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삶속에서 학문의 근원을 찾는다.
가능할까?
먼지는 아무리 모아도 먼지에 불과하지만,
모래속에는 가끔 사금이 있기도 한다.
"평범한 삶이 보편학문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존중하려고 했다. (중략) 세속의 모습은 놀랄만큼 비슷하다." (머리말, 8쪽)
[ 앞글 ] 처세술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단어를 위하여
누구나 누릴수 있는 좋은 삶이 있다는 노명우의 자신감과, 세상과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다는 노명우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을 통해 "처세술"을, 살아가기 위한 얄팍한 잔재주에서, "좋은 삶으로 나아가는 수단이면서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기술"이란 느낌으로 바꿔보려는 모양이다. 좋은 시도로 보인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된다. 사람이든 말이든. 그리고, 어떤 단어의 의미가 풍부해지면 그것 또한 좋다.
이 책을 다읽고 나서 보니, 노명우는 어떤 단어들을 새롭게 뿌리내리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지난 1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홑사주의 individualism은 노명우의 노력까지 보태어져 우리 사회에 어느 정도 자리잡았다. 처세술과 군중과 공중, 상식과 양식 등등.
[ 1부 ] 세속이라는 리얼리티
(1) 상식의 배반, 양식의 딜레마
감옥에 갇힌 그람시는 지식인의 한계에 대해 생각한다. 시민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말투로 해야한다는 것이다. 유럽의 말투는 모르겠고, 우리나라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소통의 괴리현상의 원인중의 하나는, 한자어의 문제가 가장 클것이다. 한자를 배우지 않는 세대들이 30대 중반까지를 차지하고 있는데, 학술용어라는 것이 온통 한자어 - 일본어의 짬뽕이다. 그러다보니 영어로 이해하는 것이 더 빠르다. 그 대표가 바로 법률용어다.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이미,시민대중이 아주 쉽게 이해할수 있는 용어로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대륙법 정신을 일본을 거쳐 받아들인 우리나라의 법률용어는 왜 이렇게 한심한지 모르겠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바보같은 그들만의 용어다. 이 용어를 억지로 이해해야 하는 시민들이 많이 참아주는 셈이다. 의사들이 알수 없는 영어로 기록하는 것과 100% 일치하는 바보같은 행태다.
"많은 사람들의 상식이 양식을 집어삼킨 사회는 그람시를 감옥에 가두었다. (중략) 지식인과 진보주의는 상식을 대체할 양식을 훈계의 어투로 늘어놓는 능력만을 갖고 있을뿐이다. 말투의 차이로인한 설득력 때문에 올바른 내용일수록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지독한 역설이 벌어진다. (중략) 상식의 잘못을 지적하고 양식을 일깨우되, 그 말투에서 잘난척의 흔적은 완벽하게 사라진 너무나도 아름다운 문장이 만들어진다." (30~2쪽)
느낌은, 무한하게 축적된 호모 사피엔스의 생존본능이면서 지혜다.
앎과 이해는, 느낌을 충분히 설명하는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대중의 요소는 느낌인 반면 항상 앎이나 이해는 아니다. 이에 반해 지식인의 요소는 앎이지만, 항상 이해는 아니며, 특히 느낌은 더더욱 아니다. ... 지식인의 오류는, (중략) 느낌과 열정 없이도 알수 있다고 믿는데 있다." (중략) 참된 철학운동이란 몇몇 제한된 지식인 집단사이의 특수한 문화를 창조하는데 그치는가, 아니면 상식보다 우월하며 (중략) 사람들과의 관계를 잃지 않고 또 바로 그 관계속에서 자신이 탐구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의 원천을 발견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같은 관계를 잃지않을 때에야 비로소 철학은 (중략) 한 개인의 호기심을 넘어서는 삶이 되는 것이다." (30~1쪽)
"(그람시 1891~1937는) 꼽추라는 장애를 가진 사회주의자 (중략) 지성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 (중략) 이 사람의 두뇌를 20년동안 정지시켜야 한다고 판사가 말했다 (중략) 폭력이 아닌 동의에 기반을 둔 지배의 유형인 헤게모니라는 개념을 우리에게 남겼다." (267쪽)
(2) 럭셔리라는 마법의 수수께끼
자존감이 약하고 자기 주장이 없으면, 남을 따라하게 되어있다. 그렇지않고, 확고한 자기생각으로,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서 자기생각을 실현하는 것이라면, 달리 봐줘야 한다. 재산규모에 맞지않는 소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월세 살아도 차는 외제차를 타겠다는 비장한 자기 주장과 행동은 인정해줘야 한다. 생각없는 행동이 문제지, 선택이 분명한 것은 나쁘지 않다. 그래서 따라하기라고 규정해버리는 것은 불편하다. 겸손하지 못한 사회학자들의 오판이다.
