소 천이는 행정장관공서에 무장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중략) 천이는 난징의 장제스에게 진압을 위한 파병을 요청했다. (중략) 무자비한 진압이 시작됐다. 청년 2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중략) 2.28 사건은 주도세력이 없는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처리위원회도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모이다 보니 확실한 지도자가 없었다. 과부들만 양산한 채 허망하게 끝났다.
(중략 / 1953년 7월 7일) 진먼 방위사령관과 미군 고문단이 지휘하는 국민당 대부대가 푸젠 성 둥산도에 상륙했다. (중략) 여섯 시간 만에 둥산도를 점령, 청천백일기를 휘날리며 만세를 불렀다. (중략) 중공의 반격이 시작됐다. (중략) 국민당군 3,400여 명이 전사하고 항공기와 탱크가 고철로 변했다. (중략 / 국민당군은) 147명을 진먼도행 함선에 쓸어 넣었다. 91명은 처자식이 있는 가장이었다. (중략) 38년이 후딱 지나갔다. 퉁보촌 여인들은 국민당 가족이라며 박해를 받지 않았다. 문화대혁명 시절에도 보호를 받았다. 1987년 9월, 타이완 [자립만보] 기자 두 명이 둥산도를 찾아왔다. 두 사람은 타이완촌이 과부촌으로 바뀐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전 세계에 퉁보촌 여인들의 비극을 타전했다. (중략) 새벽이 뭔지도 모르고, 황혼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중략) 눈앞이 캄캄하고, 뭘 봐도 음침할 뿐, 아직도 너는 나를 바보처럼 기다리게만 했다.
(중략) 연해지역을 엉망으로 만든 왜구를 따라 하자 (중략) 장제스는 긴말하지 않았다. 고개만 끄덕였다. (중략 / 1960년) 수중 폭파 요원 양성에 매진하고 해상돌격대를 발족시켰다. 해상돌격대는 하루가 멀게 대륙 연안을 습격했다. 날이 갈수록 산둥에서 광둥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확대됐다. (중략 / 1962년) 대륙에 기근이 덮쳤다. (중략 / 1964년 6월 산둥에서) 상륙에 성공한 돌격대는 열 시간가량 격전을 벌였다. 인민해방군 30여 명을 쓰러뜨렸다. (중략) 와보니 재가 된 한 명 외에는 희생자가 없었다. 산둥반도 돌격대의 쾌거에 타이완 전역이 떠들썩했다.
(중략 / 1970년대) 대권을 장악한 장징궈는 반공대륙 대신 타이완 건설을 표방했다. 1975년, 중국은 감옥에 있던 국민당 간첩을 석방했다. 해상돌격대 출신 56명도 홍콩 땅을 밟았다. 1987년, 장징궈가 대륙 방문을 허락했다. (중략) 타이완 정보국 자료에 의하면 해상돌격대원은 2,000명 내외였다." (26~33%)
둥산도 과부촌의 비극을 정점으로 하는 타이완의 슬픔에서 장징궈의 타이완 건설까지 농도 짙은 타이완 기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