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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요처럼 김용옥의 강연을 듣다_맥스웰과 과학 03_200924

들깨밭의 풀을 뽑으며 두 개의 강연을 들었다. 하나는 주원준의 "고대 근동 세계와의 대화, 그리고 구약성경"이고, 또 하나는 김용옥의 "노자"다. 모두 집중이 잘 되는 훌륭한 강의였다.

 

수 년 전에 주원준의 강연을 읽고 수메르의 길가메시 서사시와 메소포타미아 관련 책들을 읽으려고 노력했었다. 오늘 강의에서는 쐐기 문자를 사용한 언어가 무려 30가지가 넘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대 근동지역 - 흑해 남부의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메소포타미아, 레판트, 이집트 지역 - 에는 BC 10세기 이전에 이미 많은 민족들이 고대 문명을 이루어 서로 교류 경쟁하며 살았다. 그 속에서 많은 종교들이 태어나 서로 영향을 받았고, 가장 약한 민족이었던 유대 민족의 구약도 탄생하였다. 영향과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고대의 종교를 바라보고 종교간 대화를 하자는 주장이 좋았다.

 

주원준의 강의를 듣다가 모세의 출생이야기가 어디에서 또 나오는 지를 생각해 보았다.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바구니에 넣어 버려졌다. 사르곤 대왕은 BC 23세기경 메소포타미아 한 마을의 제사장이었던 어머니와 정원사에게서 태어났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강제로 제녀가 되어야 했던 어머니 레아가 전쟁의 신 마르스와 관계를 맺어 태어났다.  

 

"히브리라는 용어는 본래 종족이나 인종과는 무관한 용어로서 하피루(Ḫapiru : 또는 Apiru)의 변형철자인 하비루(Habiru)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는데, 이 하피루는 여러 가지 일을 해주고 돈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던 민중계급을 가리킨다. 성서의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에서 수세대에 걸쳐 살았으나, 그들이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자 파라오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중략) 히브리인들의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이집트 사람들이 취했던 조치 가운데 하나는 갓 태어난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모세의 부모인 아므람과 요게벱은 3개월 동안 모세를 감추어 두었으나 결국 역청과 송진을 바른 갈대 바구니에 그를 담아 나일 강에 띄워 보낼 수밖에 없었다. 모세는 목욕중이던 파라오의 딸에게 발견되어 이집트 궁정에서 양육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전승의 진실성을 의심한다. 아무튼 그의 이름은 이집트어 모세(물에서 '태어났다'라는 뜻에서 파생된 것이며, 이 이름은 투트모세('[신] 토트가 태어났다'는 뜻) 같은 이름에도 나타난다.

 

(중략) '존재한다'는 동사의 사역동사 형태인 야훼는 '창조하는(존재하게 하는) 자'라는 뜻이다. 모세는 이 계시를 받고 히브리인들의 하느님이 자연과 세상의 민족들에 대해 주권을 가진 분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백과 중에서). 

 

김용옥은 천지 자연을 의심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철학의 올바른 사유가 가능하고, 현상과 본질을 구분하여 진정한 무엇을 찾을 것이 아니라 현상과 본질이 모두 물질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철학하는 자세라고 주장한다. 설득력이 있다. 노자를 해석한 박세당이 송시열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린 것을 매우 안타까워 한다. 강연 파일이 꽤 많아서 책상에 앉아 같이 읽어야 하는데, 마치 노동요처럼 듣고 있어서 매우 아쉽다.

 

1. 모든 것을 바꾼 사람 맥스웰 : 바실 메이헌 지음 / 김요한 옮김 / 지식의 숲(2008)

 

핀과 끈을 이용한 타원 그리기도 다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날의 할 일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84쪽) 맥스웰이  쓴 빛의 혼합에 관한 논문에 대한 설명을 읽었다. 이해하지 못하겠다. 

 

"빛깔을 인지하는 원리에 대해 어느 누구도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중략) 뉴턴은 천재적인 가상의 모델을 이끌어냈다. 그는 한 동그라미 안에 스펙트럼의 모든 빛깔을 배치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그 동그라미의 적절한 위치에 저울추를 실어 어떤 특정한 혼합물에 나타나는 빛깔을 재현했다.

 

(중략) 색소는 빛깔의 추출자로서 작용하므로 두 물감을 혼합한 뒤에 우리가 보는 빛은 물감이 흡수하지 못한 그 어떤 빛깔이다. 다시 말해 색소를 혼합하는 것은 뺄셈 과정(감산혼합)인데 반해, 빛을 혼합하느 것은 덧셈 과정(가산혼합)이다.  (중략) 제임스가 빨강, '초록', 파랑을 삼원색으로 하여 디스크판을 회전시켰을 때 그것은 아름답게 제 기능을 했다. (중략) 제임스는 단일한 빛깔이 나머지 모든 빛깔과 연결된 방식을 규정하는 일종의 체계를 알아내고자 했다. 그가 한 가지 발견한 것이 바로 맥스웰 빛깔 삼각형이다.