"각 계급의 구성원들은 자신들보다 한단계 높은 계급에서 유행하는 생활양식을, 자신들이 추구해야할 생활양식으로 인정하고, 그러한 이상을 추구하는데 자신들의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37쪽)
세마와 시민권, 자본주의라는 사람의 발명품은 1776년에 동시에 출시되었으며, 그들로 인해 우리는 가혹한 노동과 굶주림과 병마와 무지에서 해방되었다. 류샤오치는 착취유공론, 덩샤오핑은 흑묘백묘론을 펼치며, 중국대륙을 장악한 중국공산당에게 자본주의를 이식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가 지금의 중국이다.
[ 1776년 ]
- 1월 10일 - 토머스 페인 <상식(Common Sense)> 정치 팜플렛 출간
- 2월 17일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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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 - 애덤 스미스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 출판
- 4월 27일 - 정조 즉위, 규장각이 건립
- 7월 4일 - 제2차 대륙회의에서 미국 독립선언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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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와트, 첫 상업용 증기기관 출시
(3) 맥도날드에 대한 명상
빅맥은 위기의 순간에 비상구처럼 한번 이용한다. 맥처럼, 요즘은 구글이나 카카오의 사용자 평점을 기준으로 의사결정을 한다. 아무곳이나 들어가서 가성비가 좋을 것을 기대하는 방식은 더이상 사용하기 어려워서 20% 미만이 되었다. 차림표에서 음식과 가격을 확인하고 식당을 떠나는 경우는 1%도 안되게 되었다.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리처는 햄버거 체인점의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한다. (중략) 햄버거속에는 베버가 합리의 핵심이라 지적했던 표준을 통한 효율 높이기와 예측가능이라는 모든 요소가 오이피클과 치즈처럼 들어있다. (중략) 맥도날드화는 "패스트푸드업뿐만아니라 교육 노동 의료 여행 여가 다이어트 정치 가정 등 사실상 사회의 거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주고있다. (중략) 어느 체인망이든 표준품질과 예측가능을 목표로 내세운다." (45~7쪽)
우리 모두가 자본가가 되었다. 어느 시대보다 지금이 부자다. 그러니 쇠감옥에 갇혀있다기 보다는 자본의 놀이터에서 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용당할지언정 소비의 자유가 있다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다.
"파리바께트와 뚜레쥬르가 나란히 영업을 하고있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하나하나의 합리가 모여 비합리를 연출하는 순간이다. 작은 합리선택이 쌓여 빚어낸 거대한 비합리속에서, 자본의 지배가 확대되면 우리는 자본의 울타리로부터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쇠감옥'에 갇힌 꼴이 된다." (51쪽)
(4) 선진국이라는 유령
"그곳에 다녀온 유일한 사람이라면, 그사람의 입은 그곳을 창조하는 신의 손가락에 견줄만하다. (중략) 우리는 가보지 않고도 (중략) 그판단을 믿는다. (중략 / 동방견물록의 내용들은 나중에 뻥으로 밝혀졌지만, 17살의 나이에 25년에 걸쳐 중국여행을 한) 마르코 폴로(1254~)의 안경을 쓴 콜럼부스는 1492년 항해를 떠났다. 그이후 아메리칸 인디언 학살과 아프리카 노예무역이 뒤를 이었(다. / 중략 / 일본인 선생의 안내와 지침서에 따른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단지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중국에서 서양문명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나라이름 | 1인당 GDP(2023년) | 인구수(2023년) | GDP(십억$, %) (2024년) |
룩셈부르크 | 122,558 | 7십만명 | 94(0.09) |
노르웨이 | 106,180 | 5백만명 | 568(0.52) |
아일랜드 | 104,237 | 5백만명 | 630(0.57) |
스위스 | 91,976 | 9백만명 | 978(0.89) |
미국 | 76,360 | 340백만명 | 27,967(25.49) |
일본 | 33,911 | 123백만명 | 4,286(3.91) |
한국 | 32,142 | 52백만명 | 1,785(1.63) |
늘 안타까운 것이, 일하는 것말고는 할줄아는 것이 없는 시민들의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 평생교육이 등장한 것이 25년 정도 되었다. 평생교육의 등장과 노동시간의 축소가 세상을 점점 바꾸고 있다. 노동시간에 대한 윤정부의 반동정책이 성공을 거두고 있지 못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어쨌든 일하는 시간은 줄여야 한다. 삶은 그리 길지않다.
"노동시간이 줄어들지 않는이상, 이 사회는 잠시라도 혜초가 되는 꿈을 허락하지 않는다." (60쪽)
(5) 열광이라는 열병
개념의 분리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군중과 공중을 꼭 구분하여야 하는가? 군중의 단계와 공중의 단계가 따로 있는가?
