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이야기/서재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_박원순_150110, 토

오래 전에 사두었다가 제대로 읽지 않은 책이다. 최근 들어서 판례에 대한 책을 읽고 싶어졌다. 제대로 된 검사는 눈에 띄지 않는다. 아니 조금 눈에 띈 적이 있었다. 이태리 정계의 부정부패를 수사했던 깨끗한 손을 가진 검사들의 이야기가 한창 화제가 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시민들이 중수부 검사들이 애쓴다고 보약을 달여 선물한 때가 있었다. 좋은 일이었지만 정말로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는지는 되새겨 볼 일이다. 검찰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수사였지 공익을 위한 수사였는지는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어쨌든 사욕에 눈 먼 검사들이나 뉴스거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판사는 다르다. 재판도 훌륭한 재판은 제법 자주 눈에 띈다. 나이 들어가니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고 듣고 싶다. 오늘 박지만이가 김기춘으로부터 '근신하라'는 경고를 받았다는 소리에 발끈하여 그런 소리는 듣지도 못했고, 청와대 문건을 요구한 적도 없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런 뉴스는 듣기도 알기도 싫지만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놓아야 할 일이니 기록해 둔다. 대통령 비서실장 김기춘은 서영교 의원의 질의에 답변하면서 그렇게 말했고, 보도를 접한 박지만이 격노를 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가신이거나 누나의 내시인 주제에 감히 주인이며 황태자인 자신에게 근신하라고 경고를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저승길이 가까운 노구의 김기춘으로서는 망신스러운 일이고, 누구에게도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고 부모와 누나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가당치 않은 호기다.

 

박원순 시장이 참여연대 변호사 시절에 강연한 내용을 책으로 정리하여 출판한 모양이다. 주워들은 풍월로 아는 이야기들이지만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으니 읽어볼만한 재판 기록들이다. 예수의 재판까지 들어 있다. 제일 먼저 무엇을 읽을까 하다가 토머스 모어에 대한 이야기를 읽기로 했다. 출세를 보장받았던 귀족 출신이 아니었는데도, 출중한 능력으로 당시 가장 잘 나가던 영국의 지식인이자 정치가가 되었던 그가, 어떻게 해서 처형된 것일까.

 

"모어는 스물일곱 살 때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는 헨리 7세의 가혹한 세금 부과안에 맞서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결국 의원직을 사퇴하고 말았다. (중략) 1509년 헨리8세가 즉위하면서  모어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에 큰 기대를 걸었다. 모어는 헨리 8세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였다. 그는 사리에 얽매이지 않는 공평무사한 행정을 펼침으로써 '곤경에 처한 모든 사람의 보호자'로 민중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고, 플랑드르와의 통상조약 체결,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 및 한자동맹과의 협상 등을 통해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529년, 수상 직책을 겸하던 대법관 임명은 그가 인생의 절정기에 들어섰음을 말해주었다. (중략 / 런던탑에 갇힌 모어가 아내 엘리스에게) 내 집보다는 여기가 천국에 더 가깝지 않소? (중략) 모어는 한창 잘 나가던 당시 런던에서 멀지 않은 템스 강변에 저택을 지어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그 안에는 도서실, 미술관, 성당, 정원, 심지어 과수원까지 갖추고 있었다. 먼 나라에서 들어왔거나 보기 드문 귀한 물건이 있으면 사들였으며, 남이 자신의 소장품들을 완상해 주는 것을 큰 낙으로 삼았다. (중략) 총명함과 지혜를 천하가 칭송하던 토머스 모어. 그가 단지 왕의 이혼과 결혼 문제 때문에 그 '모든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눈앞에 두었다면 누가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111~3쪽)

 

능력 있는 왕이었으면서도 결국 왕이라는 절대권력에 먹혀버린 헨리8세는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신과 인간을 모두 버린다. 모어는 헨리 8세의 치세 기간동안 영국 시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아름다운 시절을 보냈다. 그 기간이 무려 32년이나 된다. 아마도 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긴 청렴하고 공정한 공무수행 기간이 아니었을까. 공직자로서의 막바지에 기소된 55세의 모어는 재판을 받으며 열띤 논쟁을 벌인다. 침묵은 과연 범죄인가, 양심과 철학은 범죄가 될 수 있는가.

 

"모어는 '반역은 말이나 행동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 침묵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여러분의 법이든 세상 어느 법이든간에 나의 침묵을 처벌할 수는 없다.'고 반박하였다. 사실상 그는 헨리의 이혼이나 결혼에 대해 지지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반대한다는 말을 내뱉은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다시 검찰관의 반박이 이어졌다. '바로 그 침묵이 법을 위반한 명확한 증거이자 법을 중상하는 시위이다. 그 법이 옳고 정의로우며 합법적이라고 말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은 자가 충성스럽고 진실된 신하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모어는 다시 '민사법의 격언에 따르면 침묵은 동의를 뜻한다고 되어 있으며 자신의 침묵은 비난이라기보다는 동의를 뜻하는 것으로 추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로마의 법학자 울피아누스 이후 '사람은 누구나 생각만으로는 처벌받지 아니한다'는 법이론이 이미 확립된 뒤였다. 모어는 침묵의 자유를 위해 항변하였다." (125~6쪽)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양심의 자유라는 근대 정신을 말한 토머스 모어가 남긴 전설 두 가지는 반드시 기억하고 싶다. 현자들의 죽음이 이렇게 멋있다고 해서 죽음을 찬양해서는 안된다.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더 이상 죽지 말고 조금씩 자유와 정의 그 자체를 향해서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간혹 뒤로 후퇴하더라도 좌절하지 말자. 비록 미래는 어둡고 무섭기까지 하지만 오늘의 하늘은 아름답다. 1535년 당시는 야만과 암흑의 시대였다. 추기경 울지는 헨리 8세의 환심을 사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비극의 씨앗인 앤 불린을 중매하였다. 고위 성직자가 이런 일이나 하던 시절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표현대로 치매 걸린 영혼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득하다. 그래도 그 시절보다 현재의 세상은 엄청나게 좋아졌다. 정의로운 교황이 오래도록 우리 곁에서 맑은 영혼의 목소리를 들려주었으면 한다.

 

"힘을 내게. 자네 일을 하는 데 두려워하지 말게.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그는 사형집행 전에 머리를 쑥 내밀며 자신의 수염이 잘려지지 않게 하였다는 것이다. '수염은 반역죄를 저지른 적이 없으니까'라는 말과 함께"

"이리하여 런던탑 감옥 옆에는 긴 수염이 달린 토머스 모어의 머리가 창에 꽂힌 채 몇 주 동안이나 걸려 있었다. 비가 그치지 않고 줄창 내려 사람들은 이 비가 신의 눈물이라고 수군거렸다." (1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