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한이다. 음력절기로는 여전히 동짓달이니 갑오년이 끝난 것은 아닐 것이다. 갑오농민전쟁의 한이 서린 소한 추위인 모양이다. 머리를 감고 따뜻한 햇살에 말려낼까 싶어 현관문을 나섰다가 차가운 바람에 온 몸이 오그라들어 버린다. 바람을 피해 벽에 붙어섰다가 사나이 대장부가 이래서는 안될 것 같이 호기를 부리며 머리를 몇 번 털어 말리다가 대충 물기가 가신 듯하여 서둘러 들어왔다. 춥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류큐인들의 땅을 여행해야 하는 시간이 두 주도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여행 계획은 완성하지 못했다. 그냥 서늘한 가을 날씨를 즐기며 제주 올레를 하듯 바닷가와 사람사는 곳을 걷다 오면 되지 않을까 싶다. 돌고래 쇼를 보고, 평화기념관을 보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러다가 수천께서 밤을 낮 삼아 읽으셨다는 두 권 짜리 소설책을 책상 위에서 발견했다. '뿌리깊은 나무 / 이정명 장편소설'. 오래 전에 읽었어야 하는 소설인데,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읽지 못했다. 요즘 유난히 머리가 긴장되는 책들만을 읽다 보니 부드러운 책을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많은데, 번개처럼 흐르니 마음만 바쁘다.
우물에 빠진 집현전 학사의 시신이 발견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재미있는 추리소설이다. 새로운 사실도 발견했다. 우물의 과학.
"젊은이는 죽었지만 우물은 살아 있었다. 더러운 물은 공돌 사이로 흘러들고 새 물이 솟아 물갈이가 되지. (중략 / 공돌에 대한 주) 공돌은 늘 젖어 있는 우물 주위의 흙의 토압을 견딜 수 있게 쌓아올린 납작한 돌이다. 솟아난 물은 우물 벽을 따라 움직이고 일부는 돌 사이로 스며든다. 고여 있는 우물물이 썩지 않는 것은 바로 이 공돌 때문이다." (1권 22쪽)
소설에는 정리된 문구들이 많아서 좋다. 이야기의 재미와 깊은 의미를 지닌 촌철살인의 경구들. 여기에서 말하는 사대부는, 학문을 탐구하는 선비(士)와 정치를 담당하는 정치가(大夫)의 합성어로, 학문을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 그 지식을 바탕으로 정치 행위를 함으로써 인의와 정도를 실천할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공부하지 않는 사람이나 공부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 공부한 사람은 누구나 정치를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한 사대부 조차 현실을 무시하고, 사욕을 추구한다면 정치를 할 자격이 없다. 정치의 길은 깊고도 넓으며 이타적이어야 한다. 정치가는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해야 한다. 정치가가 정치 후원금을 받으며 당당한 이유는 없다. 임금도 받아야 하고, 정치 활동을 위한 지원금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공적인 정치행위를 할 수 있겠는가.
"무엇이 지식이며 무엇이 잡설인가? 說로써 설을 돋우고, 論으로써 논을 지탱하는 것, 한 줄의 문구가 낳은 각주와 해석의 미로를 헤매며 또 다른 미로를 만드는 것, 한 자의 글에 사로잡혀 죽은 관념의 무덤을 헤치는 것, 그것이 곧 식자라 하는 사대부의 경학이었다." (1권 34쪽)
학문을 사랑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소수의 사람들에게 그것이 독점되어서는 안되고 모든 사람들이 학문하기를 즐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문을 증진하는 정책이 펼쳐져야 한다. 조선 초기에는 그것이 사대부들에게만 적용되는 일이었겠지만, 시민의 시대에는 모든 시민에게 적용되는 일이어야 한다. 곳곳에 세워진 도서관과 인문학 강좌, 학교와 평생학습원 등등. 시민들에게 열려진 공간은 많다. 시간을 내어야 한다.
"사대부의 호사취미 모인인 시계(詩契)였다. 주상(세종)의 등극 후 문물이 일어나고 학풍을 진작하니 팔도의 선비들 사이에 시계 바람이 불었다. (중략 / 시계에 대한 주) 선비들이 날을 정해 풍치 좋은 곳에서 음식과 술을 먹으며 시를 즐기는 모임. 모인 사람들은 돌아가며 시를 짓는데, 정자 옆 나뭇가지에 드리운 끈 중간에 불을 붙인 향을 꽂고 끝에는 엽전을 달아 그 밑에 놋대야를 받쳤다. 시를 다 짓지 못한 상태에서 불똥이 끈을 태워 엽전이 떨어져 쨍그랑하는 소리가 나면 벌주를 들이켜야 했다." (1권 50쪽)
조선에 의한 고려 역사의 왜곡.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와 미래를 풍요롭고 건강하게 만들 정책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다. 그것을 극적으로 하기 위해서 역사에 대한 왜곡이 불가피한 조치라고 하는데, 받아 들이기 어렵다. 왜곡은 또다른 거짓을 낳고, 진실을 가려 진실되고 건전한 정책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정책이 혼탁하니 4대강 사업이나 해외자원개발사업에 대해 논란만 분분하지 참고가 되지를 못하는 것이다.
