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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아내가 읽어주는 책을 듣다_책에 미친 바보_150125, 일

어느 날 감기에 걸려 몸은 피로한데 책을 읽고 싶었으나 읽을 수가 없었다. 잠도 들기 힘들어 침대에 누워 아내에게 책을 읽어달라 했다. 마침 읽고 있던 책이 무척 감동적이었는지 한참을 읽어준다.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책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하는데, 이는 마치 농부가 오곡을 가꾸듯이 해야 한다. 또한 하나의 경서를 공부할 때마다 반드시 자기의 능력을 다하여 철저히 힘써야만 좋다. 공부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

 

첫째 경문을 충분히 외워야 하고, 둘째 여러 사람의 학설을 모두 참고하여 같은 점과 다른 점을 구별해서 장단점을 비교해야 하며, 셋째 깊게 생각해서 의심나는 것을 풀이하되 자신감을 갖지 말고, 넷째 사리에 밝게 분별해서 그릇된 것을 버리되 감히 스스로만 옳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56쪽)

 

이덕무는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라 했다. 책을 읽고 쓰면서 희노애락을 느끼는 바보같은 사람이라는 것인데, 번역자인 권정원씨는 이를 '책에 미친 바보'라고 했다. 무일은 그저 단순하게 '책 읽는 바보'라 한다. 이덕무는 정조 시대를 살았던 인물로 나이 사십이 되어 죽을 때까지 15년 정도 벼슬 생활을 하면서 아름다운 조선을 만들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의 독서는 경서, 제자백가, 역사와 문물 제도, 음운학, 문자학, 역대 문집, 의서와 농서까지 다양해서 박학다식했다.  이 책을 들고 오키나와로 갔다. 그곳에서 한가하게 길을 걷다가 조용한 찻집에 앉아 책을 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무쪽도 읽지 못하여 다시 돌아와 읽게 되었다.

 

옛날 사람들이 왜 모든 일을 농사짓는 농업과 농부에 빗대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95%의 사람들이 농업에 종사했기 때문이다. 노동은 곧 농업이었고, 농업이 모든 생명과 부와 학문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농업과 농부를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농업과 농부들이 많은 현자들에 의해 존중받는 것은 노동을 신성시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는 농업의 비중은 적어졌고 다양한 산업과 여러 형태의 노동들이 존재한다. 그 모든 노동이 귀하게 여겨져야 한다. 돈과 권력과 지위에 의해 호불호가 갈리지 말아야 하며, 모든 인간 노동이 귀하게 여겨져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오직 현자들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농원 생활을 하면서 마음에 맞는 벗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오랜 옛날에 친구들을 자주 볼 수 없었던 이유는, 오고 가는 길이 멀고 험할 뿐만 아니라, 변변히 대접하고 선물할 것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요즘은 언제든 연락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고, 이동 수단도 완벽하다. 그런데, 서로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으니 이야기를 맞추기가 어렵다.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자연습럽게 만날 수 있지만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만나기가 어렵다. 친구를 그리워하면서도 함께 하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잘 만나는 친구들은 식도락을 함께 하거나 등산이나 여행의 취미를 함께 하는 경우이다. 그렇지만 뭔가 아쉽다. 벗들과 더욱 자주 지극한 즐거움을 맛보고 싶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벗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 아내와 내 아들과 나 스스로를 벗으로 삼으면 된다. 그것도 아니되면 책과 자연이 모두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친구가 될 것이다. 간서치가 그렇게 답하고 있다.

 

"간절히 원하지만 다정한 벗을 오래 머물게 할 수 없는 마음은 (중략) 나비를 맞는 꽃과 같다. 나비가 오면 너무 늦게 온듯 (여기고, 중략) 조금 머무르면 소홀이 대하고, 그러다 날아가 버리면 다시 나비를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맞는 시절에 마음에 맞는 벗과 만나 마음에 맞는 말을 나누며 마음에 맞는 시문을 읽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어째서 이런 지극한 즐거움이 드문 것인가. 이러한 즐거움은 일생에 단지 몇 번 찾아올 뿐이다.

