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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술을 이야기하다_스피릿로드_200107 вторник

삼십 년 동안 술을 마셨으면서도 술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던가. 술에 관한 드라마는 본 적이 있는데, 책은 읽은 적이 없다.여행 프로듀서 탁재형이 술에 관한 책을 썼다. 스피릿 로드 spirit road. spirit은 정신 영혼이라는 뜻과 함께 도수가 높은 증류주를 뜻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술술 잘 넘어간다고 해서 술이라고 하는데, 정신과 영혼을 빼앗기거나 순수하게 만드는 것이 도수 높은 술이라 spirit이라고 칭했을까. 재미있는 단어를 알게 되어 기쁘다.

 

러시아가 경제 위기로 정신을 못차리고 있을 때, 보드카 제조기술이 해외로 이전되어 앱솔루트는 스웨덴, 스미르노프는 미국에서 생산된 보드카로 세계 시장에 등장한다. 러시아의 보드카는 루스키 스딴다르뜨 Русский Стандарт. 망가진 전통 양조 기술을 복원하면서 21세기에 들어서서 비로소 러시아의 전통 술 산업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요즘도 심심찮게 공업용 알콜올로 보드카를 대신하다가 실명하거나 목숨을 빼앗기는 러시아인들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보드카는 밀, 보리 등의 곡류나 감자로 만든다. 러시아에서는 밀로 만든 보드카가 가장 흔하다. 보드카 제조의 특징은 자작나무나 숯을 이용한 여과 과정에 있다. 알코올 증기가 숯과 모래가 들어있는 증류탑을 통과하면서 모든 향미 성분이 제거된다는것이다. 그래서 보드카는 무색, 무미, 무취인 것을 최고로 친다." (39~40쪽)

 

요즘 들어 마시는 술의 종류가 다양해졌다. 소주와 맥주, 위스키는 옛날부터 마셔왔고, 2010년 중국 출장 이후로 바이지우, 럼, 보드카까지 다양한 술을 접하게 되었다. 뭔지 모르게 만족스럽다. 취하는 것은 똑같지만 독특한 맛이 느껴질 때 새로운 문화를 만나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작년부터 차와 함께 마시는 독주의 맛을 즐기고 있다. 술이 약하다 보니 독주를 두 세 잔만 마셔도 금방 취기가 올라서 더 마시기 힘든데, 뜨거운 자스민차나 블랙티와 함께 마시면 술이 덜 취하고 빨리 소화가 되어 좋다. 아직 우리나라 술에서는 큰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강한 자극 때문이다. 똑같은 증류주인데 부드럽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크다. 잘 만들어진 우리나라 전통주를 마실 수 있다면 또 하나의 기쁨이 될 것이다.

 

"중국의 유명 양조장에 가면 마오쩌둥 등 국가 지도자들의 휘호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술을 나라의 보물로 여기고 그 제조 기법을 잘 살리는 것을 국가적 과업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효율과 저렴함이 최고의 가치이던 시대에 전통 제조 방식을 한참 벗어나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는 점에서 중국의 바이지우와 한국의 소주는 같은 아픔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바이지우가 다시금 전통을 되살려 세계 주류시장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선 중국이 우리나라를 앞서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98~99쪽)

 

우리의 세계여행 리스트에 없던 루마니아는 코마네치의 나라다. 유럽의 변방인 루마니아에 빨링꺼라는 기가 막힌 술이 있다고 한다. 사과, 배, 자두 등 제철 과일을 두세 달 발효시킨 다음 증류해서 만드는 술로 두 번을 증류해서 알코올 도수가 60~80도가 된다고 한다. 이런 유해 식품을 사람들은 왜 마시는 걸까. 마셔본 적은 있지만 즐겨찾지는 않는 60도 이상의 술. 과연 맛을 볼 수 있을까.

 

"식도를 태우는 것으로는 부족한, 송두리째 둘둘 말아버리는 것 같은 고통. 비록 찰나이긴 하지만 그것은 분명 고통이다. 하지만 삽시간에 그 괴로움을 지우며 올라오는 것은 머리를 풀어헤친 발레리나의 광기 어린 춤 같은, 강렬하고 발랄한 과일향기. 0.5초 안에 극한의 자학과 보상을 오간 체험 (중략) 5리터만 구입하고 싶습니다." (28쪽)

 

알콜은 아랍어의 화장용 고운 가루인 '알 쿨'에서 나왔다. 17도를 넘어서면 알콜 발효를 주도하는 효모균이 죽게 되어 이보다 높은 도수의 알콜을 얻기 위해서는 증류법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것을 아랍(페르시아)에서 처음으로 발견했다. 탁재형은 이슬람 문명이 자리잡은 7세기 이후에 술을 금지하게 되면서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증류법은 몽골을 거쳐 우리나라까지 전파되었다.

 

재미있는 술 이야기였다. 문제는 나의 술이다. 나이 오십이 다 되도록 제대로 술 마시는 법을 몰랐다. 술은 마시면 취해야 하고, 취하면 토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힘들어도 견디며 마셨다. 돼지가 되도록 마신 술로 죽지 않은 것은 천운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술 마시는 법을 알게 되었다. 술을 거부하지 말되 마시는 방법은 나의 방식대로 마신다. 되도록 천천히 마신다. 한 잔을 두 세 번에 나눠 마시는 것이 가장 좋다. 따뜻한 자스민 차와 함께 마시는 spirit 들은 더욱 기분을 올려준다. 맛있는 안주들도 배를 기름지게 하여 오래도록 술을 마실 수 있게 해 준다. 일정양을 마셨으면 멈추고 다음 술자리를 기약해야 한다. 


이런 원칙들을 갖게 된 것이 불과 3년이 안되었다. 그만큼 어려운 술의 세계다. 그런데, 주로 집에서 술을 마시다 보니 그리미의 걱정이 크다. 결국 일주일에 2회, 회당 소주 한 병 정도만 마시기로 어렵게 타협했다. 아쉽기는 하지만 그 정도면 적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