 

(중략) 색맹인 사람은 빨강과 초록을 구별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제임스는 치료 방법을 하나 고안했다. 바로 빨간 렌즈 하나와 초록의 렌즈 하나로 된 안경이었다. 색맹인 사람들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86~93쪽)

 

빛의 혼합과 눈의 색갈 인지 방식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데 계속해서 전기와 자기로 넘어가서 설명을 한다. 못 알아 듣겠다. 또 하나의 과제로 두고 가자. 패러데이 이야기가 재미있다.

 

"마이클 패러데이는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처럼 오늘날까지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칭송받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중략)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 열네 살 때 책 제본사의 도제로 들어갔다. 패러데이는 제본소에 들어온 책으로부터 닥치는 대로 지식을 주워 모았고 백과사전의 과학 항목에 푹 빠져들었다. (중략) 런던의 영국 과학연구소에 열리는, 뛰어나고 카리스마 넘치는 험프리 데이비 경의 강의를 청강 (중략) 병 세척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실험하는 일을 배워나갔다 두 번째 도제 생활이었다. (중략) 데이비가 죽고 나서 패러데이는 영국 과학연구소 교수로 임명됐다.

 

(중략) 그는 대단히 많은 수의 실험을 수행하고 발표했다. 대다수는 화학, 전기, 자기분야였다. (중략) 패러데이는 또한 자신의 성품처럼 매우 고요한 방식으로 실험을 대중에게 선보였다. (중략) 그는 대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다. 그리고 수학에 관해서라면 깡그리 몰랐다. 모든 사람이 그의 실험적 천재성에 놀라워했지만 이론가로서의 그의 재능을 그에 상당하게 평가해주는 이는 드물었다. 맥스웰이 그런 소수의 사람 중 하나였다." (98~9쪽)

 

매우 강력한 믿음이 맥스웰에게 있었다. 자연과학과 물리학은 실험을 통하여 엄밀한 논리를 통해 구축해야 한다. 

 

"자연 법칙을 주의 깊게 부단히 공부해가면서 저는 우리가 적어도 공허하고 막연한 사고방식의 위험으로부터 피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믿게 되었습니다. (중략) 인류의 지성이 실험적인 노력이 없이 (중략) 물리학의 체계를 구성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117쪽)

 

2. 과학이란 무엇인가? : 리처드 파인만 강연 / 정무광 정재승 옮김 / 승산(2008)

 

파인만이 1장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벌써 잊었다. 다시 찾아보니 과학의 세 가지 측면인 실용 과학, 새로운 과학, 방법의 과학이다. 이것을 토대로 가치의 불확실성에 대한 주제로 두 번째 강연을 한다. 삶의 의미에 대해 누군가가 내놓은 답이 정확한데도, 누군가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과학자는 전세계인이 거부할 수 없는, 받아들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어떤 답을 내어놓고 싶어한다. 그것을 찾을 때까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여정은 끝이 없어야 한다. 끝이 없으니 지칠 필요도 없고, 찾았다고 해서 오만할 필요도 없다. 파인만도 열린 마음으로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사상을 찾으려 한다. 더 들어 보자.

 

"교육은 인간의 잠재력을 키울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파괴할 수 있는 방향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중략) 물리적 세계가 어떻게 운행되는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이 세계가 누군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중립적인 법칙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일 뿐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은 선과 악에 대해 우리에게 아무런 가르침을 주지 못한다. (중략)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시대들을 떠올려 보면, 하나같이 사람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과 지나친 독단주의에 빠져있을 때였다. (중략)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올바른 도덕적 가치란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해 우리가 아직 그 해답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50~53쪽)

 

파인만이 가치의 불확실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모든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정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종교 때문이다. 과학과 종교가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오래 전에 배순훈 박사가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나오는 것을 보면서 느꼈던 묘한 감정이 떠오른다. 과학자가 성당에 와서 기도를 한다라는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과학자들은 아무런 동요나 모순 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데 말이다.

 

1) 형이상학으로서의 종교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과연 무엇이며 그것들이 어디서 왔는지, 또 인간은 어떤 존재이고 신은 누구인지, 신의 성격은 어떠한지 등에 대해 알려준다. (62쪽)." 이 경우 과학과 종교는 충돌한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인간이 원숭이에게서 진화해 왔다는 것은 신의 인간 창조론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종교와 과학의 화해할 수 없는 강일까. 진화론을 받아 들이는 종교인이 있을까. 신의 존재를 믿는 과학자가 있을까.

 

있을 수 있다.

 

2) 도덕으로서의 종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62쪽)." 이 부분에서 종교는 차고 넘치게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과학은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니다, 과학자도 때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이야기한다. 원자폭탄이나 원자로가 터지면 수많은 사람들과 자연이 파괴되므로 원자폭탄은 개발해서도 사용해서도 안되며, 원자력발전소도 폐쇄해야 한다.