"열광이라는 열병은 10대 청소년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차라리 통과의례같은 10대 청소년들의 대중문화 열광은, 시간이 지나면 추억으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추억은커녕 악몽이 되는군중은, 정치에 열광하는 성인들의 떼이다. 스타에 열광하는 청소년들은 세상이 말세라는 느낌을 주지만, 그 느낌은 그저 기우에 불과하다. 하지만 정치에 열광하는 성인들이 군중을 형성하면 불길한 느낌은 기우에 그치지 않는다. 군중은 때로 악몽을 사실로 만들기도 한다." (63쪽)
"꽃이 피는 순간이 다가온다. 하지만 사람의 떼가 군중이어야만 이득을 얻는 패밀리는 공중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공중은 자신들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세력이지만, 군중은 자신들의 악행을 숨길수 있는 가장 좋은 희생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중에서 공중이라는 꽃이 피는 순간을 기다리지 않고, 군중을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리는 사람이 있다면 의심해야 한다. 그는 '마피아 집단의 비밀 멤버이거나, 뼛속까지 엘리트주의자이다." (70쪽)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는 제2제정기(1852~1870) 파리의 풍경을 스케치하며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었던 영국 신문 특파원 콩스탕탱 기 Constantin Guys, 1802~1892에 대한 비평문으로 보들레르가 1863년에 발표한 글이다. 미술 평론 모음집인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는 두껍지 않은 분량의 책이지만, 그 책에 담긴 가치는 미술비평이라는 영역을 벗어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보들레르는 콩스탕탱 기의 모습에서 그가 도시의 관찰자 모델로 여겼던 플라뇌르Flâneur, 즉 산책하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다. 산책하는 사람은, 한편으로 에드거 앨런 포에서 물려받은, 도시 속에 숨겨진 비밀을 탐구하는 탐정의 모습이며, 동시에 혐오의 감정을 품고 있으면서도 군중을 떠나지 못하고 그들을 관찰하는, 보들레르가 '잠행하는 왕자'라고 표현했던 위치를 지닌 관찰자이다.
"새에게 공기가 그리고 물고기에게는 물이 그렇듯이 군중은 그의 영역이다. 그의 정열, 그리고 그의 작업은 대중과 한몸이 되는 것이다. 완벽한 산책자, 정열의 관찰자에게 있어서 숫자와 물결치는 것, 움직임, 그리고 사라지는것과 무한 속에 자신이 거주할 집을 세우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다. 자신의 집 밖에 있으면서 어디서든지 자신의 집처럼 느끼는 것, 세계를 바라보고 세계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세계로부터 숨어 있는 것, 이런 것들이 언어가 어색하게 정의할 수밖에 없는, 정열이 가득하고 공정하고 독립된 정신의 소유자들이 느끼는 몇가지 쾌락들이다. 관찰자는 도처에서 자신의 익명을 즐기는 왕자이다." 보들레르는 군중을 몰래 관찰하는 '잠행하는 왕자'가 되고 싶어 했다." (273쪽)
"가브리엘 타르드(Gabriel Tarde, 1843~1904)와 여론과 군중(지도리, 2012)
타르드는 르봉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회학자이다. 하지만 군중에 대한 태도에서 타르드는 르봉과는 매우 달랐다. 동시대를 살았기에 군중에 관해 논의할 때 르봉과 타르드가 염두에 둔 군중은 유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르봉이 우려와 공포 그리고 비하가 범벅이 된 시선으로 군중을 본다면, 타르드는 군중속에서 '공중'을 발견함으로써 르봉의 시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군중은 물리의 의미로 파악한 인간 집단이다. 사람들이 매우 짙은 농도로 결집되었을 때, 군중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반면 타르드는 물리결합집단이 아니라 정신결합집단을 발견했고, 그들을 군중이 아니라 공중이라 불렀다. 타르드의 시대는 부르주아 시대를 대표하는 미디어인 신문이 제대로 창간되고 보급되던 시기이다. 신문은 지역과 거리의 한계를 뛰어넘어, 의견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결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물리결합집단인 군중이 등장하기 위해서 물리결합을 수용할 수 있는 물리광장이 필요했다면, 신문은 의견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결합시킬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의견을 중심으로 결합되는 사람의 집단은 물리광장을 반드시 요구하지는 않는다. 신문이라는 미디어가 물리결합집단인 군중이 등장하는 물리광장을 대체하는 터전이 될수있는 것이다. 타르드가 주목한 공중은 이렇게 탄생했다. 타르드가 주목한 공중은 가스통을 들고 광장에 집결한 '어버이연합'과는 달리, 우리 시대에는 SNS라는 가상의 광장을 사용하고 있다." (274쪽)
"군중은 서로를 동일하게 만든다. “군중을구성하는 개인들 각각의 생활 방식, 직업, 성격 혹은 지적 수준과는상관없이 단지 그들이 군중에 속하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집합체 공동의 영혼을 지니게 되며, 이로 인해 그들은 개인으로 머물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군중은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한다. 군중은 변덕스럽다. 군중은 쉽게 열광하고 쉽게 화낸다. 군중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이미지만으로 쉽게 호감을 느끼고, 그 호감은 쉽게 숭배로 변한다." (64~5쪽)
(6) 여론의 흥망성쇠
언론(권력)은 이미 많이 바뀌고 있다. 유튜브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고 할것이다. 뉴스든 드라마든, 유튜브로 보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다. 언론인들은 스스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유튜브와 SNS와의 차별점이 무엇이고, 기존 언론의 기능과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다시 보여주어야 한다. 변화를 통해서.