 

눈 오는 새벽이나 비 내리는 밤에 다정한 벗이 오지 않으면, 누구와 마주 앉아 이야기할 것인가. 시험 삼아 내 입으로 글을 읽으면 듣는 것은 내 귀요, 내 손으로 글을 쓰면 구경하는 것은 내 눈이라. 내가 나를 벗으로 삼았으니 이제 다시 무엇을 원망하랴. 모름지기 벗이 없다고 한탄하지 마라. 책과 함께 노닐면 되리라. 책이 없다면 구름과 노을이 내 벗이요." (120쪽)  

 

누구에게 읽히기 좋은 글을 쓰려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지식을 얻고, 감동을 받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그것 보다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글로써 호구지책을 마련하는 것이 꿈이기도 하다. 글감옥에서 목숨을 걸고 글을 쓰는 대가 조정래를 존경한다.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적이 있었느냐고 일갈하는 안도현도,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이라는 함민족의 시상도 부럽다. 그들이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만을 부러워 하고,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 내기 위해 그들이 쏟은 피와 땀을 몰라서는 안될 것이다. 열심히 읽고 쓰다 보면 언젠가는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이고, 홀로 만족한다고 하더라도 부끄러운 세월은 아닐 것이다. 어느 날 재가 되어 사라질 수도 있고, 흔적 조차 남기지 않는 무형의 에너지가 되어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글들일 것이다.

 

"옛날 왕희지의 필법을 배워 초서를 잘 쓰는 사람이 있었다 하네. 그는 아침을 굶은 채 편지를 써서 친구에게 쌀을 구걸하였네. 그런데 친구는 저녁이 다 되도록 그 편지가 어떤 내용인지를 이해하지 못해 쌀을 주지 못했고, 결국 그는 밥을 짓지 못했다네.

 

(중략) 문장이란 예술이기는 하지만 변화의 신기함은 끝이 없다네. 굳세면서도 막히지 않고, 통달한 듯하면서도 넘치지 않으며, 간략하면서도 뼈가 드러나지 않고, 상세하면서도 군더더기가 없어야 한다" (130쪽~131쪽)

 

글을 읽으며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져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배고픔을 느껴서 그 책을 팔아 허기를 메우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술 한 잔 맛있게 걸치며 친구와 함께 즐기는 것도 커다란 행복이었을 것이다. 없는 살림에도 그렇게 할 수 있었으니 부유하고 가난한 것이 인생을 즐기는데 있어서 큰 문제는 아니다. 다만 가난하면서 글 읽는 재미와 공부하는 재미를 알기 어렵고, 부유하면서도 절제하고 공부하는 즐거움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좋은 친구나 사랑스러운 가족과 함께 공부하고 음악하고 여행하며 사는 삶 위에 더한 즐거움은 없을 것이다. 그 위에 권력을 잡아서 만민을 위해 좋은 정치를 베풀 수 있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나 그 모든 것들을 다 받을 수도 없고 다 누릴 수도 없다. 누릴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오늘 하루도 포근한 겨울을 즐긴다.

 

"내 집에서 가장 좋은 물건은 단지 '맹자' 일곱 편뿐인데, 오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끝내 돈 2백 전에 팔아버렸다오. 그 돈으로 밥을 잔뜩 해먹고 희희낙락하며 영재(유득공)에게 달려가 크게 자랑을 했다오. 그런데 영재도 굶주린 지 이미 오래 되었던 터라, 내 말을 듣고는 즉시 '좌씨전'을 팔아서 남은 돈으로 내개 술을 사주었다오. 이는 맹자가 직접 내게 밥을 지어 먹여주고, 좌구명이 손수 내게 술을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그래서 맹씨와 좌씨를 한없이 칭송했다오." (155쪽)

 

귀는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들어야 할 것을 들어야 하고, 눈은 보는 것이 아니라 보아야 할 것을 보아야 한다. 사지가 아무 때나 움직이게 되면 파킨슨씨병에 걸린 것이다. 춤추듯 걸으니 제대로 된 걸음이라 할 수 없으며 사지가 움직여야 할 때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보이는 증상이다. 말하지 말아야 할 때 말하면, 설화를 입어서 나에게 큰 해가 된다. 그러니 보고 듣는 것도 당연히 보고 들어야 할 것을 골라 들어야 할 것이다. 그 차이를 분명하게 느껴야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차이를 알아도 실행되지 않는 것은 나의 부족함이어서 어쩔 수 없이 안타깝다.