"문제된 구절은 고려 태조를 기술할 때 '짐'이라는 호칭을 쓴 것이다. '짐'이란 황제가 스스로를 높여 부르는 호칭이니 천자가 아닌 각국 제후들은 왕이라 불러야 옳다. '하교'라 해야 할 왕의 명을 '칙'이라 한 것, '세자'라 해야 할 왕자를 '태자'라 한 것도 마찬가지다." (1권 59쪽)
음악에 대한 고전의 평가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여기에서 언급된다. 음악은 천지의 조화. 음악과 함께 산다는 것은 천지의 조화로움을 마음으로 느끼고 받아들여 사람의 도리를 지키며 산다는 것. 음악을 한다는 것은 헛된 즐거움에 빠지지 않고 진정한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것.
"예악이 무엇이냐? 예기에 이르기를 '예는 천지의 질서이며 악은 천지의 조화다. 고로 예악을 제정함은 입과 귀와 눈의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도가 바르게 돌아가게 함이라' 했다. 그러니 예는 인간의 머리에 깃들고 악은 마음에 깃들어 늘 함께 있는 것이지." (1권 123쪽)
이야기 중간에 마방진 문제가 나오기에 정신을 집중하고 풀어 보았다. 치매 예방에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어렸을 때도 수수께끼로 많이 풀었던 문제다. 처음에는 가운데 무슨 수를 놓으면 될까를 가지고 고민을 했다. 5도 넣어보고 1, 2도 넣어보고 미궁에 빠지듯 경우의 수가 많이 나와서 풀기가 쉽지 않았다. 두번째로 어떤 원칙을 세워 보기로 했다. 제일 높은 수인 7, 8, 9는 서로 더해 지지 않는 위치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도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어쨌든 세수의 합이 최대 24는 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것도 별로였다. 1로 만들 수 있는 세 수의 최대 합은 18이니, 세수의 합은 결국 최대 18을 넘어서는 안된다. 마방진의 특성상 동일한 수를 사용해 최소한 두 가지 다른 조합으로 동일한 합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이 생각이 도움이 되었다.
1로 만들 수 있는 최대수는 18인데, 단 한가지 경우(1 8 9) 외에는 없으므로 18은 안된다. 그러면 1로 만들 수 있는 수 중에서 다음으로 큰 것은 17. 두 가지를 만들 수 있다. 1 9 7과 1 8 8. 그런데, 1을 제외한 나머지 두 수는 서로 달라야 한다. 그러므로 17도 아니다.
그러면 16. 1 9 6과 1 8 7이다. 그러면 16은 일단 가능하다. 그러면 그 다음으로 작은 수인 2로 16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2 9 5와 2 8 6이다. 그런데, 1과 2가 모두 8과 9를 필요로 하는 마방진은 그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16도 불가하다. 그러면 15. 이곳에서 문제가 풀렸다. 소설에서 이 방진의 해답은 단 한가지만 존재한다고 했으므로 더 이상 풀 필요는 없었다.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단순한 문제를 풀었는데도 기쁘다. 도끼자루가 썩어가도 인간은 즐거운 일에 집중한다.
정치는 과연 무엇일까. 시민들로부터 위임받아 사회 전체의 운영 원리를 만들고 실천해 가는 것이다. 그런 역할을 통해 일하지 않고도 시민들로부터 급여를 받을 수 있는 행위가 바로 정치다. 그런 정치는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악한 자의 뛰어난 재주를 골라 쓰는 것이 선한 자의 무능을 모른 척하는 것보다 나음이었다." (1권 229쪽)
그렇지만 이런 생각은 해야 한다. 그들은 시민도 국민도 아니고 그들 자신일 뿐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꾸지 않은 땅은 자신의 영토가 아니고 보살피지 않은 백성은 자신의 백성이 아니다." (1권 231쪽)
애국가 중 가장 좋아하는 부분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맑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 단심일세'다. 추운 겨울이 극성을 부리니 봄도 멀지 않았고, 그러면 힘든 농사일을 하는 시기를 거쳐 가을이 올 것이다. 넓고 높은 가을 하늘이 노동의 고통을 위로하고 추운 겨울이지만 몸을 쉬게 할 것이다. 아, 지금이 겨울이구나. 가장 편안한 휴식의 계절이다. 그런데, 이런 휴식의 계절마저도 일을 하려는 농부들은 유리 온실이다 하우스다 태양광이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다. 그것은 현대만의 일이 아니었다.