"언론권력은 공론장을 이렇게 살해하고 있다.
"뉴스를 '여과하는 장치들을 큰 항목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규모, 집중된 소유권, 소유자의 부, 거대 언론기업의 수익 지향성 (2) 언론의 주요 수입원인 광고 (3) 정부, 기업, 그리고 이들 일차정보원이자 권력의 대리인들로부터 자금과 인정을 받는 '전문가'가 제공하는 정보에 대한 언론의 의존 (4) 언론을 훈육하는 역할을 하는 '강력한 비난' (5) 국가종교이자 통제 메커니즘으로서의 '반공주의'. 이 요소들은 상호작용을 하면서 서로를 보강한다."
하버마스와 촘스키 그리고 허먼의 전망에 비관색채를 부여하는 것은 미디어이다. 1960년대 공론장의 쇠퇴라는 결론을 내리도록 한 미디어는 텔레비전이다. 촘스키와 허먼은 이미 올드미디어가 되어버린 뉴스와 텔레비전을 장악한 언론권력의 한계를 지적한다. 신문의 타락을 언급하기에는, 애초부터 신문은 교육받은 부르주아 성인남성이 지배하는 공론장이었다. 텔레비전에 의한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지적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텔레비전은 오피니언 리더가 자아도취의 연설을 중계하는 미디어이지, 애초부터 여론을 위한 미디어가 아니었다. 텔레비전은 수신기이지 발신기가 아니다.
언론권력은 공론장을 타락시키지만 전능하지는 않다. 언론권력은 신문과 텔레비전이 매개하는 공론장의 파괴에만 능하다. 공론장은 언론권력이 그것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생성된다. 하버마스가 쓰지 않은 책은 뉴미디어에 관한 것이다." (78쪽)
(7) 역사라는 이름의 공허한 기억
"(역사의)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중략)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중략)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진보라는 대의를 강조하는 사람은 '역사를 위하여'라는 거룩한 논리를 내세우며 희생당한 사람들의 고통에 눈을 감거나 심지어 '역사의 진보를 위하여 희생을 강요'하기도 한다. 하지만 새로운 천사에 감정이입하는 벤야민은, 지상에서 벌어지는 파국을 외면하지 않는다. (중략) 진보라는 구실에 가려 보이지 않던 파국에 눈 돌리는 벤야민은 구원의 시선을 갖고 있다." (85쪽)
(8) 위험은 기술을 먹고 자란다.
접히는 실리콘 컵을 선물받아서
지난 토요일부터 사용하고 있다.
흐물거려서 실수할 위험이 있다는 단점이 있다.
우유차를 마셔봤는데, 맛이 나빠진 느낌은 아니다.
물을 마셔봐도 괜찮다.
잘 씻겨진다.
가벼워서 여행갈때도 괜찮겠다.
실리콘컵은 규소(Si, Silicon)로 만든다.
지구에서 산소 다음으로 많은 원소가 규소(Si)다.
우리는 산소와 규소가 많은 지구에서 진화하였으므로
실리콘이 몸에 해롭지 않은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세마science와 기술 technology는,
자본주의를 잘 이끌어 갈것으로 기대한다.
우리가 늘 관심을 가지면.
"책속의 메시지는 적절한 수신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후쿠시마 '그날' 이후에도 원자력은 안전하다는 메시지가 후크송처럼 반복되며 배경음악으로 깔린 무대 위에서, 지역 개발 업적을 내세워 재선을 노리는 정치인이 각본을 쓰고, 위험인식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관료와 전문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희극이 공연되고 있다. 이들은 '위험'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자신들의 속내를 들킨양 패닉에 빠진다. 희극은 언제든 비극으로 변할 수 있음을 알고 있기에, 패닉에 빠진 그들의 공연을 구경하고 있는 우리들은, 그래서 희대의 코미디를 보고도 웃을 수 없다." (99쪽)
(9) 자본주의가 종교를 만날때
자본주의가 맥을 못추면 종교도 맥을 못춘다는 말은, 새겨볼 필요가 있다. 동의하거나 반대하거나.
먼저 동의하는 입장에서 살펴보면, 자본주의의 성공이 하나의 종교가 되었다. 실제로 의식주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낸 것이 자본주의다. 어떤 경제체제도 굶어죽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자본주의의 시대에 춥고 배고픈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정치의 실패이며 분배의 실패다.