 

도덕으로서의 종교는 과학과 서로 다른 범주에 있다는 이유를 밝힌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어서 좋은 생각의 주제가 될 수 있겠다. 우선 파인만의 생각을 들어보자.

 

  2-1) "종교의 형이상학적 입장이 변한 후에도 도덕적 관점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63쪽)"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해도 과부와 고아들은 보살펴줘야 한다.

  2-2) "최소한 기독교적인 윤리를 실천하는 선한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63쪽) 매우 용감한 주장이다. 기독교 윤리를 실천하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제1계명은 '하느님을 우리의 창조주(야훼)로 믿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가르침'이 너무 훌륭해서 종교를 믿는다. 일부 종교인들이 펄쩍 뛸만한 주장이다. 

  2-3) "과학적 연구에 기초해서 어떤 문제에 대한 '도덕적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 (66쪽)" 모든 과학을 도입해도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는 말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  

  2-4) 종교와 과학이 서로 다른 범주라는 철학.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신이 잘 못하는 부분이라고 했으니 대단한 통찰이 없어도 이해해 주자.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행동에 대한 선택의 문제'라고 규정한 파인만은, 이 문제를 둘로 나눈다. "이걸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와 "나는 이런 상황이 벌어지길 원하고 있는가?"다.

 

   둘로 나누는 것만으로는 행동 선택의 동기나 문제를 포괄할 수 없다. 2-4-1)예측(일어난다), 2-4-2)욕망(원한다), 2-4-3) 의무(해야 한다), 2-4-4) 행복(하면 즐겁다), 2-4-5) 필요(할 필요가 있다) 등등 꽤 많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모든 범주를 다 다룰 수 없으니 예측과 욕망의 범주만 다룬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2-4-1) 행동 선택을 위한 예측 : 과학의 영역이다. 행동하고 결과를 관찰하거나, 행동의 결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행동을 추동하는 예측의 작용이다. 예측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과학의 영역이다. 사회과학도 경제학도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결과를 예측할 수 있고, 결과가 재현되어야 한다.

 

  2-4-2) 욕망에 의한 행동 선택 : 과학으로는 답할 수 없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안다는 것만으로 (중략 / 그 행동을) 원하게 될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중략) 그래서 그 둘은 서로 독립적이라고 믿는 것이다." (68쪽)

 

3) 영감과 감화를 주는 종교는, "옳은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양심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62쪽)." 파인만은 감화 insperation을 "사람들에게 불의와 싸울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69쪽)" 것이라고 한다. 아는 것을 실천하도록 하는 힘은, '앎 그 자체'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다. 파인만의 생각을 잘못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밖에는 해석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파인만의 생각은 틀렸다. 하느님을 믿지 않더라도 종교의 도덕 규정은 실천해야 한다는 마음이 이미 존재한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지 않아도 불의와 싸우고 가난한 자를 돕는다.

 

강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공산당이 지배하는 소련에서 왜 과학이 발전할 수 없는가를 증명한다. 극심한 동서냉전의 분위기가 아니더라도 어느 시대나 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는 이야기다. 

 

"한때 인간은 아이디어 내기를 멈춤으로써 침체 기로에 빠져있던 시절이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생각이 꽉 막혀 오도 가도 못하고 있기도 했었다. (중략) 미래의 세대가 끊임없이 의심하고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방식을 찾기 위해 쉼 없는 모험을 떠나는 자유를 갖게 되길 바란다. (중략) 어떤 정부도 과학적 원리의 진위여부를 판단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어떤 문제를 연구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정부는 간섭해선 안된다. (중략) 정부는 국민들이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자유를 계속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우리 모두가 인류의 그칠 줄 모르는 지적 모험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의무'만이 있다." (82~3쪽) 

 

두 번째 강연을 굉장히 길게, 기대를 가지고 정리해 봤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긴 논리도 딱히 논리 정연하게 보이지 않는다. 과학 대신에 철학, 학문, 예술, 정치 등 인간 활동의 갖가지 영역을 대입해도 좋고, 종교 대신에 정부와 국가를 집어 넣어도 좋다. 인류 문명의 발전을 위해서는 사상의 자유가 중요하다.

 

"과학과 종교는 다르다. 과학은 계속해서 부정확한 답을 하고 있다. 과학이 답을 할 수 없는 부분에서 종교는 답을 할 수 있다. 과학은 모든 것을 의심할 자유를 가져야 발전할 수 있다. 과학은 예측하기 위해 실험과 관찰과 재현을 해 보려고 노력한다. 이런 과학의 노력을 종교의 이름으로 탄압하지 말고 자유롭게 놔 두자. 그렇게 하더라도 종교는 큰 상처를 입지 않는다."

 

동해안에 비를 뿌리는 구름과 무일농원에 맑은 공기를 뿌려주는 하늘