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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주고도 할 수 없는 일_141120, 목

소화제를 먹었는데도 밤새 머리가 아파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간신히 눈을 뜨고 인간극장 '우리딸 향옥이'를 보았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아버지 병수발을 하며 김포에서 농사를 짓는 37세의 처녀 향옥씨의 이야기는 안타까우면서도 감동적이다. 몸을 추스리겠다는 아버지의 강력한 의지가 이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텐데, 병으로 인한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연 내가 저런 상태에 처해 있으면 가족들을 위해 일어서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발동할 수 있을까. 겨우 소화를 못시켜 일어난 두통때문에, 일은 물론이고 책읽기와 전화 조차도 힘든 상태였던 것을 감안해 보면, 반신을 쓰지 못하는 상태에서 과연 얼마나 재활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한쪽을 질질 끄는 불편한 몸으로 운동을 나오는 아저씨들은 정말 대단한 의지의 소유자들이다. 이제 그분들을 안타깝게만 바라보았는데,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의지를 존경해야겠다.

 

남아있는 벼들을 도정하기 위해 정미기를 청소했다. 기분좋게 정미를 시작했으나 찰벼 60kg의 도정을 마치기도 전에 고장이 났다. 첫번째 고장은 왕겨가 배출되지 않는 문제였고, 두 번째 고장은 전기플러그가 녹아 붙는 고장이었다. 정미기를 연결하는 굵은 전기선을 창고 옮기기 작업을 하면서 어디에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조금 가는 선이지만 그래도 꽤 굵은 선으로 정미기를 돌렸는데, 전기 저항이 제법 커서 플러그가 녹아버렸다. 위험한 일이었다. 낙심이 되고 짜증이 일어났다. 그래도 대책을 찾아야 했다. 누가 해주는 일은 없으니.

 

 

태창정미소에 전화를 걸어 흑미와 찰벼, 메벼를 도정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흑미는 절대로 안된다고 한다. 양이라도 많으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너무 적은 양이라 불가능하다고 한다. 흠, 돈 주고 할 수 없으니 어쩌겠는가. 이천 평 농사지어서 천만원의 매출이 일어나는데, 삼천만원 짜리 트랙터, 천만원 짜리 이앙기, 이백만원 짜리 관리기, 오천만원짜리 콤바인, 이백만원 짜리 정미기, 천만원 짜리 트럭 등등. 갖춰야 할 장비값이 1억원이 훌쩍 넘는다. 아무리 농지가 가치 상승하는 자산이라고 해도 순이익 천만원도 아니고, 연간 매출 천만원을 위해 1억원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렇게 투자해서 여기 저기 땅을 빌려서 3만평 농사를 지으면 순환은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계가 있어서 일을 하더라도 3만평을 농사지으려면 인력도 그만큼 더 들어가야 하고, 농부가 쉴 틈이 없어진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일을 줄이기 위해 농약과 제초제를 쓰게 되고, 결국은 자신의 몸과 하늘이 주신 땅을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마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농기계 제도가 도입되면 합리적인 투자가 이루어질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공동 농기계는 관리 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농기계 사용 문제 때문에 다툼이 생길 소지도 커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아무리 보아도 우리 농업도 대자본의 농업회사에 의해 농업이 이루어지고, 나와 같은 복합소농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 확실해 보인다. 농업회사들도 화학농법에서 벗어난 농사를 추구하게 된다면 좋겠는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결국은 무일농원을 키워서 친환경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대형 농업회사로 만드는 것만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음,,,

 

가정용 정미기를 새로 구입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은 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새로운 정미기는 믿을 수 있을까. 구형 정미기는 수리가 안된다고 하는데, 새로 구입한 정미기는 과연 수리를 해 주겠는가 말이다. 공장에서 직접 나와서 틀림없이 수리를 해 주겠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그것을 믿게 하려면 지금 고장난 기계도 수리를 해 줘야 한다. 이 기계는 대리점을 통해서 판매한 기계라 수리를 못해주고, 공장에서 판매한 기계는 책임지고 수리해 주겠다는 것은 합리적인 대답이 아니다. 결국 우리 마음에 상처만 주게 되는 논쟁이 벌어진다.

 

정미소에서 정미를 하게 되면 큰 문제가 있다. 현미로 도정해도 쌀눈이 사라져 버린다. 깜부기나 돌, 뉘같은 것들이 완벽하게 제거되어 깨끗한 쌀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좋은데, 쌀 영양의 핵심이라는 쌀눈이 사라져 버리니 정미소에서 정미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까라는 의문은 항상 갖는다. 게다가 제거된 쌀겨라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내어주지 않으니 더욱 답답한 노릇이다. 이래서 소농의 마음은 또 무너져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