반대하는 입장에서 살펴보면, 자본주의 이전에는 종교가 온삶을 지배했다. 자본주의가 오히려 신의 영역을 대체해냄으로써, 종교의 구원에 대해 코웃음을 치는 사람들이 늘었고, 성소에는 노인들 외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자본주의가 춤을 추면, 종교가 맥을 못춘다.
"구원에 대한 기대로 인간은 종교를 믿는다. 삶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은 천사의 구원을 기대한다. 적어도 신이 지켜 주는한 안전하리라는 믿음 때문에 신자들은 불안을 잠재운다.
자본주의의 승자에겐, 종교의 전통기능이나 인격신 없이도 불안을 잠재우는 것이 가능하다. 삶의 고통은 자본의 힘으로 잠재울 수 있다. 자본주의의 승자는 세속권력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재벌총수가 불안을 잠재우는 방법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각자 믿는 종교가 무엇이든,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본주의라는 또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셈이다.
(중략) 자본주의가 맥을 못추면 종교도 맥을 못춘다" (107~8쪽)
[ 2부 ] 삶의 평범성에 대하여
(10) 수치심, 자기통제의 덫
사람은, 그렇게 대단한 사룸이 아니어서 결코 신이될수 없다. 그렇다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방향을 제시하지 않을수는 없다. 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존중해야할 자유다. 그래서 누군가 멋진 말을 하면, 사람답게 사는 말을 들으면, 잘 새겨 들으면 된다.
그 다음이 어렵다. 후안무치한 사람은 사람다움을 가르쳐서는 안되고, 머리가 떡진 사람은 사람다움을 가르쳐도 된다? 분명 아니다. 말할 자격은 누구에게나 있다. 말하라. 그리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만 심판 받으면 된다.
"우리가 '입냄새'와 '떡진머리'같은 사소한 수치심에만 예민해져 있을때, '공금횡령', '불법상속', '논문표절', '위장전입'과 같은짓을 한 "후안무치"라는 단어로도 부족한 사람들이 (중략) 부끄러움을 가르치고 있다." (144쪽)
(11) 그리고, 자살은 계속되고 있다.
1987년 이후의 자살율을 보면, 외환위기 이후로 특별한 변동없이, OECD 평균보다 두배이상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여전히 1997년 외환위기의 후폭풍 속에 살고있다고 추정한다. 외환위기가 당시 전체 시민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니, 돌아가신 분들을 빼놓고, 앞으로도 40년은 비슷한 영향을 미친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 시기가 민주정부가 수립된 것과 일치한 것을 근거로 하여, 민주정부가 높은 자살율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게 말하려면, 이명박 - 박근혜 시절에 자살율이 떨어지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수 있어야 한다. 외환위기는 YS를 포함한 독재정부들의 경제정책의 결과였다. 외환위기를 빠르게 정리한 것이 민주정부인데, 그것을 죄라고 할수 있는가?
그러면 자살율이 외환위기의 발생과 극복과정에서 높아진 이유는 무엇인가? 위기 자체가 문제인가 아니면 위기 처리과정이 문제인가? 그것을 어떻게 밝혀낼수 있는가?
"1987년 한국의 자살률은 19.67명이었다. 1987년부터 1997년까지 자살률은 미세한 차이는 있지만 특별한 변동없이 일정한 수준을 유지해왔다. (중략) 1998년 돌연 26.69명까지 치솟았다. (중략) 경제위기와 만났다. (중략) IMF 관리체제는 끝이났지만, (중략) 영원한 현재형이다. (중략) 아노미 상태는 커진 욕망과 좌절된 욕망 사이에서 발생하기에, 단순히 경제성장율이 높아진다고 해소되지 않는다. (중략 / 뒤르켐) 사회가 앓는 병은 불가피하게 개인들도 겪는다. 사회는 전체이기 때문에 사회의 병은 각부분에 전염된다. (중략) 경제성장율의 상승이, 삶의 만족감과 만나지 못한다면, 와아가 아니라 오히려 아노미의 조건이 된다. (중략) 학자는 자살율을 설명하지만, 자살율을 낮출수 있는 방법찾기는 국가와 정책입안자의 몫이다." (174~180쪽)
[ 3부 ] 좋은 삶을 위한 공격과 방어의 기술
(12) 임금노동의 운명
복지를 노동의 보완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복지는, 노동을 하든 하지 않든, 사람으로서 꼭 필요한 최소의 것들을, 정부 또는 공동체가 채워주어야 하는 의무라고 생각해왔다. 복지가 늘어난다는 것은, 사회의 역사가 깊어지면서, 사람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이 계속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귀족이나 성직자들에게만 필요했던 것들이, 이제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개미가 땀흘리며 몰두했던 노동을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여긴다. (중략) 노동이 신성하다고 떠드는 사람들은 정작 노동을 하지않고 있다는 역설을 발견 (중략) 노동은 한편으로는 성실한 개미와 다른 한편으로는 시지푸스의 고통이라는 대립하는 이미지 사이에 놓여있다.