 

"귀는 당연히 들어야 할 것을 듣고, 눈은 당연히 보아야 할 것을 보며, 입은 당연히 말해야 할 것을 말하고, 코는 당연히 냄새 맡아야 할 것을 맡고, 사지와 뼈대는 모두 당연히 움직이고 멈추어야 할 때 움직이고 멈추어야 한다." (193쪽)

 

먼저 말하고 실천하려고 애쓴 적이 있다. 책을 읽고 토론을 하다 보면 깨달음을 이야기 하게 되고, 알아서 얻은 것을 행동으로 이어가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 쉽지 않은 하루하루였다. 삶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언제나 말이 앞서게 되었고, 그 말대로 실천하려고 하니 두렵고 어려워서 정말 힘들었다. 미숙한 젊은 날에는 공부에 집중했어야 했는데, 세상 살이에 먼저 매몰되었으니 굳세지지 않은 근육으로 세상을 만나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누구도 생각하고 말한대로 실천하기 어렵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도 아쉬운 일이다. 깨닫고 생각하여 실천할 수 있는 것을 말하고, 그 말한 것을 신중하게 행동으로 옮겨 간다면 좀 더 편안한 인생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일이 많아지는 것은 말이 많은 데서 시작되고, 말이 많은 것은 마음을 단속하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렇다고 입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할까? 그렇지 않다. 말을 하고 그 행실을 돌아본다면 그 말을 헛되이 하지 않을 것이고, 행동할 때 말한 대로 실천하고자 한다면 그 행실을 헛되이 하지 않을 것이다." (197쪽)

 

공부하는 즐거움은 크다. 그 즐거움이란 것이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고,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 즉 도를 알아가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道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삶에서 자연스럽게 발견되는 것이다. 노예를 부리는 것이 자유민의 일상일 때 사람들은 노예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 노동자의 삶보다 풍요롭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권력자들은 노동자의 삶이 얼마나 고귀하고 힘든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모두가 처해진 상황에서만 자신의 삶과 진리를 이해하게 되니 진정한 도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낮은 데로 임해서 쓸고 닦고 노동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만이 道에 이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권력에 도달하고 정치를 해야 한다. 하루 십 수 시간을 공부에 매달린 것만으로 정책을 내놓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인데, 그것을 깨닫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하루 십 수 시간 동안 노동만 한 사람도 또한 자격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노동하고 공부한 사람만이 진짜 정책을 집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도(道)란 일상생활 가운데 지극히 얕고 가까운 것에 있다. 집안에 물을 뿌리고 깨끗이 쓸며 말을 따라 대답하는 것만큼 얕은 것이 없고, 부모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일보다 가까운 것은 없다.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는 거의 대부분 이것을 무시하고 높고 큰 것을 엿보며 먼저 하늘의 원리를 말하고 역의 법칙을 논하려고 한다. 단계를 뛰어넘고 차례를 따르지 않음이 이와 같다. 사람의 일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늘의 법칙을 알 수 있으며, 인간의 이치를 모르면서 어찌 역의 법칙을 알 수 있겠는가." (198쪽)

 

업신여기거나 무시하는 것이 있고 없음을 올바름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공부하고, 항상 나아지고 있다고 공부하며, 모두들 열심히 공부한다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공부할 일이다. 공부는 인간의 행복이자 의무이다.

 

"사람의 허물은 항상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데서 심해지고, 사람의 재앙은 항상 남을 업신여기는 데서 생겨난다.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면 남을 업신여기게 되고, 남을 업신여기게 되면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게 된다." (199쪽)

 

세월만이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몸에 쌓이는 세월의 독도 빼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좋은 글이다. 치매가 오기 전까지는 모든 정신이 올바르게 작동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들들과 약속하기를 65세가 넘어서면 아들들과 의논하고, 서로 의견이 모아지지 않을 때는 아들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었다. 그 결정은 노인의 아집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정신의 노쇄함을 고려하면 너무도 당연하고 현명한 결정이었다. 내가 그 나이가 되어 말대로 실천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 오면서 세상은 많이 변했다. 앞세대가 지금 세대를 따라 잡기가 버거워 진 것이다. 그러면 21세기의 중반을 넘어서면 어떤 벽이 우리 앞에 존재할까. 궁금하다.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이 오기 전까지 부지런하게 균형있게 읽고 생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아까운 것은 세월이며 정신이다. (중략, 세월은 지나가면 다시 돌릴 수 없고) 정신은 한계가 있다.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정신을 모조리 소모해버리면, 다시는 수습할 수 없다." (200쪽)

 

 스무 살을 전후해서 써 놓은 이덕무의 글에 무릎을 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과학기술과 의술을 제대로 논하지 못한 조상들이기는 하지만 사람됨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빨리 배우고 철이 들었던 모양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좀 더 빨리 조상들의 글을 배울 수 있었더라면 세상은 더 밝고 현명하게 발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 뒤에 첨부된 한문 원본을 읽지 않았으니 다 읽은 것도 아니구나.

 

 

- 책에 미친 바보 / 이덕무 지음 / 권정원 옮김 / 모우 김영진 그림 / 미다스북스_20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