"화단 아래에는 구들이 깔려 있다. 온돌 위헤 세 뼘 높이의 배양토를 깔고 아침저녁으로 두 시간씩 불을 때면 공기와 흙이 따뜻해져 뿌리가 자란다. (중략) 기와를 대신하여 기름 먹인 한지를 지붕에 올리면 채광은 물론 습도까지 조절할 수 있다. 들기름을 먹인 한지는 팽팽하게 얇아지면서 반투명해져 빛이 쉽게 든다. (중략) 산가요록(山家要錄) : 궁궐 의관 전순의가 찬술한 농서. 중국 농기술을 조선의 토질과 기후에 맞도록 고치고 온돌기술을 이용한 온실 건축과 작물 재배법을 기술했다. (중략) 이 채소와 꽃들은 전하의 수라상과 편전 장식에 쓰이겠지요? (중략) 오로지 이용후생의 구실로 궁궐 안에 온실 짓기를 허락하신 것이다. (중략) 추운 계절에 소채를 재배하고 양식을 건사한다면 보릿고개에 죽어 나가는 백성을 구할 것이 아니냐?" (1권 263~4쪽)
마방진을 푸는 방식이야 어찌되었든 더 큰 비밀과 재미가 숨어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역시 수학의 세계는 아름답다.
2권은 극적인 재미를 주는 추리가 일어나는 과정이 서술되었다.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소설 동의보감을 읽을 때의 느낌이다.
명나라가 성립하고 중화체계가 공고하게 만들어졌다. 명의 주원장은 자신을 따르는 군사에게는 한없이 자애롭고 포용력이 큰 왕이었지만 그의 외부에 대해서는 변덕스럽고 폭압적이었다. 원명 교체기에 고려에서 조선이 개국되었고, 새로운 국가의 틀을 만들기 위한 연구작업은 세종 시대에 열렬했다. 그 결과의 집대성이 한글의 창제라 할 것이다.
"訓民正音. '백성을 가치르는 바른 소리란 뜻이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 만했다. 어찌하여 이 귀한 서책의 이름이 조선 문자나 조선어가 아닌지를.... 그것은 조선력이 칠정산이 되고 조선의 향악이 아악이 됨과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만일 조선이 새 문자를 가진다면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명나라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중략) 음양 오행의 이치와 건곤의 섭리, 천 지 인 삼재와 천원지방의 원리, 그 모든 조화를 스물여덟자의 글자는 완벽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2권 144~6쪽)
한 나라가 그 나라의 말에 적합한 문자를 갖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우리의 말을 로마자로 한 번 적어볼까. Ileoke jukuh bomyun doeji anelgga(이렇게 적어보면 되지 않을까). 음, 쉽지 않겠다. 우리나라의 문맹율이 매우 낮다는 것은 높은 교육열과 경제력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배우기 쉬운 글자를 가지고 있다는데 있다. 영어도 한글로 표현하면 어떨까. 와츠 유어 네임(What's your name). 간단하고 좋네. 한글의 위력이 대단하다. 영어는 그렇다 치고, 한글이 훌륭하다고 해서 한자를 내팽개치는 것은 좋지 않은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한자의 아름다움과 의미의 깊음 때문이다. 배우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한자를 통해 학력을 평가하려 하지 말고, 우리와 동양의 오랜 문서 유산을 해독하고 읽을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이 한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로마문명에 비해 훨씬 공부하기 좋은 상황이므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우리글이 가지는 과학성에 대한 설명을 전부 읽기는 했지만 정말 그런지는 알 수가 없다. 혀와 입술과 목구멍의 모양만으로 소리를 그대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그 느 므 스 아. 혀의 모양과 입의 모양을 열심히 따라해 본 것으로 만족한다. 죽기 전에 한글의 제자 원리를 알 수 있으리라. 편안하게 즐겁게 읽었다.
벌써 토요일 밤이다. 여행 계획은 언제 짜지. 지난 여행에서 깨진 여행 가방은 무려 한 달의 고민 끝에 오늘 구매하였다. 여행자 보험은 아직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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