(중략) 노동은 고통스러운 노고이지만, 힘든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 맛볼수 있는 성취감은 대단하다. (중략) 하지만 노동이라 부를수 있는 모든 사람의 활동이 개미의 성취감을 맛보도록 해주는 것은 아니다. (중략) 현실의 노동은 간과 쓸개를 자존감과 함께 가져가고 결코 넉넉하지 않은 돈에 보너스인양 스트레스와 직업병을 함께담아 되돌려준다. (중략) 어느 누구도 살기 위해서는 노동력 판매라는 절대명령으로부터 자유로울수 없다.
(중략 / 엥겔스) 노동은 그가 제3자에게 넘겨버린 하나의 상품이다. (중략) 임금노동이 시작되는 순간 그의 삶은 정지한다. (중략) 임금노동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이다. 그것을 거창한 말로 표현하면 연대라 한다. 연대가 주류인 사회에서는 거대한 공통분모에 주목하고 복지라는 수단으로 평범한 사람들을 압박하고 있는 임금노동이라는 굴레를 헐겁게 해준다" (185~192쪽)
(13) 노동과 게으름에 대한 불편한 진실
2024년의 우리들은 주 52시간 근무제를
"매우" 불편해한다.
윤석열 대통령만 그런것이 아니다.
주 52시간을 일하려면,
하루 8시간씩 6.5일을 일해야 한다.
즉, 매일같이 일해야 한다.
주 52시간을 일하려면,
하루 10시간씩 5일을 일하고,
토요일에 나가서 2시간을 더 일해야 한다.
주 52시간을 일하려면,
하루 12시간씩 4일을 일하고,
금요일에 나가서 4시간을 더 일해야 한다.
주 52시간을 일하려면,
하루 16시간씩 3일을 일하고,
목요일에 나가서 4시간을 더 일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주 52시간 노동을
"매우" 불편해한다.
국민의 힘만 그런 것이 아니다.
OECD 2021년 연간노동시간 평균 보다
한국의 노동시간은 200시간이 많다.
연간 201시간을 더 일하려면,
하루 6시간씩 33.5일을 더 일해야 한다.
연간 200시간을 더 일하려면,
하루 8시간씩 25일을 더 일해야 한다.
연간 200시간을 더 일하려면,
하루 10시간씩 20일을 더 일해야 한다.
연간 201시간을 더 일하려면,
하루 12시간씩 16.75일을 더 일해야 한다.
연간 200시간을 더 일하려면,
하루 16시간씩 12.5일을 더 일해야 한다.
그런데, 이재용만 주 52시간제가 불편한 것이 아니다.
내 친구들도 주 52시간제를 불편해 한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등장하는 유럽의 노동하는) 소녀들은 하루평균 16시간 반을, 그리고 성수기에는 가끔 30시간을 중간에 쉬는일도 없이 계속 노동 (중략) 결국 메리는 금요일에 병이나서 일요일에 죽고 말았다. (중략 / 1970년 동대문 평화시장의 여성근로자들은) 보통 아침 8시 반 출근에 밤 11시 퇴근으로 하루평균 14~15시간을 일했다. (중략) 한달을 통틀어 휴일은 이틀, 제1주일과 제3주일의 일요일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그것이나마 꼭 지켜지지는 않았다. (중략 / 국제노동기구 ILO의 노동통계) 1980년 제조업 주당 평균 노동시간의 경우, 미국 39.7시간, 일본 38.8시간, 타이완이 51시간인 것에 비해서, 한국은 무려 53.1시간이었다. (중략 / OECD 팩트북) 1998년 한국의 임금노동자들은 1년동안 2,658시간을 노동했다. OECD 평균 1,838시간을 압도하는 1등이다. 한번 앞서면 결코 추월을 허용하지않는 한국 쇼트트랙 선수처럼"(195~9쪽)
(14) 인정받고 싶은 당신
사회의 소수자들이 말하는것에 귀를 기울이자.
4월 21일부터 하이브와 민희진의 언론전이 벌어졌다. 민희진은 회사와 싸우는 홑사람이다. 그래서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했다. 3시간이 넘는 꽤 많은 시간을 들여 그녀의 주장을 경청했다. 내 결론은, 그녀의 불만들은 회사안에서 처리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하이브는 왜 이일을 공론화시켰을까다. 그녀는 자신은 회사를 탈취할 의도가 전혀 없었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하이브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긴 싸움이 예상되지만 결국은 민희진의 결정에 달렸다고 본다.
걱정스런 일은 민희진이 흥분해서 자신을 파괴하는 일이다. 그러지 말기를 바란다.
"진정으로 평화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평화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투쟁에 나선 까닭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중략) 투쟁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싸움을 즐기는 싸움꾼이 아니다. (중략) 모든 사람은 사회속에 살수밖에 없다. (중략) 사람은 먹고살아야하지만 물질의 궁핍해결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중략) 무시와 모욕을 통해 존엄이 훼손된 홑사람 혹은 집단의 명예회복을 위한 행동인 인정투쟁 (중략 / 그러나 성공이라는) 달콤한 속삭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명예와 품위를 훼손당한 사람들이 자기존엄을 되찾기위해 시작한 투쟁을 이해할수 없다." (205~9쪽)
(15) 상처받은 홑사람
홑사람 또는 홑사주의 individualism은, 전체주의에서 내팽겨쳐진 존엄한 존재인 사람을 되살리려는 생각에서 나온것이다. 따라서 홑사주의는, 혼자만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 또는 공동체가 홑사람을 -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건간에 보호하여, 그만의 삶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줘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회가, 뭇사람들의 사룸life을 건 싸움터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홑사람은 영웅뿐이다. 아예 홑사람이라는 단어조차 무의미하던 시기에 영웅이 아닌 사람들은 그저 아무개이다. (중략) 전체주의는 평범한 홑사람에게 전체를 위해 홑사람이 희생하기를 요구하는 괴물이다. (중략) 전체주의의 그림자는 (중략) 애국주의와 나라주의에도 살아있다.
(중략) 홑사람은 온갖 집단들의 압력속에 노출되어있다. (중략 / 홑사람의 구원은) 홑사람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를 문제삼을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중략) 한국인은 나라가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오직 돈만이 나를 보호해줄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러한 이기심은 해결책이 아니다.
홑사람의 먹고살 걱정을 해결하지 못하는 나라는 홑사람을 대리할 자격이 없다. 홑사람은 나라가 최소한 먹고살 걱정을 해결해준다는 믿음에 따라 많은 권리를 나라에 내어주었다. (중략) 홑사람들의 경쟁으로 치환된 홑사주의가 지배하면, 세상은 자신의 배꼽만을 쳐다보는 탐욕스러운 개별자로 넘쳐나기 마련이다. (중략) 침해받을수 없는 홑사람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과 자기의 이익만을 고집하는 경제홑사주의는 다르다.
(중략) 홑사람에 대한 관심은 나의 이익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홑사람이라는 작은 단위속에서 반복되는 사회라는 커다란 단위에 대한 생각이다. (중략) 학력.재산.권력은 잘난척을 낳지만, 품위있는 홑사람과 사회는 배려를 제일 덕목으로 삼는다." (215~222쪽)
(16) 가족이라는 운명과 화해하는 방법
아무래도 우리 아부지말이 맞았나봐.
"공부해서 나중에 독재타도하면 되잖아.
왜 굳이 힘없는 지금 이러냐?
죽을라고?
힘을 키워라. 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어차피 도망이나 다닐 것이었으면,
이런 멋진 공부나 열심히 할것을.
다시 대학생이 되고 싶다.
"아버지의 특성은 개인의 특질이라기보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특징에 가깝다. (중략) 아버지는 저한테 그토록 엄청난 권위로 여겨지던 분이셨으니까요. (중략 / 아버지는 아버지의 세계에서) 수시로 명령을 내리셨고, 그 명령이 지켜지지 않을때면 크게 역정을 내셨지요. (중략) 저는 줄곧 치욕속에서만 살았지요. 아버지의 명령에 따랐으나 그건 치욕이었습니다." (카프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중에서)
우리 세대는 권위주의 독재체제 때문에 어떤 것에도 권위가 없었다.
우리가 원하는 시대를 우리 스스로 만들려고 했다. 희생이 정말로 컸다.
우리는 제대로 살아가지 못했고, 원하는 공부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우리가 원하는 시대를 마침내 만들어서 사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사회의 운명을 뒤집어쓴채, 괴로워하고 신음하다가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전시대와 대결하는 방법을 깨닫고 그렇게 성인이 된다. (중략) 성인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감을 담는 그릇이다." (228~9쪽)
(17) 배운 괴물들의 사회
그래, 사람은 야만에서 벗어나야한다. 내가 너를 죽여야 사는, 그런 야만의 세계에서는 살고싶지않다. 그럴려면 배워서 계산하고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야한다.
"철학자의 눈에는, 배움속에서 사람이 야만에서 벗어나 성숙한 사람이 되는 과정이 보였다. (중략 / 칸트는) 사람은 교육을 통해서 어떤 목적 또는 여러가지 목적들에 숙달되고 숙련된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할 뿐만아니라 (중략) 교육을 통하여 선한 목적들을 삶속에서 지향하고 선택할수 있는 마음의 성향을 길러야 한다. " (242~3쪽)
사회학자가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을 이해하지만, 자본이나 성장, 교육은 아무 죄가 없다. 건강한 우리 몸속에 우리를 해하는 기생충들이 있듯이, 건강한 우리 사회에도 사회를 병들게하는 요소들이 있게 마련이다. 자본이나 성장, 교육과 같은 것들이 사람들에 의해 나빠지지 않도록 주의깊게 관리해야 한다. 잘 안되는 경우가 많겠지만, 잘 다루면 된다. 자본이나 성장이 아니라 사람을.
일제시대와 이승만 유신독재시대와 군부독재시대와 지금의 검찰독재시대를 비교해보면, 폭력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 일단 살아있으면, 기회가 있다. 배운괴물들이 설치고 있어서 몹시 불쾌하지만, 배우지도 못한 야만인들이 설치는 것은 몇배나 더 괴롭다. 배운괴물들의 악행은 쉽사리 끝나지 않으므로 감시하고 지적하고 끌어내리는 수밖에 없다. 평화로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말과 글로 하는 정치"속에서 해결하는 방법밖에 없다.
"경제성장이라는 관념은 이제 사람들을 홀리는 망상으로 둔갑해 경제는 물론,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사람의 심리에 이르기까지 사회전체를 조직하고 시스템과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망상체계로 진화했다. (중략) 높은 교육열과 화려한 교육관련 통계지표에도 끊임없이 이 사회에서 나타나는 '배운괴물'들이 벌이는 악행들의 '쇼쇼쇼!'가 끝이나는 순간은 대체 언제일까?" (244~6쪽)
(18) 죽음에 대한 성찰과 에필로그
전쟁이 일어나면 언론들은 신난 것처럼 보인다. 걱정을 양념으로 해서 기사와 이야기를 마구 쏟아낸다. 전쟁이,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지만 모른채 하는 듯하다. 끔찍한 시체 대신에, 난무하는 포탄들과 무너진 잔해들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럴까? 그렇다면, 끔찍한 시신들을 가감없이 보여주면, 사악한 전쟁을 과연 끝낼수 있을까? 일제시대에 일본군이 자행한 우리 조상들에 대한 끔찍한 살육행위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반인륜범죄자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없어질까? 어떻게 해야 할까?
"구경거리로 전락한 사람의 죽음은 산자들이 거실에서 누리는 최대의 사치중 하나이다. 죽음이 매일매일 재생산되어 과잉축적이 빚어지는 전쟁조차도 미디어를 통해 중계되면 스펙터클이 된다. (중략) 죽음이 자신의 일이되면, 그보다 공포스러운 대상도 없다. 그 공포를 다스리는 좋은 방법중 하나, 죽음을 마치 일어나지 않는 일처럼 만드는 것이다. (중략)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248쪽)
홑사주의 individualism에 대한 논의와 달리, 스스로 애송이라는 사회학자의 고백이 진심이라면 좋겠다. 사회학자들은, 그들끼리는 서로를 전문가라고 평하지만, 80억의 생각 중 하나에 불과하다. 80억이 모두 공감하지 못한다. 중력을 모르면 모르되, 일단 중력을 알게 되면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그럴수가 없는 사회학이라면, 겸손한 자세로 다른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세상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 생각에서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의미가 있다.
사회학이 나아가야 할길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예측하거나 80억이 동의하는 주장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아니면 수많은 주장들이 계속 난무하는 상태로 무엇이 축적되는지도 모른채로 주장하는 것일까?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면 학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지만, 어떻게 80억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불가능하다.
"아카데미라는 성소에 안주하던 사회학자는 대부도주민들 앞에서 자신이 세상 사람들과의 공통감각을 상실한 완전히 고립된 존재에 불과함을 철저하게 깨달았다. (중략)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책을 통해서만 생각할수 있는 모범생은 '세계로서의 사회'속에서 전문가 대접을 받을수 있지만, '세상으로서의 사회'에서는 애송이일뿐이다.
(중략) 상처받은 삶은 상처받은 사회를 치유하지 않은채 치유될수 없다. (중략) 당신의 고통은 당신탓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략)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죄가 없는 홑사람들이 죄가 많은 사회에게 불만을 말하는 애처러운 시도이다." (259~266쪽)
영화평론가들은 영화를 평론할 때, 적어도 세번은 본다고 합니다.
그래야 평론다운 평론을 할 수 있는 감이 생기죠.
서평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종합 서평은 쉽지 않습니다. 시간을 들여야겠지요.
그래서 대안을 제시합니다.
적어도 어느 부분을 세번 읽고 세번 정도를 생각하면,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서평을 할수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제가 서평에 목을 매는 이유는,
1) 어차피 모르는 것이 무한한 세상이어서,
모르는 것은 셀수 없지만,
적어도 아는 것은, 하나씩 쌓아나갈수 있기 때문이에요.
2) 여덟분이 적어도 하나씩을 알려주시면, 그것들로 저를 살찌우려는 욕심이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